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회

지구가 뒤집히고, 언어가 뒤집힌다

신미나씨, 나는 이 편지를 서울에서 쓰고 있습니다. 잠시 후면, 신미나씨를 만나 시 전문 서점 위트 앤 시니컬을 안내받기로 되어 있습니다.

도쿄에는 벚꽃이 만개한 모양인데, 서울도 벚꽃이 많이 피었네요. 어제는 선유도공원을 산책했는데, 새하얗게 타오르는 목련과 부드러운 개구리 빛깔로 잎을 틔우는 버드나무를 홀린 듯 바라보았습니다. 이 공원이 너무 좋아서 작년 여름에도 매일 산책을 했습니다.

처음 만난 것이 꼭 일 년 전, 김석희 개인전을 보기 위해 제가 서울을 방문했을 때였죠. 바로 얼마 전 같기도 하고, 오래전 같기도 하고 그렇네요.

이렇게 많은 말을 주고받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신미나씨가 말한 것처럼, 나 역시 언어의 바깥으로 나가고 싶다고 열심히 생각하면서도 말 풍년이라고 할 수도 있을 만큼 많은 말을 늘어놓고 있으니 우스운 일이죠. 옆에서 다른 우주인이 본다면 그럼 조용히 있으면 되는 거 아닌가?’ 하고 고개를 갸웃거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몇 번이고 몇 번이나 나는 언어의 바깥으로 나갈 수가 있었습니다. 특히 고양이 이야기를 쓰셨던 여섯번째 편지는 언어의 바깥에서 살고 있다는 감각을 농후하게 느끼게 했습니다.

동물과 깊이 관계를 맺으며 사는 친구들을 보면, 다른 사람은 끼어들 수 없을 것 같은 뭔가가 있음을 느낍니다. 그것은 그 사람과 그 동물이, 언어의 바깥 어딘가에서 서로 통하고 있기 때문이죠. 동물과 사람이 서로 통한다는 건 어떤 감각인지, 나는 신미나씨의 편지글 저편에서 전해져오는 것에 몸을 담그고 맛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상실 또한 언어 바깥에 있다는 것도.

 

배호는 이미 저 머나먼 우주의 한 점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우주는 그런 점들의 집합인 듯합니다. 저는 신이 구체적인 형상이 아니라 에너지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이마가 조금 환해집니다. 비유 이전의 어떤 상태.

 

우주는 그런 점들의 집합체. 그것은 비유가 아니라, 상태.

이 문장을 읽기 위해 왕복편지가 있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만큼, 이 말의 에너지에 구원받은 듯 피가 도는 기쁨을 느낍니다. 나는 점의 집합체인 우주를 내내 믿어왔는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세계라고 부르는 것은 어쩌면 이런 울음들이 모여 이루어지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그 세계를 인간 이외의 괴()’라고 불렀습니다.

 

신미나씨가 요괴인 것의 의미를, 또 새롭게 발견했습니다.

 

최근 한 달간 나는 멕시코, 일본, 한국으로 이동했고 눈이 핑핑 돌 만큼 많은 사람과 마음으로 소통했습니다. 스페인어, 일본어, 한국어, 영어가 날아다니며 뒤섞였습니다. 일제히 피는 노란색, 흰색, 엷은 분홍빛의 봄꽃 같았습니다.

멕시코에서는 나의 소설 오레오레가 스페인어로 번역되어 출간일에 맞춰 북토크를 했습니다. 일찍이 이 년간 체재했던 멕시코는 나에겐 제2의 고향이지만 이번엔 팔 년만의 방문이었기 때문에 나의 스페인어가 회복되기까지 일주일이 걸렸습니다. 하지만 스페인어가 회복된 순간, 내 안에 존재하는 멕시코에서 자란 내가 생생하게 되살아났습니다.

지난주에는 ‘DMZ세계문학페스타 2026’에 참가했습니다. 세계 각지의 작가들과 조우는 물론, 한국의 작가들과 독립서점 관계자 여러분과의 재회나 새로운 만남이 정말 즐거웠습니다. 영어로 이야기할 때면 스스로가 나 자신이 아닌 듯 소멸의 감각에 휩싸이게 되는데, 거의 알지 못하는 한국어로 한국인들과 이야기할 때면 어째서 나 자신이 받아들여지고 있구나, 하는 굉장한 기분이 들까요?

