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회

12

벽난로 속에서 타오르던 장작불이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엽의 아버지가 마트에서 사온 양고기는 생각보다 질겨 오래 씹어야 했다. 나는 껌을 씹듯 고기를 우물거렸고 어머니는 그런 나를 지긋이 바라봤다.

젊을 때 이 안 좋으면 늙어서 고생하는데.

아직 괜찮아요.

괜찮긴. 얘도 치과에 다니느라 돈 많이 썼어.

왜 갑자기 내 얘기야.

어릴 때 치과 안 간다고 울고불고. 지금은 얼마나 다행이니.

누나는 턱을 과장되게 움직이며 음식을 씹었다. 그 모습을 보고 모두 웃었다. 장작을 가지러 나갔던 아버지는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며 손바닥에 묻은 먼지를 털었다.

아침에는 더 춥겠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장작을 받아들었다.

물이 가까워서 그 방 춥다. 여기서 자.

몸에 열이 많아서요. 괜찮아요.

어머니는 아버지 옷에 묻은 나뭇잎을 떼며 말했다.

잠은 편하게 자야지. 우리랑 자면 잠이 오겠어? 그때도 엽이 방에 들어가면 해가 중천에 떠야 나왔는데.

밤이 되자 동네는 이상하리만큼 적막했다. 도로를 오가는 자동차들도 온데간데없이 자취를 감춘 것 같았다. 이따금 수면에서 뭔가가 뛰어오르는, 아마 물고기로 짐작되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부모님과 누나는 그 적막을 채우기 위해 끊임없이 말하고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 나 역시 적막 뒤에는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알기에 평소보다 더 오래 음식을 먹었다. 이렇게 만났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어떤 의미를 주고받은 것과 다름없었다. 침묵 위로 많은 이야기가 떠다니는 것 같았다. 벽난로에 장작을 넣고 불쏘시개로 불을 지피던 아버지는 헛기침을 한 뒤 내게 말했다.

엄마는 건강하신가?

안 그래도 오기 전에 연락했어요.

그러고 보니 네 엄마랑은 한 번을 못 만났다.

아버지는 불쏘시개로 더 깊이 장작을 휘저었다.

장작에 물이 고인 것 같네. 이즈음부터 호수에 물안개가 생기거든.

처음에 왔을 땐 참 장관이었는데. 이젠 불편하다니까.

어머니는 벽난로에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

돈벌이는 괜찮아? 작가는 배고프다던데.

아빠, 그거 다 옛말이야. 요즘은 돈 잘 버는 작가들도 많대.

어느새 자리를 비웠던 누나까지 다가와서 말을 보탰다. 나는 해당이 안 된다고 말하려다가, 대신 글쓰는 일 말고도 여러 돈벌이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 얘기를 소설로 쓴다고 재미가 있으려나. 사람 사는 거 다 똑같지.

어머니는 그렇게 말하곤 방바닥에 깔린 카펫을 바라봤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어느새 불이 붙은 벽난로에서 따듯한 온기가 전해졌다. 아버지는 벽난로 앞에 그대로 앉았고, 누나와 어머니는 나란히 서로의 몸에 기댄 채 소파에 앉아 타오르는 장작더미를 바라봤다. 나는 그제야 오랫동안 간직했던 말을, 이제는 꺼내야겠다고 생각했다.

 

19

 

수업이 끝나고 가방을 챙겨 교실을 나가려는데 엽이 불쑥 팔을 잡았다. 무슨 일이냐고 묻자 엽이 말했다.

오늘 학원 안 가려고.

수능일까지는 한 달 정도 남아 있었다. 엽은 지난번에 내가 한 말이 신경 쓰였는지 등교해서부터 하교할 때까지 학교에 있는 동안 내내 곁에 붙어 있었다. 학원이 끝나면 다른 곳으로 가는 법 없이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괜찮다고 말했지만 엽은 그럴 때마다 내 볼을 툭툭 쳤다. 수능일이 지나고 졸업식마저 끝나면 자연스레 멀어질 텐데, 그런 생각을 들킬까봐 최대한 티를 내지 않았다.

어디 갈 거야?

교문을 나서며 엽이 물었다. 나는 그간 하루도 빠짐없이 당구를 배우고 있던 중이라 엽에게도 당구장에 가자고 말했다. 엽은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지만 달리 갈 곳도 없어 함께 당구장으로 향했다.

성인이 된 후에 엽을 떠올리면 항상 그날을 먼저 생각하곤 했다. 그때 그곳에 가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예전처럼 시내에 가서 하릴없이 걷거나, 지하상가에 들러 잡다한 물건들을 구경했다면. 오락실에서 격투기 게임을 하면서 서로를 놀리거나, 아니면 그냥 그대로 집으로 돌아갔다면. 수많은 상황들을 가정하는 과정에서 느낀 것은 무력감과 한탄이 전부였지만, 그래도 나는 여러 가능성을 생각했다.

