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혐오
정말 징글징글했다. 내가 쓰던 방에는 내용물을 알 수 없는 상자와 비닐봉지들이 쌓여 있었다. 그냥 다 갖다 버리고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다가 중요한 물건이 들어있을지 몰라 버릴 수는 없었다. 짐을 분류해 넣거나 품목을 적어놓은 것도 아니어서 열어보기 전에 그 안에 뭐가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떻게 이 많은 물건을 하나 버리지도 않고 쌓아둘 수 있는 건지, 이 지경이 되도록 사다 나를 수 있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엄마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가지고 싶은 것은 가져야 하는 건 기본이고 하고 싶은 것도 다 해야만 했다. 엄마는 같은 기능의 물건이라도 디자인의 차이가 있으면 또 샀고, 마음에 드는 물건은 여러 개 사 쟁였다. 마음에 꼭 드는 것이 나타날 때까지 계속 샀고, 가격은 확인도 하지 않고 샀다. 나는 어른들 모두가 그런 줄 알았고, 그게 좋은지 나쁜지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엄마는 자기가 갖고자 한 것 중에 가져보지 못한 건 없다며, 나도 열심히 노력하면 그럴 수 있다고 했다. 나는 그렇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는 게 부러웠고, 그런 가르침이 굉장하게 느껴졌다. 내가 가지고 싶은 것 중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얼마 되지 않았고, 그나마 가진 것도 온전히 내 것이 아니거나 잃어버리거나 빼앗기곤 했기에 그걸 다 가지기 위해서 얼마나 큰 노력이 필요한지 궁금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엄마가 노력해서 얻은 건 많지 않았다.
전쟁의 폐허가 남아 있던 시절, 섬유공장을 했던 외가가 호황을 맞아 엄마는 운좋게도 부유하게 자랄 수 있었다. 대가족의 첫 아이였던 엄마는 부모가 결혼하고 십 년이 지나 겨우 얻은 자식이어서 딸이건 아들이건 상관없이 환대받았고, 엄마가 태어난 뒤로 연달아 아들 둘과 딸 둘을 낳게 되어 귀한 복덩어리 대접을 받으며 자랐다. 엄마는 어른들에게 업히고 안겨서 지내느라 유치원에 가기 전까지 땅을 밟아본 적이 없었다. 학교 다니던 시절에는 기사와 등하교를 하고, 가정부가 점심마다 따뜻한 도시락을 배달해주었다. 잘사는 아이가 엄마만은 아니었으나 이만큼 사랑받는 여자아이는 흔치 않았다. 엄마는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할 때 눈을 오른쪽으로 치켜뜨고 꿈꾸는 듯한 목소리로 그 시절 가졌던 물건들을 하나하나 꺼내 어루만지듯 이야기했다. 유치원 때 쓰고 다녔던 빨간 펠트 베레모와 국민학교 때 입고 다녔던 밤색 체크무늬 모직 코트, 자라는 발에 매년 맞춰 신었던 검은 에나멜 구두, 목둘레선과 소매에 프릴이 잔뜩 달린 꽃무늬 원피스. 어쩌면 그것들이 엄마에게 나보다 더 소중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공주님이었어요?’라고 어린 내가 물었을 때, 엄마는 나라를 잃은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엄마는 이미 가진 게 많았지만,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싶어했다. 물질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뭐든 다 잘 해내고 싶었고, 모두의 사랑과 관심을 받고 싶었고, 세상 모든 걸 한껏 누리고 싶었다. 그러나 뒤늦게 태어난 동생들이 엄마의 걸림돌이었다. 동생들에게 빼앗긴 것은 기껏해야 관심 정도였는데도 엄마는 용납할 수 없었다. 그때 아마 엄마는 빼앗기는 사람보다 빼앗는 사람이 낫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던 것 같다. 훗날 이 신념은 ‘노력’과 함께 나에게 주입되었다. 엄마는 동생들에게 빼앗긴 사랑을 되찾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다. 공부 자체를 좋아하지 않았으나 열심히 하지 않는 방법을 몰랐고 운좋게도 공부에 소질이 있어 늘 좋은 성적을 받곤 했다. 엄마는 부모님의 자랑거리가 되었고 동생들에게 빼앗긴 것들을 어느 정도 되찾았으나 그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공부 말고는 잘하는 게 없었던 탓에 예체능 과목에서 항상 점수를 깎여 전교 일등을 번번이 놓치곤 했기 때문이었다. 