번역이라는 말의 ()’은 뒤집는다는 뜻입니다. 요술쟁이처럼, 혹은 제비가 급히 방향을 바꾸는 것처럼, 번역자는 언어를 생생하게 휙 뒤집어서 다른 모습으로 보여줍니다. 그러니 훌륭한 번역을 통해 상대방과의 이야기가 활기를 띠면, 호흡이 잘 맞는 춤을 춘 기분이 듭니다. 호흡을 맞추어 깔끔한 턴을 도는 것 같죠.

하지만 그것은 일정 정도의 댄스 실력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멕시코에서는 오레오레의 번역자 마티아스가, 나에게 시집을 선물해주었습니다. 페루의 루이스 페르난데스라는 조금 옛날 시인의 작품집이었습니다.

내가 느낀 마법 같은 감각이 전해지면 좋겠습니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그 시집을 읽어보았습니다. 아주 단순한 시어가, 아주 조금씩 늘어서 있는, 아주 여백이 많은 시였습니다. 단순한 단어인 만큼 나도 의미를 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머릿속에서 일본어로 바꾸어 보려니 잘 안 되는 것입니다. 일본어로는 시의 형태가 만들어지지 않는 거죠. 시의 축적이 아직 부족한 것이겠지요.

그럼에도 나의 마음은 시에 빨려들어갔습니다. ‘마법 같은 감각이 이런 것인가, 싶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심플한 언어로 다른 언어의 벽을 넘을 수 있는 시가 되는 것일까요?

시의 힘과 번역의 곤란함을 동시에 느끼며 일본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시도를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친구인 일본의 시인 마사 나카무라 씨와 다나카 사토미 씨가, 신미나씨와 친구들의 시를 번역하여 낭독한 것입니다. 한국어 초심자인 두 사람이, 현대 AI와 번역가 시미즈 치사코 씨의 힘을 빌려 번역한 것입니다.

자세한 것은 두 분이 보낸 편지에서 들어볼까요?

 

 

★★★

 

신미나씨가 일으킨 바람

마사 나카무라

 

 신미나씨와 호시노 씨의 왕복편지. 두 분의 내밀한 왕래를 창밖에서 몰래 엿보는 듯한 기분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어쩌다보니 자유로운 바람 같은 신미나씨의 언어에 날려 두 사람의 왕래라는 담을 넘었고, 정신을 차려보니 나도 사색의 초원으로 이끌려 그 정치한 풍경에 마음을 빼앗기고 한 편 한 편을 읽을 때마다 멍해지는 감각을 느꼈어요. 일상의 깊은 사색이라는 것은 마치 판타지소설처럼 읽는 이를 본 적도 없는 장소로 이끌곤 하는 법이죠.

산문과 시의 틈새를 떠도는 편지 속의 말. ‘시와 산문의 경계’ ‘편지와 문학의 경계라고 쓰인 투명한 벽을 거칠게 부수며 빠져나갑니다. 신미나씨가 일으킨 바람을 일본에서 느끼고 있습니다.