당구장에 들어서자 사장님이 보이지 않았다. 평소보다 손님이 적어 빈 당구대가 많았고 엽은 익숙하게 교복 상의를 벗어 옷걸이에 걸었다. 내가 의아하게 바라보자

나 여기 자주 왔어. 저기 쟤네랑.

엽은 턱짓으로 구석을 가리키며 말했다. 엽이 가리킨 곳에는 등을 보인 채 게임에 열중하고 있는 우리 학교 학생들이 보였다. 어딘가 낯이 익은 것 같았다. 엽이 큐대를 고르는 사이 한 명이 뒤를 돌아봤다. 오래전 점심시간에 햄버거를 사기 위해 학교 밖으로 나갔다가 싸운, 엽과 중학교를 함께 다녔다던 그애였다. 그는 나를 보곤 다른 친구에게 귓속말로 뭔가를 전했다. 나는 손바닥이 축축해지는 것을 느꼈다. 당구공끼리 강하게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오랜만에 왔더니 잘 안 되네.

엽은 그들이 여기 있다는 사실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큐대에 초크를 묻히며 말했다. 그들이 서서히 우리를 향해 걸어왔다. 셋은 모두 그사이에 키가 큰 것 같았다. 그들을 나를 지나쳐 곧장 엽에게 다가갔다.

너희는 아직도 여기서 노냐.

그럼 넌. 어떻게 아직도 저딴 새끼랑 어울리냐.

엽은 큐대를 내려놓고 헛웃음을 지었다.

대학 간다고 학원 다닌다며.

뭔 대학이야, 안 어울리게.

많이 물러졌네.

그들은 한마디씩 말을 꺼내며 엽의 반응을 기다렸다. 엽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러곤 당구장 내부를 스윽 살피다가, 그들의 뺨을 차례로 때렸다. 모두 맞고만 있었다. 그중 나를 욕했던 애는 한 대를 더 맞았다. 엽은 빨개진 손바닥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이죽거릴 줄도 알고.

그때 문을 열고 사장님과 몇몇 사람들이 들어왔다.

니들이 쟤 때린 거 내가 모르는 줄 알지.

사장님이 외투를 벗으며 눈을 가늘게 뜨고 엽을 바라봤다.

요새 통 안 보이더니 오랜만에 왔네.

엽은 몸을 숙여 인사했다. 그들은 서둘러 원래 자리로 돌아간 뒤 짐을 챙겨 당구장을 빠져나갔다.

 

집으로 가는 동안 엽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 역시 조용히 집까지 걸었다. 대문 앞에 집주인 할머니가 앉아 있었다.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감을 손질하던 할머니는 이 시간에 둘이 함께 오는 건 처음 본다며 알은체를 했다.

저게 감나무야.

이층 현관문에 드리운 나뭇가지를 가리키며 할머니가 말했다. 감이 주황빛으로 익어 땅으로 떨어지는 동안에도 나는 그것이 감나무라는 사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저런 것도 좀 보면서 살아라.

엽은 할머니 옆에 주저앉아 일을 거들었다. 칼을 들어 감꼭지를 따고 껍질을 벗겼다. 할머니는 그런 엽을 말리지도 말을 보태지도 않았다. 엽은 익숙하게 감을 손질했다. 나는 엽이 손질한 감을 입으로 가져갔다. 떫은맛이 났다. 할머니는 저녁 안 먹었으면 반찬을 챙겨주겠다고 했지만 엽은 사양했다.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이층으로 향했다.

한 봉지만 남았어.

엽이 라면 박스를 뒤적이며 말했다. 다시 신발을 신고 슈퍼로 가려는 엽을 불러세운 뒤 냄비에 물을 올렸다.

나눠 먹자.

우리는 교과서 위에 냄비를 올려두고 라면을 나눠 먹었다. 감을 먹어서인지 혹은 다른 이유에서인지 예전처럼 맛있지 않았다.

 

다음날, 평소보다 일찍 집에서 나왔다. 간밤에 잠을 뒤척였다. 엽은 더 자고 싶다며 이불로 얼굴을 가렸다. 날이 많이 추워져서 집을 나서기 전 엽이 자주 입는 점퍼를 꺼내 입었다. 나 이거 입는다, 말하자 엽은 이불 밖으로 손가락을 내밀어 동그라미를 그렸다.