그 시절 대학입시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는 과목이었는데도 잘 안달복달하는 딸을 안쓰럽게 여긴 부모가 개인 교사를 붙여주었으나 그쪽으로는 워낙 재주가 없었던지라 간신히 최저점을 면할 정도였다. 가수처럼 노래하고, 댄서처럼 춤추고, 화가처럼 그리고 싶었던 엄마는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는 게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점수를 돈으로 살 수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엄마의 엄마, 그러니까 거의 만난 적이 없어 호칭을 부르기도 어색한 외할머니는 선생님들에게 회식과 선물, 현금을 제공했고, 그게 스승에 대한 예의라고 가르쳤다. 엄마는 자신이 공부를 잘하고 뭐든 열심히 하는 데다 예의 바르고 명랑해서 선생님들이 좋아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다 외할머니의 공로임을 뒤늦게 알았다. 엄마에게는 실망이나 회의, 부끄러움 같은 감정은 없었고, 어떤 일에서든 세상을 잘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혜를 배울 뿐이었다. 엄마는 촌지와 치맛바람이 사랑의 증표이며 그것으로 인해 자신이 더 빛날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외할머니의 가르침은 엄마의 상식이 되었다. 엄마가 나를 돌보지 않고 집에 거의 들어오지 않았을 때도 학교 행사나 학부모 회의에는 빠짐없이 참석했다. 학부모회가 선생님들에게 촌지를 주고 정기적으로 회식을 시켜준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냥 왔다 가기만 했더라면 누구의 엄마인지 알 수 없었을 텐데, 엄마는 꼭 교실에 들러 반에 간식을 돌리고 나를 안아주었다. 유독 눈에 띄게 화려하고 부산스러운 몸짓으로 나를 집에서 기다리는 사람처럼, 일찍 들어오라고 하며 돌아갔다. 나는 그 말에 속아 집에 한달음에 달려가곤 했지만 늘 빈말, 빈집이었다. 아이들은 간식을 받아먹으면서도 나를 싫어했고, 학교에서는 내가 방치된 아이라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부모의 관심을 많이 받는 아이라고 오해했다. 나는 엄마가 그만하기를 바랐지만, 엄마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그럴 때나 한 번 안아주고 따뜻하게 말해주는 게 좋아서 아무 내색하지 않았다.
엄마는 유재를 돌볼 때도 그 상식을 버리지 못했다. 어린이집과 유치원에서는 선물을 받지 않는다는 공문을 자주 보내오곤 했는데도 엄마는 아랑곳하지 않고 선생님에게 크고 작은 선물을 떠안기곤 했다. 난처해진 선생님들은 매번 내게 연락해 그런 일이 재발하지 않기를 요청하며 선물을 돌려주었으나 엄마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세상이 너무 각박해졌어요. 요즘 엄마들은 염치가 없다니까요. 자기 아이를 맡겨놓고 어떻게 맨손으로 드나들 생각을 하는지…… 겨우 이런 걸 가지고 뇌물 취급이나 하고 말이야.’ 엄마는 자기 또래의 다른 할머니들과 함께 젊은 엄마들을 들으라는 듯이 이야기했다. 엄마의 말은 고스란히 내 귀에 전해졌고, 학부모들이 뒤에서 엄마에게 손가락질하며 자기 아이를 유재와 어울리지 못하게 한다는 말까지 들려왔다. 유재마저 나 같은 꼴을 당할 거라고 생각하니 없던 용기가 샘솟아 엄마에게 이젠 제발 그러지 말라고 했다. 엄마는 그것이 자식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방법이라고, 아무것도 안 하는 건 방임이라고, 내가 성공한 것도 다 자신의 공이라고 하며 오히려 화를 냈다. 나는 엄마가 환대받는 존재가 되고 싶어서 그러는 것일 뿐, 자식이 어떤 취급을 받는지 관심도 없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그런 반응을 예상했다. 그러나 엄마는 말만 그렇게 했을 뿐이지 유치원의 정책을 충실하게 이행해 나를 놀라게 했다. ‘유재가 힘들면 안 되지.’ 나는 엄마가 가진 것 중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유재라는 것을 알았다. 한편으로는 다행이라 생각했으나 언젠가는 빼앗아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도 빼앗기기보다 빼앗기라는 그릇된 신념의 계승자였던 거다.