부름에 대한 이야기가 저에게는 강렬하게 울렸습니다. 이상한 이야기가 되겠지만, 나는 스물한 살 때 홋카이도의 시레토코(知床)에서 토템 폴 같은 무서운 얼굴을 한 거대한 정령을 목격한 일이 있습니다. 저는 그 기묘한 해후가 저에게 글 쓸 힘을 주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뭘 쓰려고 해도 흐물흐물 힘이 들어가지 않던 것이, 그후부터 심지 같은 것이 생겼고 지금도 그것에 의지하면서 글을 쓰고 있습니다. 호시노 씨에게 쓰신 첫번째 편지에서 부름이야기를 밝힌 것은, 그 경험이 작가 신미나씨의 힘의 원천에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를 믿는 것. 그것은 시라는 언어의 형태를 믿는 일로도 이어질 듯한 느낌이 듭니다. 시에는 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 빈 줄이 있죠. 하지만 비어 있는 행은 ()’가 아니라, 무수한 의미를 지니고 있지요. 그 공석에서 느끼는 바는 찾아오는 사람에 따라 다릅니다. 아무것도 없는 장소에서 뭔가를 읽어냅니다. 다시 시레토코를 방문한다고 해도 동굴 입구를 가득 막아서듯, 무릎을 세워 앉은 상태로 떨고 있던 정령을 다시 만날 일은 이제 없겠지요. 하지만 그날 이후 나는 나뭇잎의 틈새에서조차 정령의 그림자를 느끼는 일이 있습니다. 기록된 언어의 틈에 있는 행간을 읽는 것처럼. 나는 그때까지 시를 읽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아무것도 없는 장소에서 무엇을 느끼려고 하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고 하면서, 시를 읽는 힘을 단련해온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미나씨에게 부름이 찾아왔던 순간. 목사님이 머리에 손을 대자마자 의식을 잃고 쓰러졌을 때. 그 백지와 같은 장면에서 무수한 의미를 보았습니다.

이렇게 신미나라는 필자가 만드는 강력한 언어를 번역자의 힘을 빌려 동시대에 읽을 수 있어서 진심으로 행복합니다. ‘동시대가 아니라, 언젠가 신미나씨가 엮은 말을 한국의 독자들과 함께 동시에 이해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런 꿈을 꾸는 마음으로 한국어 공부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313, 하나킨(花金)의 일곱시. 책거리(CHEKCCORI)에서 두 시인의 첫 한국! 마사 나카무라×다나카 사토미, 한국 시의 밤이라고 이름 붙인 이벤트가 열렸습니다. 많은 분이 보러 와주셨습니다. 한국인 관광객 분들도 오셨어요! 온라인으로는, (놀라지 마세요) 김보나씨의 모습도 보였어요! 책거리는 가볍게 한국으로 이어질 수 있는, 누구에게나 열린 친근한 가교와 같고, 정말 재미있는 장소예요.

다나카 씨와 저는 각각 한국에서 입수한 시집에서 두 편씩 골라 낭독했습니다. 저는 나의 모험 만화(김보나)에서 공휴백장미의 창백(신미나)에서 바람 주머니가 부풀 때를 골랐습니다. 어째서 그 작품을 골랐을까. 우선은 김보나씨의 공휴부터 이야기하겠습니다.

3월 초, 출판사 요요샤()가 주최하는 우메야시키 북페스타라는 이벤트가 있었고, 저는 그곳에서 작은 시 전문 노점을 열었습니다. 평소에 전혀 시를 읽지 않는다는 손님이 던진 이런 시집이 갖고 싶어요라는 말은 대단히 자극적이었습니다. 한 손님이 일 끝나고 너무나 피곤한데도 뭔가 읽고 있다는 실감을 느끼고 싶을 때가 있어요. 그럴 때 읽을 것으로 권해주실 만한 시집은 없습니까?”라고 문의했습니다. 그때 생각난 것이 김보나씨의 시집 나의 모험 만화였습니다. 김보나씨는 이전에 문학동네인터뷰에서 시단의 다이소 같은 존재이고 싶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때는 그녀의 시집을 읽기 전이었기 때문에 누구나 가볍게 잡을 수 있는, 그 자리에서 생활에 도움이 되는 시를 쓰고 싶다는 뜻인가, 생각했지만 파파고의 힘을 빌려 나의 모험 만화를 읽어보니, 읽은 뒤에도 길게 효능이 지속되는 듯한, 영양분 가득한 시집이라 놀랐습니다. 그래서 언제라도 손에 들기 좋은 가벼움이 있었습니다. 결코 가벼운 내용은 아니었습니다만. 마치 삼계탕 같다고 생각했습니다(정말 피곤할 때 나는 삼계탕을 먹습니다). 아무리 피곤해도 펼칠 수 있는 시집, 그것은 나의 모험 만화가 아닌가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직 일본어로 번역되지 않은 시집이기 때문에 손님에게 내밀 수가 없었습니다. 그분은 아무것도 사지 못하고, 그대로 돌아갔습니다. 공휴는 삼계탕 같은 영양도 있고, 탄산음료처럼 짧은 시간에 기분을 확 바꾸어버리는 마법도 있죠. 단 삼 분이면 눈앞의 경치가 바뀔 만큼 선명한 꿈을 다 같이 꾸고 싶어서 이 시를 우선으로 골랐습니다.

