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리라 하였고 당신은 거위라 하였습니다
모양은 같은데 짝이 안 맞는 양말처럼
당신은 엇비슷하게 걸어갑니다
나는 공복이라 하였고 당신은 기근이라 하였습니다
당신은 성북동이라 하였고 나는 종암동이라 하였습니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때 일치합니다
노인들이 바둑 두는 호숫가에 다시 와 생각합니다
흰 머리카락을 고르듯 무심히 당신을 뽑아냅니다
은행알을 으깨며 유모차가 지나갑니다
눈물 없이 우는 기분입니다
괜찮습니다, 아직은 괜찮아요 은행잎도 초록인걸요
떼로 몰려드는 잉어의 벌린 입을 보세요
씨 없는 가시덩굴이 기어이 벽을 타고 오릅니다
― 「사랑의 순서」
호시노 상의 다섯번째 편지를 받고, 이번에는 조금 늦게 펜을 들었습니다. 제게도 마음을 가라앉힐 시간이 필요했어요. 머릿속이 동굴처럼 어두워졌고, 그 안에서 목소리가 여러 방향으로 울려왔습니다. 우는 것 같기도 하고, 웃는 것 같기도 한 목소리였습니다.
누군가 플래시를 터뜨렸고, 눈이 부셔 얼굴을 조금 찡그린 채 얼떨결에 동굴 밖으로 나온 기분입니다. 호시노상은 귤색 날개를 달고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쓴 채 동굴 밖으로 나갔군요. 변장이라기엔 오히려 ‘나 여기 있어요!’ 하고 알리는 복장이랄까요.
저도 그 뒤를 따라나서며, 요괴 탈이라도 써야 할까 상상하며 조금 웃었습니다. 동굴 밖으로 나와 저는 잠시 숨을 자리를 찾았고, 호시노 상은 나아갈 출구를 찾았군요.
집으로 배송된 가와데쇼보신사의 『문예』를 넘기면서도 이상하게 실감이 나지 않았습니다. 산겐자야의 서점 트와일라이라잇에서 제가 건넨 제안은 진담이었지만, 얼마간 충동적이기도 했어요. 그런데 이 왕복편지가 가능해진 배경에 오래전부터 이와모토 상, 무라다 상과 나눈 잡담이 있었다니. 호시노 상의 잡담은 말 그대로 현실을 움직이는군요.
게다가 4월에 가와데쇼보신사의 편집자분들까지 대동한 연시 모임을 앞두고 있으니, 벌써부터 봄이 기다려집니다. 그리고 한 해를 넘겨 세뱃돈이 된 김현 시인의 편지까지(한국에도 오토시다마와 같은 문화가 있어요). 기쁨이 폭죽처럼 터지는 소감을 저도 즐거이 따라 읽었습니다. 잡담에서 시작된 물방울 하나가 이렇게 멀리까지 동심원을 그리며 번져갑니다.
저는 이 편지의 중심에 질문 하나를 남겨두고 시작하고 싶었습니다. 호시노 상은 시가 ‘구원’이 된다고 믿나요? 저는 이 단어를 쓰고 싶지 않아, 손끝에서 만지작거립니다. 구원이라는 말이 너무 빨리 의미를 완성해버릴까봐요.
당신은 “이유를 붙여 정리하기에 앞서 감정이나 감각이 말이 되어도 된다”라고 제가 가르쳐주었다고 쓰셨지요. 하지만 호시노 상도 썼듯, 이미 당신의 소설 곳곳에 시가 박혀 있었던 것이겠지요. 그러니 구원은 결론이 아니라, 이미 있었던 통로가 다시 열리는 감각에 가깝지 않을까 싶습니다.
새해 첫날, 저는 인왕산 정상에 올랐어요. 정상까지는 일 년에 한 번 정도만 오르는데, 올해로 삼 년째입니다. 산을 오르며 들숨과 날숨처럼 오갔던 생각들을 여기 적어봅니다.
얼마 전 집안에 경사가 있었어요. 큰조카가 출산했거든요. 한국에서는 아기의 백일에 백설기를 만들어 나눠 먹습니다. ‘하얗고 깨끗하게, 탈 없이 건강하게 자라라’는 의미에서요. 멥쌀가루와 소금, 설탕으로 간을 해서 쪄낸 소박한 떡이지요. 저는 그 달착지근하고 쫄깃한 떡을 조금씩 뜯어먹으며 새해를 맞이했습니다. 큰언니와 나이 차이가 크게 나서, 또래보다 비교적 일찍 ‘이모할머니’라는 호칭도 얻게 되었습니다.
