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러가는 오렌지
호시노 상에게
하얗게 부풀어오르던 목련이 지고 있습니다.
혜화동 골목길을 함께 걸을 때 호시노 상이 좋아한다고 말했던 그 목련.
상처를 감았던 붕대를 풀어낸 듯
목련은 툭, 하고 힘을 풉니다.
문장의 끝까지 달려간 뒤의 얼굴이 이럴까요.
그 어떤 회한도 기쁨도
내려놓은 서늘하고 깨끗한 비정함.
이번엔 둘이서 대화하는 시간을 가졌지요.
호시노 상은 꽃가루 알레르기 때문에 힘들어 보였고.
코가 조금 빨갰습니다.
마치 식물의 습격을 받은 외계인을 보는 듯했습니다.
한국어의 태아인 호시노 상과
세 살쯤 된 아이의 일본어를 구사하는 저의 대화는
즐겁고도 이상했습니다.
번역기를 거쳐도 닿지 않는 빈칸이 있었고,
그래서 저는 좀더 동물적인 감각에 기대었습니다.
호시노 상이 웃을 때
역삼각형의 양쪽 끝을 잡아당긴 듯 올라가는 입매.
진중해질 때 낮아지는 목소리.
저는 그것들을 붙잡아두었습니다.
그날의 대화는 완전히 이해되지 않았지만,
그 빈칸 안에도 무언가가 들어왔다가 지나갔습니다.
저는 지금껏 그 어긋남을 ‘오해될 자유’라고 불러왔습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처음으로 그 생각에 균열이 생겼습니다.
빈칸은 누군가의 숨이 들어오는 자리이기도 하지만,
그 숨이 너무 오래 머물면
그것은 공기가 아니라, 고립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설명을 덜어낼수록 서로 가까워진다고 생각했지만
한 사람을 외롭게 세워두는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그 빈칸 안에서도
정말 함께 남아 있을 수 있을까요.
호시노 상은 누군가를 만나면
그가 누구든 고르게 애정어린 마음으로,
한 가지 질문을 던지는 것 같습니다.
그날 호시노 상이 제게 번역기를 돌려 보여준 단어는 ‘검열’이었습니다.
‘켄에츠(けんえつ).’
그 말을 입안에서 몇 번 굴려보았습니다.
우리가 만났던 순간에
남는 말이 있고
사라지는 말이 있고,
그 사이에만 잠깐 머무는 것이 있었습니다.
호시노 상, 지금 제 문장은 흔들리고 있습니다.
던져진 오렌지
마사 상에게
방바닥에 편지를 내려놓고
무릎을 팔로 감싼 채 마사 상의 편지를 다시 읽었습니다.
편지를 읽고 나서 잠시 말을 잃었습니다.
마사 상이 시레토코에서 보았다는 정령을
저는 오렌지 한 알의 형태로 그려봅니다.
눈을 감으면 색이 사라집니다.
다시 떠올리면 색이 돌아옵니다.
없는 곳에서 떠 있는 것처럼.
마사 상,
당신은 정령에게서 무엇을 보았나요.
보지 않고도 남아 있는 것이 있습니까.
저는 시를 쓸 때 자주 그 자리에서 서성였습니다.
열네 살의 경험을 ‘부름’이라 썼지만
그것이 특별한 체험이라 말하기는 망설여집니다.
스스로를 신화화할 수도 있고,
누군가를 경계 밖으로 밀어낼 수도 있으니까요.
그럼에도 어떤 감각은 분명히 있었습니다.
‘금방 내 몸에 들어왔다 나간 게 뭐지?’
의미를 붙이기 전인데도 이미 와 있고,
나중에야 그 둘레를 더듬게 되는 감각.
다시 오렌지를 떠올립니다.
가파른 계단 끝에서
바구니 속의 오렌지를 우르르 쏟아버리는 상상을 합니다.
오렌지들이 부딪히고, 어긋나고, 튕겨나갑니다.
제 문장도 그렇게 흩어져갑니다.
눈을 뜹니다.
모든 것이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그 구불구불한 주황빛 잔상은
엉킨 구리 선처럼 머릿속에 남아 있습니다.
마사 상은 정령을 목격한 뒤
“나뭇잎의 틈새에서조차 정령의 그림자를 느끼는 일이 있습니다”라고 썼지요.
이 문장이 제 경험과 포개져 잠시 숨을 멈췄습니다.
열네 살, 부흥회가 끝난 뒤 교회의 뜰에서 보았던 감나무.
그 감나무를 본 순간 저는 신의 은혜를 받았다고 느꼈습니다.
빛의 세례를 뒤집어쓴 듯이요.
마치 누에고치가 꾸물거리듯이
잎사귀 한 장 한 장마다 감나무의 생령이 깃들어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런 경험은
언어로는 온전히 옮겨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른 장면 하나를 떠올립니다.
오래전 어머니가 해주었던 이야기입니다.
어머니는 이웃집 할머니가 꿈에 찾아왔다고 했습니다.
할머니가 당연하다는 듯
대문 밖에 고무신을 벗어두고 집 밖으로 나갔다고 합니다.
늘 한 손에 부채를 들고 다니던 할머니였습니다.
그 꿈을 꾸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밖에서 따-악! 하고 크게 울리는 소리가 났다고 합니다.
이미 지나간 뒤에야 들려오는 소리.
어머니는 한동안 크게 슬퍼하셨습니다.