교실에는 나 혼자뿐이었다. 난로를 담당하는 주번도 등교하지 않은 이른 시간이라 실내에 한기가 돌았다. 나는 의자에 멀뚱히 앉아 있다 후드를 뒤집어쓰고 그대로 엎드려 잠을 청했다. 다리가 오들오들 떨렸다. 수업 시작 전에 엽이 깨워주겠지,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내 등을 툭 치며 깨운 건 엽이 아니었다. 잠결에 소란스럽고 웅성거리는 소리를 들었는데 그저 반 친구들이 떠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뾰족한 뭔가가 등에 닿았다. 소름이 돋았다. 누군가 장난을 치는 건가, 엽의 손바닥인가 생각하면서 후드를 벗었다.

움직이지 마.

앞자리에 앉아 있어야 할 친구들이 모두 칠판으로 가 서 있었다. 그들뿐만 아니라 다른 친구들도. 누군가는 손바닥으로 입을 막고 있거나 사색이 된 얼굴로 뭔가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내 뒤에서 분명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직감했다. 움직이지 말라고 말한 그 떨리는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하고 싶었다. 몸을 뒤로 조금 움직이자 점퍼를 뚫는 소리와 함께 등에 따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개새끼야, 가만히 있으라고!

누가 좀 말려봐, 저거 진짜 같은데, 이런 말들이 들려왔다.

너 죽일 거야.

턱에서 딱딱 소리가 났다. 내 몸이 떨리는 건지, 등에 닿은 게 떨리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때 교실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왔다. 나는 고개는 고정한 채 곁눈질로 문을 바라봤다. 엽이었다. 엽은 나를 보다가 내 뒤에 있는 사람에게 시선을 옮겼다. 대수롭지 않은 눈빛으로, 놀라는 기색도 없이 교실에 들어와 문을 닫았다.

나 여기 있는데.

엽의 옷을 입고 있어서 나를 그로 착각했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게 됐다. 엽은 다른 책상에 가방을 내려놓고 천천히 다가왔다. 등에 닿아 있던 무언가가 떨어졌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뒤를 돌아봤다. 당구장에서 엽에게 뺨을 맞은 애가 칼을 들고 서 있었다.

그거 줘.

엽은 내 앞을 지나쳤다. 내 등에 잠시 손을 대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얼굴이 빨개진 상태로 엽을 향해 칼을 들이밀고 있었다.

달라고.

엽이 말하자 그는 눈을 내리깔았지만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곧 선생님 오잖아. 얼른 줘.

그는 체념한 듯 엽에게 칼을 건넸다. 엽은 교실 뒤편 사물함에 칼을 넣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왔고 다들 서서 뭘 하는 중이냐 물었다. 엽은 차분히 주위를 둘러봤다. 반 친구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입을 다물고 각자의 자리에 앉았다.

점심시간이 시작될 무렵 엽은 그에게 다가갔다. 자리에 앉아 멍하니 앞을 바라보던 그는 엽이 다가오자 이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안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아침의 소동을 겨우 잊고 있던 반 친구들 모두 하던 일을 멈추고 엽과 그를 바라봤다. 엽은 그의 뺨을 때렸다. 뺨을 때리는 횟수가 늘어갈수록 교실이 조용해졌다. 그러다 교실 문이 열리고, 아마도 엽의 다른 친구들로 보이는 애들이 들어와 그의 뒷덜미를 잡고 일으켜세웠다. 그들은 그렇게 교실 밖으로 사라졌다.

며칠 뒤 엽은 정학이 결정되어 학교에 나오지 못했다.

 

20

 

테카포 호수로 향하는 버스가 정류장에 도착했다. 이른 아침이라 잠이 덜 깨 저절로 하품이 나왔다. 짙은 안개가 마을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호수로 향하는 도정의 풍경이 아름답다는 후기를 봤는데 아무래도 기대를 접어야 할 것 같았다. 버스에 타려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정류장으로 모였고 얼마 뒤 버스 문이 열렸다. 버스 기사는 종이를 보며 한 명씩 이름을 확인했다. 아시아계 승객들이 많았는데 내 앞에 선 모녀로 보이는 일행을 공항에서도 본 것 같았다. 마침 앞뒤로 좌석이 배정되어 눈인사를 나눴다. 버스가 출발하자 갑작스럽게 허기가 일어 배낭을 열었다. 엽의 어머니는 버스에서 먹으라며 샌드위치와 사과를 챙겨줬다. 차창 밖을 보며 그것들을 먹는 동안 안개는 더욱 짙어졌다. 어제 봤던 풍경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있었다.

엽의 아버지는 언제 또 볼진 모르겠지만 건강히 지내라고, 다른 무엇보다 건강을 먼저 챙기라고 말했다. 글을 쓰느라 배를 곯는 건 아닌지 걱정이라며 등을 두드렸다. 한국에 올 일은 없냐고 누나에게 묻자, 이제는 그곳이 너무 낯설어 여기보다 더 외국 같다고 말했다. 그들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오랜 시간 무언가를 단련한 것 같았다. 누나는 지난밤 내게 말했다.