백일이 지난 아기는 이제 목을 가눕니다. 씨름 선수처럼 몸을 한 판 뒤집으려고 얼굴이 벌게지도록 힘을 주기도 하고요. 송편보다도 작은 주먹을 얼마나 꼭 쥐는지. 분홍빛이 도는 투명한 손톱. 순하게 말려 올라간 속눈썹 한 올까지 어여쁩니다. 요즘은 팔에도 힘이 생겨, 누운 채로 손을 들어 자기 손바닥을 가만 들여다보곤 합니다.
언젠가 어머니도 비슷한 동작을 한 적 있습니다. 자기 손을 처음 보는 것처럼 낯설게 바라보았습니다. 몸통에서 뿌리처럼 뻗어나온 열 개의 손가락. 그때 저는 호시노 상의 문장 ‘세계의 배꼽’을 떠올렸습니다. 말을 잃어가는 몸과, 말을 배우는 몸. 제 안에서는 이 두 장면이 하나의 화면에서 겹쳐집니다. 그것은 시간의 순서가 아니라, 경계가 희미해지는 느낌입니다.
하늘다리
인왕산 정상까지 가려면 무악재에서 하늘다리를 건넙니다. 하늘다리는 안산과 인왕산을 이어주는 다리이지요. 다리 아래로는 도로가 있고요. 하늘도 땅도 아닌 중간의 높이.
불교에서 ‘중음’은 사람이 죽은 뒤 다음 생으로 가기까지의 시간이라고 하지요. 저는 그 ‘사이’가 꼭 사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합니다. 살아 있는 몸도 가끔은 하늘로 향하는 부력과 땅으로 끌어당기는 중력 사이에서 잠깐 떠 있는 기분을 느낄 때가 있으니까요. 요즘 호시노 상은 어느 시간 속에 있나요.
사별의 시간은 사람을 그 중간에 멈춰 세우기도 합니다. 도무지 현실에 두 발이 닿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 저는 가끔 숨어버립니다.
겨울 산은 숨기에 좋은 곳이더군요. 제 안에서 메아리가 윙윙 울려옵니다. 그 소리가 저를 삼키지 못하도록 자신을 작게 접습니다. 손톱보다도 작게요. 이런 마음은 읽히고 싶다가도 들키고 싶지 않습니다. 이 모순이 저를 살게 하고, 때때로 외롭게 만든다는 걸 압니다.
그것은 아마도 호시노 상이 사별을 경험하고 쓴,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 없는 ‘마음속에만 존재하는 시’와 닮았는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작은 책입니다. 주르륵 펼치면 아코디언처럼 길게 늘어집니다.
저는 다만, 그 시가 호시노 상이 스스로를 조금이라도 덜 파괴하도록 보호했음을, 함께 믿어도 될까요. 당신이 쓰지 않았기에 더 단단해진 침묵이 그 자리를 채웠을 테니까요.
국사당
해가 조금 기울 무렵, 국사당 쪽으로 향했습니다. 드물게 무속신앙의 흔적이 남은 곳이지요. 화강암 위에서 부채를 펼치고 기도하는 무속인을 보았습니다. 무엇이 그의 기도를 뜨겁게 할까요. 그에게도 눈에 보이지 않는 것, 믿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무엇이 있겠지요.
제가 보이지 않는 시를 믿듯이, 무속인이 믿는 신도 보이지 않음의 한 형식일까요. 형식만 다를 뿐, 살기 위해 손을 모으는 마음은 같을 수도 있겠지요.
가부좌를 하고 앉은 무속인의 귀가 발갛게 얼었습니다. 곁에는 사과와 생쌀, 초가 있었습니다. 저는 방해가 되지 않게 슬그머니 곁길로 빠져나왔습니다. 그 옆을 지나갈 때 초가 타는 냄새가 은은하게 났습니다.
일본만큼 귀엽고 무섭고 다채로운 신이 많은 나라도 드문 것 같다고, 저는 예전에 생각했어요. 그러니까 일본은 신들의 나라. 구슬을 문 여우, 흰토끼, 까마귀 할 것 없이. 마치 전래동화 속 상징이 세상 밖으로 걸어나온 것처럼 보여서 신묘하고 재미있게 느껴졌습니다.
어쩌면 신들의 나라라는 말은, 신이 많다는 뜻이라기보다 ‘보이지 않는 것에 붙일 수 있는 이름이 많다’는 뜻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불현듯 다른 기억이 끼어듭니다. 가구라자카 레지던시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어요. 소나기가 퍼붓는 밤이었지요. 밤중에 생수를 사러 언덕을 내려가다가 절의 담장 너머로 호랑이 석상을 보았습니다. 번개가 칠 때마다 빗물에 젖은 등이 번들거리는 호랑이는 기이해 보였습니다. 다음날, 같은 곳을 지나며 다시 마주쳤어요. 호랑이의 두툼한 앞발, 올라간 입꼬리가 익살맞게 보이더군요.