신미나씨의 시집 백장미의 창백. 아직 봉오리가 푸른 백장미는 한 번 꽃을 피웠지만, 이제 두 번 다시 푸르던 시절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뭔가를 얻으며 어른이 되는 동시에 무엇인가를 상실한다는 생의 아픔을 이 시집에서 느꼈습니다. 스스로도 생각지 못했던 상처를 만져주니 상처에서 새로운 싹이 돋아납니다. 계속해서 신미나씨의 언어에서 바람을 느낍니다. 장미는 따뜻한 햇빛과 차가운 물의 상호작용에 의해 성장해가지요. 그렇다면 사람은 기쁨과 슬픔의 상호작용으로 성장해가는지도 모른다고, 나는 이 시집을 읽으며 생각했습니다. 바람 주머니가 부풀 때. 이 시에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색깔이 선명한 꿈처럼, 회의장에 있는 모든 사람을, 문답이 필요 없는 시의 세계로 데리고 갈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신미나씨의 유소년 시절을 생각하게 하는 정경. 1990년에 사이타마현에서 태어난 저는 그 시대도 공간도 모르지만, 지금 이렇게 몸으로 느끼는 바람은 일찍이 바람 주머니를 부풀린 바람, 시대도 국경도 종횡무진 가르며 달려나가, 내 앞에 찾아온 바람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어 번역은 시미즈 치사코 씨와의 공역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우선 제가 번역하고, 시미즈 씨로부터 지적과 조언을 받았죠. 꿈의 정경이 매번 교정되고, 보완되어가는 것을 보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신미나씨와의 만남, 그리고 한국 시와의 만남에 의해 나는 다시 언어의 초심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두 분의 왕복편지를 보며 알게 된 것인데, 신미나씨는 별명 제조기라는 별명을 가지고 계시더군요! 저는 한국에서 미나씨로부터 선물받았던 눈사람 모양의 펠트 키홀더를 겨우내 가방에 붙이고 다녔습니다. 오늘은 323. ‘쌀쌀해서 눈사람은 아직 녹지 않는다는 설정이고, 그래서 아직 가방에 달아둔 채랍니다. 그러고 보니 작년 서울에 첫눈이 내렸습니다라고 미나씨가 메시지를 보내주셨는데…… 설마, 제 별명은 눈사람일까요?!

사이타마현에는 눈이 드물어서 어쩌다 눈이 내리면 우체통이나 담장에 쌓인 것으로 강설 기념 눈사람을 만듭니다. 주먹 크기 정도의 미니 눈사람이 집집마다 담장에 올려져 있는 풍경을 볼 수 있으니 제게만 있는 습관은 아닐 것 같습니다. 27일에 눈이 내렸을 때도 물컵 사이즈의 눈사람을 만들었답니다.

 

 

 

언어의 실뜨기로 우리는 서로 꿈을 꾼다  

다나카 사토미

 

신미나씨, 잘 지내나요?

도쿄는 벚꽃이 하나둘 지기 시작합니다. 매서운 겨울 추위가 끝나고 뭐랄까, 생명의 기척. 푸른 하늘에 떠오르는 엷은 꽃잎을 바라보는데, 살아 있는 것들이 잠에서 깨어나 움직이기 시작하는, 수런대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합니다.