어쨌거나 엄마는 본인의 노력과 외조부모의 재력으로 어느 순간부터 전교 일등을 놓치지 않았고, 최고의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외할아버지는 딸이 좋은 직업을 얻어 돈만 있는 장사치 집안이라는 오명을 씻어내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엄마는 좋은 결과와 칭찬을 받는 것이 목적이었을 뿐, 공부 자체에 흥미가 없었기 대학에 입학한 순간 공부에서 손을 놓았다. 외조부모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으나 금세 계획을 수정했다. 집안의 명예는 두 아들이 높이면 되는 거고, 딸은 명망 있는 집안과 결혼하는 것으로 의무를 다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엄마는 그런 부모의 생각과는 상관없이 자신에게 친절하게 대해주는 선배와 연애를 시작했다. 외조부모는 그가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으나 학벌도 좋고 집안도 나쁘지 않았기에, 졸업과 동시에 결혼시켜 유학 보내는 것으로 계획을 재수정했다. 딱 여기까지가 어디에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엄마의 과거였다. 이 이후의 행보는 얼굴을 붉히지 않고 들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잘못된 가치관으로 점철된 인생이라고 할 수 있었다. 엄마는 부끄러움이라는 걸 전혀 몰랐다. 아니, 자신의 모든 것이 자랑스러웠으니 그런 걸 알 필요도 없었다. 엄마는 그 시대의 여자들 대부분이 겪었던 가난과 차별 같은 것은 경험해본 적이 없었고, 그들이 해보지 않은 것들을 누렸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그리고 더 많이 누리지 못한 것들을 곱씹고 잘못된 선택들을 후회했다. 잘못된 선택의 가장 큰 결과물인 나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어떻게 반응할지 몰라 난감했고,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편이 나았을 거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엄마는 내게 여자는 무조건 예뻐야 한다고 했다. 예쁘지 않다면 키가 크고 날씬해야 하고, 그것도 아니라면 화장을 잘하거나 패션 감각이 좋아야 한다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을 거라고 하며 엄마는 한창때 예쁘지 못했던 것을 후회했다. 어렸던 나는 엄마가 후회할 수 없는 일을 후회하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내 눈에는 화려한 옷을 입고 화장을 짙게 한 엄마가 예뻐 보였기에 왜 그런 소리를 하는지 의아했다. 대학에 가기 전까지 엄마는 자신이 엄청난 미인은 아니라도 꽤 예쁜 축에 든다고 생각했다. 가족들은 사랑으로 눈이 멀어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고 했고, 친구들은 하얀 피부와 정돈된 머릿결, 좋은 원단으로 만든 옷만 입는 엄마를 동경했으니 엄마를 객관적으로 봐줄 사람은 없었다. 게다가 엄마에게 반한 남자친구도 있었기에 엄마는 자신에 대한 왜곡된 자아상을 가지게 될 수밖에 없었다. 엄마는 다른 동기나 선배들이 왜 자신에게 반하지 않는 건지, 어떻게 자신 같은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는 건지 의아했다. 엄마는 다른 여자를 사귀는 동기나 선배들을 참아줄 수 없었다. 그들의 관심을 얻기 위해 여러모로 노력했지만 아무 효과가 없었다. 그러다가 술자리에서 과의 남자들이 자신의 외모를 흉보고 남자친구의 이성 취향이 특이하다고 씹어댄다는 것을 전해 듣고서야 엄마는 자기가 평범한 축에도 못 든다는 것을 알았다. 그때는 성형이 쉬웠던 시대도 아니었던데다 집안에서는 엄마의 미모에 전혀 하자가 없다고 생각했기에 화장 말고는 어떻게 해볼 방법이 없었다. 엄마는 최선을 다해 화장도 하고 패션에도 신경을 썼지만, 썩 효과는 없었다. 엄마가 외제 화장품을 써서 풀메이크업을 해도 립스틱 하나 바른 동기를 이길 수 없었고, 양장점 마네킹에 디스플레이된 옷과 가방을 그대로 입어도 싸구려 옷만 걸쳐도 맵시가 나는 선배를 넘어설 수 없었다. 엄마는 노력해도 되지 않는 것이 예체능 말고 또 있음을 절감했다.