저는 호랑이를 본 게 아니라, 하룻밤 사이에 달라진 감각을 본 것이지요. 인식과 감각은 요술 거울 같습니다. 감각은 사실을 바꾸지 않지만, 사실을 읽는 방향을 바꿉니다. 그래서 오해받을 자유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더라도, 그 어긋남이 누군가에게는 남겨진 몫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도 잊지 않으려고 합니다.
정상으로 가는 로프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숨이 찹니다. 난간과 로프를 잡고 바위틈을 올라갑니다. 자꾸 헛발을 딛는 세상에서, 손이 무언가를 잡고 있다는 감각. 손에 힘을 줄수록, 놓치면 떨어진다는 생각도 또렷해집니다.
호시노 상은 “사람을 싫어하지만”이라고 쓴 뒤, 좋아하는 이들의 이름을 불렀지요. 그것이 고백이라기보다 디딤돌의 목록처럼 보였습니다. 문장이 미끄러질 때마다 한 사람의 이름을 불러, 발을 디디는 자리를 마련하는 방식. 동시에 「사랑의 순서」의 첫 행도 떠올랐습니다. 오리와 거위, 공복과 기근, 성북동과 종암동. 불일치가 보폭을 맞추며 나란히 놓이는 방식에 대해서도요.
그리고 저 역시 좋아합니다. 어긋나면서도 이어지는 이 편지의 리듬을. 제 문장을 다시 태어나게 하는 시미즈 선생을, 무라다 상이 정성스레 써서 보낸 동글동글한 한글을. “그림자를 읽혔다면 존재를 압류당한 것과 마찬가지”라는 호시노 상의 서늘한 문장을, “내장 안쪽 주름의 그림자”까지 비추는 지독한 고독을요.
하지만 저는 언어를 완전히 믿지 못합니다. 정확히는 시시때때로 달라지는 제 감각을 믿지 못합니다. 그래서 반걸음의 거리를 남겨둡니다. 그 거리는 단도처럼 날이 서 있습니다. 시가 늘 새것을, 밟지 않은 것을, 세상을 다 보고도 끝까지 깨끗한 것을 요구한다면 피 한 방울 없이도 깊게 베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겁이 나면서도, 그 칼날이 없으면 둔해질까봐 더 두렵습니다.
시는 볼에 닿는 눈송이 같습니다. 어떤 때는 회색 재 같고, 어떤 때는 솜처럼 포근합니다. 환락과 축제가 한몸인 세상, 더러운 웅덩이에 뜬 기름 막처럼 신묘한 빛. 그 안에서 금방 사라질 무지개를 봅니다.
버려진 초소
정상에서 내려와 성곽 계단을 따라 창의문 방향으로 내려가다가, 잠시 샛길로 빠졌습니다. 일부러 찾지 않는다면 잘 모를 소나무숲의 안쪽으로 들어갑니다. 거기 초소가 남아 있습니다. 철제 난간은 녹슬어 붉은 가루가 떨어집니다. 바로 앞에 암벽을 수직으로 깎아 쳐낸 듯 가파른 벼랑이 있습니다. 반걸음만 잘못 디뎌도 생과 사가 갈리는 경계, 시원한 해방감과 공포가 같은 속도로 달려옵니다.
편지에 다 쓸 수 없지만, 삼 년 전 저는 이곳을 처음 찾았습니다. 사방에서 볼이 따가울 만큼 매서운 바람이 몰아칩니다. 바람이 저를 벗겨내는 것 같습니다. 저 아래 무수한 십자가와 만(卍)자. 돌아보면 이곳은 숨기 좋은 곳이 아닙니다. 숨을 곳이 사라진 뒤에야 남는 자리 같습니다.

바람을 온몸으로 받습니다. 이 아찔한 높이에서 생각이 차갑게 식습니다. 이 삶의 모순과 믿음. 바람 앞에서 휘는 촛불. 호시노 상의 시가 바람에 날아갑니다. 땀이 식습니다. 입안이 마릅니다.
한 톨의
히말라야 소금이 입안에서 녹듯이
천천히 자신을 느껴
깊이 아파본 신의 허파가
하얗게 말라가는
산 위에서
― 「백탁」
얼얼하도록 맑고 차가운 공기. 폐가 새파랗게 물들 것 같습니다. 주머니 속에는 작게 접어둔 봉투가 있습니다. 그 안에는 스무 해를 함께 산 반려묘의 분골이 들어 있습니다. 아직 뿌려주지 못했습니다.
2026년 1월 28일(日)
서울에서 신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