작년 10, 번역가 시미즈 치사코 씨와 공역한, 박경리의 장편소설 토지강연이 서울에서 있다는 소식을 들었고, 그 타이밍에 마사 나카무라 씨와 함께 한국에 갔습니다. 서울에서는 신미나씨와 김보나씨의 책방을 순회하는 낭독회에 찾아온 구윤재, 김현, 유현아, 이소연, 이동욱, 장대성 시인과 같이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 안에서, 지금까지 내가 안고 있던 시의 개념이 요란하게 흔들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당황스러우면서도 새롭고 따뜻한 것이 내 안으로 흘러들어오는 것처럼 조용한 활기를 느꼈습니다.

한국에서는 시가 아주 친근한 존재인 거죠? 신미나씨 그리고 친구들과 방문한 서울의 독립 서점에는 가게의 중심 테이블과 책장에 시집이 줄줄이 꽂혀 있어서 놀랐습니다. 그리고 어디를 가도 나는 시인입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어서, 마치 시인의 천국에 간 것 같았습니다. 일본에서는 나는 시를 쓰고 있습니다라는 말을 하는 데 어딘가 망설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 서울에 또하나의 거처를 발견한 듯한 기분이 들었고 기뻤습니다.

책방을 돌아보던 중에 신미나씨에게 왜 시인이 됐어요?”라고 파파고로 묻자, “일하기 싫어서요라고 농담처럼 대답해주었습니다. 나도 모르게 웃으면서, 저도 그래요, 하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나에게도 일하기 싫었던 시기가 있습니다. 20대 후반에 가족 같은 존재였던 애견을 잃고, 직장도 잃고, 많은 일이 좀처럼 잘 풀리지 않았습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고, 몸을 가둔 듯 방에 틀어박혀 혼자 있는 시간이 늘어났습니다. 그때 매달리듯 시를 썼습니다. 지금은 오래된 책방에서 일하면서 (아마도) 성실히 생활하고 있지만, 그때는 시를 쓰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씀으로써 잃어버린 존재를 더듬으며 다시 한번 만날 수는 없을까 생각했습니다. 시를 쓸 때 나의 존재는 사라지고, 그 공백은 다양한 생명체와 사물의 웅성거림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시는 나의 정념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강아지처럼 무구하고 주체를 갖지 않은 상냥한 생명체의 모습과 잃어가는 사물의 목소리를, 그리고 타자와의 소중한 기억을, 꿈을, 언어로 풀어내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시를 찾으면서 나의 애견 고토바를 다시 만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 진보초의 한국문학 전문점 책거리에서 두 시인의 첫 한국! 마사 나카무라×다나카 사토미, 한국 시의 밤이라는 이벤트를 열어주셨습니다. 한국 여행에서 있었던 에피소드를 이야기하거나 한국 시를 번역해서 그 시를 낭독하기도 했습니다. 한국어를 막 배우기 시작한 초심자인 나는 챗지피티와 구글에 의존하면서 단어의 의미를 찾고 거의 식스 센스를 동원하며 번역했습니다. 그러자 기호에 불과했던 한글이, 서서히 시어가 되어 일어서고 시인의 목소리가 귓속에 메아리치듯 울렸습니다.