우리는 달아난 거야.

무엇으로부터 왜 달아났는지, 나는 묻지 않았다. 다만 누나가 꺼낸 그 한마디가 긴 세월 잊히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나는 내게 들려준 얘기로 소설을 완성하면 그때 다시 연락하겠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부러 나를 보지 않으려는 듯 거실을 정리하고 있었다. 지난밤에는 내가 아닌 엽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잊고 지낸 기억이 육박하는 사람의 눈에는, 형언할 수 없는 무언가가 서린 빛이 있었다. 장작불이 일렁이며 얼굴에 음영을 드리울수록 빛은 선명해졌다.

버스가 마을을 벗어나자 거짓말처럼 안개가 걷혔다. 평원에서 풀을 뜯는 양떼가 차창 밖으로 스쳐갔다. 배낭에서 녹음기를 꺼내 이어폰을 연결했다. 우리가 나눈 모든 대화가 선명하게 들렸다. 한국에 돌아가자마자 녹취를 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시 창밖을 바라보는데, 곧 비행기가 이륙할 시간이 됐다며 준이 문자를 보내왔다.

준은 나를 놀라게 할 심산으로 몰래 항공권을 끊었다고 말했다. 엽의 가족과 만나는 일에 방해가 될까봐 미리 말하지 않았다고도 덧붙였다. 전날 가족과 대화를 마친 뒤 자려고 누웠다가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그런 일로 장난을 칠 성격이 아닌 걸 알기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다시 내게 마음이 생긴 걸까. 그동안 나 혼자만 오해해왔던 걸까.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자 걱정부터 들었다. 준은 해외여행을 좋아하지 않았다. 비행기 타는 일을 무서워하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몇 차례 간 적이 있는데, 그럴 때면 최대한 준이 피로감을 덜 느끼게끔 계획을 짰다. 혼자 공항에 갈 수 있을지, 환승은 할 수 있을지, 도착 후에 길을 잃는 건 아닐지 묻자 준은 한마디만 보냈다. 테카포에서 만나자. 나는 더이상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준은 심경의 변화가 생기면 평소 하지 않던 행동을 해왔다. 잘 쓰던 휴대전화를 최신 기종으로 바꾼다거나, 주민센터에서 꽃꽂이를 배운다거나, 주식 투자에 관한 책을 사서 읽는 행동 같은 걸 했다. 하지만 이내 금방 시들해졌다. 나는 왠지 준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준은 이별을 위해 이곳에 오는 것이다. 이번엔 나의 예상이 빗나가길 바라지 않았다. 테카포로 향하는 동안 버스에서 내리는 승객들을 바라보며 그들은 어디에서 왔고 어떤 이야기를 가졌을지 상상했다. 도착까지 네 시간 가까이 걸렸지만 한 번도 잠들지 않았다.

기념품을 파는 건물 앞에 도착했을 때 갑작스럽게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버스에서 내려 배낭에 레인 커버를 씌웠다. 곧장 숙소로 향하지 않고 사람들을 따라 걸었다. 비 내리는 호수는 사진으로 본 것과는 다르게 회색빛에 가까웠다. 언젠가 준은 뉴질랜드에서 엽의 가족만 만나고 돌아올 건지 물었다. 나는 남섬에서 경관이 빼어난 명소 몇 군데를 보여주며 한 곳 정도는 갈 것 같다고 말했다. 여기 좋겠다. 준은 사진 한 장을 골랐고 그곳이 테카포였다. 준은 에메랄드빛으로 물든 호수보다 호숫가를 따라 핀 라벤더를 가리키며 한참 동안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사진 많이 찍어올게, 라고 말하자 고개를 끄덕였다. 준이 이곳에 오고 있다니 여전히 믿기 어려웠다. 함께 갈 만한 식당과 카페를 찾아 마을을 돌아다녔다. 마을은 엽의 부모님이 있던 퀸스타운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았는데 그래서인지 오가는 사람들과 자동차도 적었다. 호수 근처 공원에 캠핑카가 듬성듬성 세워진 게 전부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설산을 넘어 비구름이 몰려왔고 숙소 열쇠를 받기 위해 인포메이션 데스크가 있는 건물을 찾았다.

데스크에 앉아 있던 담당자가 열쇠와 마을 지도를 건네줬다. 손으로 직접 그린 듯한 지도 한편에 별표로 숙소가 표시되어 있었다. 내일 한 명이 더 올 거라고 말하자 추가 금액을 안내해주었고 그 자리에서 결제했다. 오르막길을 오르는 동안 비가 그치면서 흙냄새가 났다. 언덕에 자리한 숙소의 대문을 열고 뒤로 돌자 호수가 내려다보였다. 호수는 햇빛을 받아 서서히 에메랄드빛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다음주에 마지막회가 게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