그 일의 앞뒤를 저는 알지 못합니다.
저는 그 소리를 직접 듣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 소리는 한 번 울리고 끝난 것이 아니라,
제 안에서 다른 방식으로 울리고 있습니다.
가끔 어머니는 싱숭생숭한 꿈을 꾸면
조심하라고 미리 당부하곤 하셨습니다.
설명으로 붙잡히지 않고
미신이라고 지나치기에는 이미 가까이 와 있는 감각.
한 사람과 깊은 정을 나누고 살아가다보면
그 사람의 말이 아니라
서로를 둘러싼 영적인 흐름 같은 것이
냄새처럼 스며드는 순간이 있는 걸까요.
마사 상이 “시대도 국경도 종횡무진 가르며 달려나가,
내 앞에 찾아온 바람”이라고 표현했듯이
제 앞에 굴러오는 오렌지.
한 번 스치고 지나간 뒤에야
그 남은 감각을 더듬어,
저는 한 사람의 윤곽을 언어로 그려내곤 합니다.
저는 종종 사람을 잘못 읽습니다.
사토미 상에게
이름 부르면 놀란 사람처럼 돌아보던
사토미 상의 커다란 눈망울이 떠오릅니다.
교류회 때는 생각보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지요.
그런데 번역가와 시인, 챗지피티의 조합으로 번역했다니.
이런 시도는 처음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아직 낯섭니다.
게다가 시를 왜 쓰느냐고 사토미 상이 물었을 때,
제가 겨우 꺼낸 말이 “일하기 싫어서”라니.
말은 먼저 나가고,
부끄러움은 반걸음 뒤에서 따라옵니다.
“씀으로써 잃어버린 존재를 더듬으며 다시 한번 만날 수는 없을까.”
고토바의 이야기를 쓴 대목에서 명치가 저릿했습니다.
나중에는 향낭에 코를 대고 향기를 맡는 강아지처럼
기분에 서서히 활기가 돌았습니다.
사토미 상,
당신도 그래서 시를 썼나요?
사라진 것을 되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라지는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고요.
고토바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하지만 사토미 상과 고토바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 흐르겠지요.
도쿄의 오래된 서점에서 서가를 정리하고 있을 사토미 상.
저는 상상하기를 멈추지 않습니다.
또다른 평행 세계에 사는 안드로이드 사토미 상.
‘슬리핑 코트’를 입고 유령처럼 날아다니는 사토미 상.
지구에서 단 한 명뿐이지만,
우주에 점처럼 흩뿌려진 수많은 사토미들.
조금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저는 인간에게 좀처럼 마음을 활짝 열지 못합니다.
시를 쓰며 살아가면서도
오히려 언어가 필요하지 않은
존재들 곁이 더 편안했습니다.
사람들과 많은 말을 하고 돌아오면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이 거세게 밀려옵니다.
누군가에게 감정적 무게를 주고 싶지 않고
가능하다면 가볍게 살다 떠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서간문을 쓰면서
이렇게나 많은 사람의 이름을 쓰게 되었으니,
어찌 된 일일까요?
튕겨나간 오렌지
다시 호시노 상에게
이달 초, 호시노 상과 함께했던 낭독회를 떠올립니다.
박성진 시인의 주도로 양양 간곡리 마을 주민들과 이뤄진 자리였지요.
‘활자 밖으로 나간 시’라는 기획이었습니다.
아흔네 살 박필순 할머니를 비롯해
네 살짜리 박차라 어린이까지 마을 사람들이 함께 모였습니다.
저는 세 명의 어린이가 낭독한 시에
답하는 시를 썼습니다.
그리고 시 속에 괄호를 남겨두었습니다.
나무의 움직임이어도 좋고,
동물의 소리여도 좋고,
그 무엇이 들어와도 괜찮았습니다.
낭독을 시작하려는데,
갑자기 박차라 어린이가 제 입에 과자를 넣어주었습니다.
그 순간,
오렌지 한 알이
활자 밖으로 튕겨나갔습니다.
저는 조금 당황했지만,
그 과자를 먹으며 시를 읽었습니다.
수선화가 피어 있던 간곡리 마을,
마을회관 현관에 놓여 있던 할머니들의 신발과 지팡이.
그 장면은 문장으로 다 옮겨지지 않았습니다.
꿈같은 여운에 잠겨 있을 때
일본으로 귀국한 호시노 상이 메시지를 보내주셨죠.
“꿈이 아니라 현실로 만들 수 있었던 일”이라고요.
그 문자를 보고 나서 호시노 상이 낭독했던 시,
「재」를 다시 읽었습니다.
하나의 알이
다시 다른 알을 낳고
“백 개의 알 속에서 다시 백 개씩 알이 불어나
눈에 보이지 않는 알의 입자가 드높은 산을 쌓아올리는” 광경.
이 한 장면이 우리를 높은 산까지 끌어올려
말이 말을 낳고,
서로를 조금씩 밀어내고,
다시 끌어당깁니다.
이 편지를 마무리할 즈음,
질문의 윤곽이 희미하게 보이는 것도 같습니다.
저는 오렌지를 던집니다.
어디로 떨어지는지
보려는 것이 아니라
떨어지는 리듬을 오래 보려고.
그런데도 저는 여전히
그 궤적을 끝까지 보지 못한 채
다음에 던질 오렌지를
먼저 쥐고 있습니다.
2026년 4월 20일(月)
서울에서 신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