2회

도희의 한 시간 (2)

도희는 기차역에서 걸어서 십오 분 거리에 있는 고등학교를 다녔다. 고속철도 개통 일정에 맞춰 기차역은 대대적으로 신축 공사를 진행했다. 덕분에 등굣길은 공사판이었다. 기차역 앞으로는 개천이 흘렀다. 개천을 따라 관공서와 상가들, 시장과 학교와 병원이 밀집해 있었다. 밤새 길바닥에 뿌려진 술집 전단지와 웅크리고 있는 노숙인들, 시장 상인들에게 믹스커피를 판매하는 수레, 공사장의 인부들과 파이프 더미, 출근을 하는 사람들이 뒤엉켜 등굣길은 번잡했다. 그러나 학교 정문에 들어서면 분위기가 바뀌었다. 운동장에는 아침 안개가 내려앉아 있었다. 학생들이 한 줄로 느릿느릿 언덕을 올랐다. 느릿느릿 꽃잎이나 낙엽 따위가 굴러다녔다. 아득한 시간이 고여 있는 웅덩이 같았다. 학교는 오래된 병원을 개조한 건물이었다. 어느 공간이 수술실이었는지 추측할 수 있을 만큼 병원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차가운 느낌의 타일과 활짝 열리지 않는 창문을 좋아하는 학생은 없었다. 학교 건물 뒤에는 자그마한 정원이 있었다. 환자들의 산보를 위해 조성되었던 공간일 것이었다. 그 정원 뒤에 수녀원이 있었다. 수녀원에 수녀가 몇 명이나 살고 있는지 학생들도 몰랐다. 수녀들은 건물 밖으로 거의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 중 몇은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병원이나 수녀원에서 죽었을 사람들에 대한 괴담이 넘쳐났으나 학교가 스산하지는 않았다. 온도와 습도를 지정하는 식물원처럼 꼼꼼하게 관리되어온 따뜻함이 그곳에는 있었다. 그 학교는 그 분위기로 유명했다. 명문고는 결코 아니었고, 그 반대에 가까웠음에도 학부모 사이에서 평판이 좋았다. 사람들은 그 분위기를 인성이라고 말했다. 인성을 가르치는 학교. 처음 입학했을 때는 앞니 사이로 침을 뱉는 아이도 있었다. 복도의 가로 폭을 일렬로 꽉 메운 채 장악하듯 걸어다니는 무리도 있었다. 그러나 일 년 안에 그 행동을 슬그머니 그만두게 되었다. 적어도 학교 안에서는 그랬다. 학교 특유의 분위기에 대부분 흡수되었다. 수녀들은 교칙에 엄격했다. 그러나 농담을 잘했고 뒤끝이 없었다. 축제 때면 영화 <시스터 액트>의 한 장면처럼 최신가요에 맞춰 춤을 추었다. 신부는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학생들과 손편지를 나누는 노수녀도 있었다. 그것이 얼마나 고된 노력인지를 학생들도 알았다. 도희도 노수녀와 손편지를 나눈 학생이었다. 사실은 씻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그래서 머리를 자주 감지 않는다고 노수녀는 도희에게 고백했다. 노수녀가 자신의 방 구조를 편지에 그려준 적도 있었다. 네모 안에 두 개의 네모와 동그라미 하나가 그려져 있었다. 책상, 의자, 침대 같은 단어들이 적혀 있었다. 그게 다였다. 도희는 학생 누구도 들어가보지 못한 수녀원에 들어가본 듯했다. 노수녀의 방은 도희의 방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노수녀와 편지를 나누는 게 좋았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이 학교가 자신을 외롭게 만드는 것 같다고 도희는 편지에 적었다. 등교를 할 때마다 새로 개통된 KTX를 타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데, 수녀님도 그러지 않느냐고 물었다. 노수녀에게 관심을 더 받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적고 보니 자신이 숨겨왔던 비밀이 담겨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노수녀는 답장을 보내왔다.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다고 적혀 있었다. 도희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도 적혀 있었다. 도희의 꿈에는 지금도 종종 노수녀가 나왔다.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구나.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노수녀에게 편지를 받은 다음날, 도희는 등교를 하다 말고 걸음을 멈추었다. 발걸음을 돌렸다. 네온사인이 켜져 있지 않은 유흥가를 걸었다. 오래된 건물들은 아침햇살 때문에 벽에 간 실금 따위를 선명하게 드러냈다. 불을 밝히고 있는 건 맥도날드와 성인 오락실뿐이었다. 맥도날드에서 애플파이를 주문했다. 반쯤 눈이 감긴 점원이 빨간 포장지에 담긴 애플파이를 내밀었다. 입천장이 벗겨질 정도로 뜨거웠다. 한입 꿀꺽 삼키고는 조금씩 베어 먹었다. 바삭거리는 소리가 귀를 채웠다. 그다음에는 성인 오락실에 들어갔다. 인형뽑기 게임을 했다. 눈이 빠지도록 슬롯머신을 보고 있는 아저씨 뒤에 서서 눈이 빠지도록 슬롯머신을 쳐다보았다. 장화를 신은 도매상들이 식재료 더미를 나르는 시장을 걷기도 했다. 시장 바닥은 물기로 척척했다. 걸을 때마다 뒤꿈치에서 흙탕물이 튀었다. 기차역에 들어갔다. 완공된 역사 안에 들어가보는 건 처음이었다. 에스컬레이터 두 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한결 높아진 천장은 곡선을 이루었다. 여기저기에 천창이 설치되어 채광이 좋았다. 도희는 대합실에 앉았다. 열차 출발 시각을 알리는 전광판을 보았다. 1교시가 끝나갈 시간이었다. 도희는 서울행 기차표를 끊었다. KTX는 무궁화호와 달리 머리가 날렵했다. 새것답게 윤이 났다. 이게 KTX구나. 기차는 겁이 날 만큼 빨랐다. 객실에서 사담을 나누는 사람도 없었다. 내부가 조용해서 속도가 더 빠르고 무섭게 느껴졌다.