포기를 모르는 엄마는 커플의 틈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 남자를 탈취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혼전순결이 당연하던 시대에 엄마는 과감하게 개방적인 자유연애를 택했고 갓 성인이 된 남자들에게 그 전략은 아주 잘 먹혀들어갔다. 엄마가 끼어든 커플은 기어이 깨지곤 했고, 남자가 엄마에게 빠져들면 엄마는 남자를 차버리고 다른 커플로 옮겨갔다. 결국 엄마의 이런 행각이 들통나서 친했던 동기들과 멀어졌고, 남자친구와도 헤어지게 되었다. 엄마에게 남은 친구는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함께 다닌 경미 이모뿐이었다. 경미 이모는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동생들의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직장에 다니고 있었는데, 엄마는 퇴근 시간 무렵 이모 직장 앞에 찾아가 밥을 사고 술을 사며 끊임없이 하소연했다. 엄마는 자신을 좋아한다는 남자를 뿌리치는 법을 몰랐던 거고, 전 여자친구들이 미련을 못 버리고 질척거리며 자신을 욕해 학교도 휴학하게 됐다며 억울해했다. 이게 다 자신을 외롭게 만든 남자친구 때문에 일어난 일이며 잠깐의 실수조차 용납하지 못하는 옹졸한 남자와 헤어지길 잘한 것 같다고 했다. 이런 말 같지 않은 소리를 들으면서도 이모는 그것이 자업자득이라고 말하지 못했다. 동정심이 많은 이모는 외톨이가 된 엄마가 불쌍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힘들 때 금전적으로 도움을 준 엄마의 부모가 고마워서 이야기를 끝끝내 들어주었다.
학교에 가지 않게 된 엄마는 지루하고 외로웠다. 자신을 궁금해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바라봐주는 사람도 없었기에 무가치한 인간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 시기는 엄마 삶의 전환점이 되었다. 나은 방향으로의 전환이었다면 좋았을 테지만 엄마는 늘 나쁘고 음침한 방향으로 선택을 하곤 했다. 그때 엄마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쾌락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엄마는 사실 쾌락이 나쁜 게 아니라고 했다. ‘즐거울 쾌, 즐거울 락, 즐거운 게 두 개나 붙어 있으니 얼마나 즐겁겠니?’ 숙제로 우리 집의 가훈을 써가야 하는 나에게 ‘쾌락주의’라고 알려주고 엄마는 웃었다. 나에게 쾌락에 대한 선입견이 없었는데, 엄마의 그런 말을 들으니 쾌락이 아주 나쁜 것이어서 주의해야 하는 건가 싶었다. 엄마는 학교 숙제인데 너무했다 싶었는지 난생처음 들어보는 에피쿠로스학파가 어쩌고 하며 자기 손으로 적어주었다. 달필인 엄마는 영어와 한글을 섞어 아주 멋지게 써주었지만, 거기에 왠지 음습함이 묻어 있는 것 같아 제출하지 않았다. 나는 엄마가 전수해준 가치관 중 가장 멀쩡하고 덜 부끄러운 ‘노력’을 적어 냈다.
엄마의 쾌락은 고고장에 있었다. 그곳에 처음에 간 건 경미 이모와 그녀의 친구들과 함께였다. 엄마는 자기 목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음악소리가 좋았고, 취해 흔들거리는 몸을 광광 울려주는 진동이 좋았다. 사이키 조명과 사람들이 뿜어내는 열기에 몸이 녹아 사라지는 것 같았다. 엄마는 삼백육십오 일 중 삼백 일은 취해있었고, 이백 일은 고고장에 있었다. 남들은 월급을 받고 여유가 생기거나 특별한 날이어야 가끔 가는 거였지만, 엄마에겐 돈도 시간도 넘쳐났으니 그 좋은 곳에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엄마의 열심과 노력은 그곳을 향해 있어 함께 갈 친구가 없어도 상관없었다. 엄마는 거기서 새로운 사람들을 가볍게 만나고 헤어지는 게 재미있었고, 남자들이 자신에게 반짝하고 보이는 관심이 좋았다. 그날 밤만은 둘도 없는 친구와 애인이 되어 통금이 지나도 셔터를 내린 채 밤새워 놀았다. 만난 지 십 분 안에 고백받는 기술을 가진 여자, 노래를 잘해서 술값이 들지 않는 여자, 삼바를 쉬지 않고 추는 커플, 입담으로 십 초에 한 번씩 웃겨주는 남자, 목소리가 좋은 마술사, 돈을 잘 쓰는 중년 남자 등 여럿을 만났다.