제가 번역한 것은 김현씨와 이동욱씨의 시입니다. 김현씨의 시 중에서는 시집 글로리홀에서 은하철도 구구구를 골랐습니다. 이 제목에는 마츠모토 레이지의 은하철도 999(저도 정말 좋아하는 만화!)의 이미지와 비둘기 우는 소리 그리고 한국어의 구구구라는 세 음절이 겹칩니다. 시 속에서는 은하철도 999나 던컨 존스 감독의 <더 문> 이미지가 교차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클론인 샘 벨은 복제된 존재이고, 안드로이드는 폐기될 존재이기도 합니다. “여섯 빛깔 스톤월새 떼들이 시위대처럼 일제히 날아올랐다는 한 구절의 비둘기는 퀴어를 상징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메텔사가 만든 우주를 달리는 장송열차 비둘기호는 주변부에서 방랑하는 신체들을 태우고 거대한 화장터인 지구를 향해 달려갑니다. 이 시의 주석에 따르면 얼마 전 지구의 시간을 방문하고 돌아온 데이비드 보위를 어긋난 시간대에서 만난다. 그는 자신이 가수로 살아가는 지구의 시간에서 보았던 아들의 영화에 대하여 한동안 이야기하지 않을 것이다. 다음 인물들의 이름은 그에게서 잠시 들은 영화에서 캐스팅했다고 하는데, 저도 다른 시간대의 꿈같은 장소에서 김현씨와 대화하면서 이 시의 번역 작업을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동욱씨의 작품 중에는 우리의 파안에서 추신, 이제 너도 돌아갈 수 있을까를 골랐습니다. 시는 도회적인 감성으로 일상을 이야기하지만, 의식은 위태로운 영역에 발을 들여놓고 있습니다. 자신의 안쪽에 있었던, 또하나의 불안한 얼굴이 떠오르는 듯한 스릴 있는 시입니다. 단어들은 긴밀하게 묶이고 배치되면서도 가볍고 유머러스합니다. 이 시의 주체는 어떤 사건에 상처를 받고 잠들어 있습니다. 물약을 흘려넣은 귓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목소리는 선물로 받은 꽃이고, 기억이고, 사랑이며, 편지이기도 합니다. 신체의 내부에서 잊힌 말이 반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체는 언어의 어려움도 느끼고 있습니다. “말을 많이 한 날은 겨드랑이부터 축축해진다는 사람과 접하는 일, 언어를 매개로 커뮤니케이션하는 일에 스트레스를 느낍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보내는 러브레터도 뜻대로 쓰지 못했습니다. 마음을 전하는 일의 어려움. “아이슬란드 발음할 때마다 입에서 눈을 뱉어냈다.” 능숙하게 발화하지 못하는 답답함. 언어가 무너져갑니다. 이 시는 나의 사건이기도 하다고 느꼈습니다.

한국에서 있었던 낭독회에서도 느꼈지만, 언어가 달라도, 언어가 무너져도, 시를 통해 우리들은 소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뜨기를 하듯, 마구 엉킨 실들을 보며 이건 뭐지?’ 하고 물으면서, 놀면서, 꿈을 꿉니다. 그 가운데서 본질을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지금 신미나씨의 시를, 보석 상자 열듯 두근거리며 읽고 있습니다. 언젠가 만나게 되면, 그 시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다시 호시노입니다.

지금도 선유도공원에 와서 편지를 이어 씁니다. 오랜만에 쾌청하고, 버드나무의 연둣빛과 구름 한 점 없는 부드러운 하늘빛이 산호초가 있는 바다 같습니다.

어제는 시의 낙원을 안내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시집으로만 둘러싸여 있자니 과자로 지은 집에 있는 것 같았습니다. 대학로 길도, 너무나 나에게 잘 맞았습니다.

대학로는 역시 칼국수. 지금까지 먹은 것 중에 가장 맛있는 칼국수였습니다!

카페에서 맛있는 커피를 마시고 있을 때 갈색 줄무늬 고양이가 지붕에 나타났습니다. 신미나씨는 순간적으로 몸의 방향을 바꾸며 가지고 있던 츄르를 꺼내들고 고양이 앞으로 달려갔습니다. 그 조용한 시간은 갈색 줄무늬 고양이와 신미나씨만의 세계로 흘러가는 시간이었습니다. 뜻밖에도 나는 신미나씨의 편지에 쓰여 있던, 동물과 사는 우주를 목격했던 것입니다.

어제는 일부러 나와 신미나씨 둘이서만 대화를 시도했습니다. 나의 한국어는 아직 뱃속의 아기수준이었지만, 신미나씨의 세 살 일본어에 도움받으면서 번역 어플도 쓰면서, 어찌어찌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었습니다.

가까이 얼굴을 마주하면서 이야기하면, 번역의 또다른 모습이 보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언어가 되지 않은 말을, 말로부터 반걸음 떨어진 무엇인가를 인간끼리도 많이 나누고 있구나, 새삼스럽게 납득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사람도 동물입니다. 우리는 외계인과 요괴이지만요.

주말에는 드디어 속초에서 현지 사람들과 함께 시를 낭독하는 활자 밖으로 나간 시이벤트가 있는 날이네요. 문자 밖으로 나갈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202642()

서울에서 호시노 도모유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