노수녀가 도희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내왔다. 친구들도 보내왔다. 모르는 아이들까지도 연락을 해왔다. 말을 섞어본 적 없는 다른 반 아이들이었다. 춥게 지내지 않기를 바란다는 말이 꽤나 많았다. 그 문장들이 도희는 낯익었다. 일 년 전 한 학년 위의 선배가 죽은 적이 있었다. 오토바이를 타다가 사고가 났다고 했다. 선배가 오토바이를 탄다는 걸 알고 있던 사람도 있었고 몰랐던 사람도 있었다. 학교는 이 사고를 공식적으로 전교생에게 알렸다. 온 학교가 다 같이 슬퍼했다. 말 한마디 섞어본 적 없는 그 선배에게 도희도 편지를 썼었다. 여기는 봄이 왔고 매점에서 팔던 핫팩도 사라졌어요. 그곳이 너무 춥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자신이 적었던 문장과 메시지 속 문장들은 닮아 있었다. 도희는 속으로 되뇌었다. KTX로 겨우 한 시간 거리야. 날씨가 다를 만큼 멀지 않단 말이야. 도희는 초여름의 밤거리를 걸어다녔다.

옆자리에서부터 시선이 느껴졌다. 창밖을 보고 싶다던 노수녀가 도희를 힐끔거렸다. 처음에는 노수녀가 화장실에 가고 싶은 모양이라고 예상했다. 그다음에는 창밖을 구경하듯 사람을 구경하는 취미가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다음에는 노수녀가 어떤 신호를 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개를 돌려 자신을 한번 봐달라는 뜻일지도 몰랐다. 교복을 입은 채 밤거리를 걷고 있던 학창시절의 도희 옆에 옆자리 노수녀가 동행하기 시작했다. 종묘의 담벼락을 따라 걷고 있는데 노수녀가 옆에 있었다. 공원 벤치에 앉아 있을 때에도,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먹고 있을 때에도 옆에 있었다. 노수녀는 도희의 옆얼굴을 빤히 보았다. 밤거리는 한강 둔치로 바뀌었다. 상수나들목을 통과하자 밤섬이 보였다. 도희는 한강을 멜로드라마 속에서나 보았는데, 로맨틱했던 영상과 달리 강가는 황량했다. 잡풀이 무성했다. 페트병이나 맥주캔 같은 것들이 굴러다녔다. 냄새도 좋지 않았다. 강 건너편에 빌딩들이 서 있었다. 국회의사당이 불을 밝히고 있었다. 한강의 다리 위로 지하철이 지나갔다. 꽤나 먼 거리였는데도 지하철 안의 사람들이 또렷하게 보였다. 그 지하철 안에 도희와 노수녀도 앉아 있었다. 도희의 자리에서 잠에 빠져버린 여자도 있었다. 여자와 똑같은 모습으로 잠든 엄마도 있었다. 사람들은 지하철의 손잡이를 잡고 있거나 출입문에 기대어 있었다. 그들도 강을 보고 있었다.

엄마가 왜 하필 기차를 타고 정동진에 갔는지 알 것 같았다. 갈 수 있는 곳이 그만큼 없었던 거겠지. 도희도 갈 곳을 더는 알지 못했다. 도희는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