어느 날 엄마는 테이블 한쪽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아빠를 발견했다. 아빠가 의자에서 굴러떨어지려던 찰나에 엄마가 재빨리 붙잡았다. 엄마가 어떻게 그 시끄러운 소굴에서 잠을 잘 수 있는지 묻자 아빠는 머쓱하게 웃었다. 아빠는 잠을 아껴가며 여러 가지 일을 하는 사람이었는데, 친구의 생일이라 따라왔다고 했다. 얼핏 봤을 때는 아빠의 차림새며 말투가 삼십대 같았으나 불빛이 번쩍일 때마다 소년 같은 얼굴의 윤곽이 자세히 드러났다. 아빠가 말수가 적어 별 대화를 하지 않았지만, 엄마는 아빠의 얼굴만 보고 있어도 저절로 웃음이 났고,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노티 나는 아빠가 갓 스무 살이라는 것도, 국민학교 졸업 후 지금까지 한 번도 일을 쉬어 본 적도 없고 한 가지 일만 한 적도 없다는 사실도, 이미 가구점을 하고 있다는 것이 엄마에게는 큰 흥밋거리였다. 엄마가 고고장 밖에 나가 따로 만난 남자는 아빠뿐이었다. 아빠는 그 말을 믿었지만, 나는 그게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을 했는데 아무리 봐도 내가 아빠와 닮은 데가 없기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엄마는 아빠와 가능한 오랫동안 함께 있고 싶었다. 나에겐 아빠의 마음이 어땠는지는 들을 기회가 없어 잘 모르겠으나, 분명 갓 소년에서 벗어난 아빠가 저돌적인 누나에게 덜미 잡힌 게 분명했다.
그때가 엄마의 쾌락 절정기였다. 엄마는 마치 잘못된 선택의 서두인 것처럼 말했지만, 그 시절 아빠에 대해 말할 때만큼은 어린 시절 소중히 여겼던 물건들을 말할 때처럼 조심스럽게 음미하듯 말했기에 나는 알 수 있었다. 나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엄마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가 뱃속에서 자라고 있었는데, 처음 해보는 일이라 신기하고 재미있었다는 말 말고는 들은 바가 없다. 그 재미가 엄마의 쾌락, 부모에게 임신을 알려 놀라게 하고 실망시키고 결혼 허락을 받는 일도 쾌락이었을 것이다. 나의 외조부모는 아빠가 중학교도 나오지 못하고 양친 모두 일찍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모르는 상태에서도 지나치게 훤칠하게 생겼다는 이유만으로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엄마가 아빠와 어디서 만나게 되었는지, 아빠의 배경까지 알고 난 뒤에는 결혼을 적극적으로 반대했고, 아이도 지우기를 종용했다. 엄마는 누구의 허락을 받는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자기 의지대로 결혼했고, 부모 형제와 절연했다. 엄마는 하고 싶은 것은 꼭 해내고야 말고, 갖고 싶은 것은 가지고야 마는 사람이었다. 아마도 그게 엄마의 쾌락이었을 것이다.
태중에 있던 나는 조용히 자랐고, 아빠의 가구점도 잘 되어갔다. 엄마는 모든 것을 다 가진 것 같았고, 더 가질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노력 없이도 사랑을 독점할 수 있었고 무엇이 되지 않아도 되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하루하루가 행복했다. 결혼 전처럼 부유하지 않아도 아빠가 있었기에 다 괜찮았다. 그런데 내가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빠의 가구점에 불이 나 전소되었다. 신혼집의 전세 보증금을 빼 빚잔치를 하고 이 집에 들어오고부터가 문제였다. 보모를 쓸 여유가 없어서 엄마가 나를 키우게 된 것도, 자본금이 없어 막노동하게 된 아빠의 시큼한 땀냄새도 모두 엄마를 힘들게 했다. 엄마는 천 기저귀를 손으로 빨아야 하는 게 가장 고통스러웠고, 일상적인 가사노동을 형벌처럼 느꼈다. 엄마가 상상하던 가난은 많은 것 중 하나밖에 못 가지는 것이었는데 진짜 가난은 단 하나를 가질 엄두도 내지 못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엄마는 많은 것을 원하지 않았다. 독일산 밀레 세탁기가 갖고 싶었고,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오는 일회용 기저귀가 갖고 싶었다. 그게 아니면 집안일을 해줄 사람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엄마는 아빠가 일하느라 새벽에 나가 밤늦게 돌아오는 것도 싫었지만 일을 공치고 돌아와 집안일을 함께 해주어도 벌이가 없어 더 싫었다. 아빠가 할 수 있는 게 몸과 시간을 갈아 넣는 일뿐이라는 사실도 싫었다.
엄마는 사는 게 너무 힘들어 나를 업고 철로를 따라 걷다가 달리는 기차에 뛰어들 뻔했다고 했다. 정확히 말하지는 않았지만 나를 던지려 했던 게 아닐까 싶었다. 그 길로 엄마가 굳이 절연한 친정을 찾아가 나를 맡긴 걸 보면 분명했다. 내가 너무 어려서 기억을 전혀 못 하지만 잠시 그곳에 머무는 동안 그들이 찍어준 사진은 집에 남아 있었다. 그것은 내가 어린 시절 찍은 사진의 거의 전부였다. 온 식구가 돌아가며 안고 찍은 사진, 여러 가지 예쁜 옷을 입고 있는 사진, 뒤늦게 차려준 커다란 생일상 앞에 앉아 있는 사진들을 보면 그들이 얼마나 나를 얼마나 소중히 여겼는지 알 수 있었다. 어린 시절 나는 그 사진을 보며 나는 왜 저기 저들과 있지 못하고 여기 혼자 있을까 하는 생각에 슬퍼지곤 했다. 엄마는 나를 낳지 못하게 막았던 식구들이 나를 예뻐하고 있는 게 꼴 보기 싫어 다시 집으로 데리고 왔다고 했다. 내 앞날을 걱정해 경제적으로 도와주겠다는 부유한 부모를 뿌리치고 나온 게 의아했는데, 생각해보면 멀쩡한 커플을 깨버리는 마음, 남에게서 기껏 빼앗은 남자를 버리는 마음과 같은 게 아니었나 싶었다.
엄마는 과외를 해 트럭을 장만하고 아빠는 트럭에 물건을 떼어다 싣고 다니며 장사를 했다. 상황이 어느 정도 회복되고 일상을 거의 되찾았을 무렵 엄마에게는 다시 나쁜 쪽으로의 갈망이 슬그머니 생겨났다. 엄마는 조용하게 사는 건 살아있는 것 같지 않았다. 차라리 힘들었던 시절이 나을 정도로 지루했다. 자녀의 성적이 올라 신난 학부모들의 칭송과 족집게 과외 선생이라는 입소문, 줄을 서서 자리가 나기를 기다리며 엄마를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진을 치고 있었지만, 그것도 엄마를 즐겁게 해주진 못했다. 전처럼 고고장도 가고 백화점도 가면 좀 나아질 것 같기도 했는데 낮부터 밤늦게까지 꼬박 방에 들어앉아 아이들을 가르쳐야만 했다. 시간이 나더라도 나를 돌보느라 엄마의 자유 시간은 없었다. 엄마는 이런 상황에 스트레스를 받아 다시 물건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결혼 전처럼 가격표를 보지 않고 사치품을 사고 싶었으나 아빠의 벌이가 시원치 않아 생활용품을 사는 것으로 만족했다. 엄마는 밀레 세탁기와 월풀 냉장고, 지멘스 청소기처럼 같은 용도라도 비싼 수입품을 샀다. 집은 금세 엄마가 사는 가구와 가전들로 가득찼지만 엄마의 마음은 채워지지 않았다.
아빠는 바쁜 엄마 대신 나를 전담해서 돌보기 위해 집 근처에 트럭을 세워놓고 반나절만 장사했다. 하루는 채소를, 하루는 생선을, 또 어느 날은 냄비나 그릇을 팔았는데 엄마는 그게 너무 남부끄러웠다. 아빠가 가구점 사장이었을 때는 괜찮았지만 장돌뱅이 신세가 되고 나니 국졸이라는 사실도 참을 수가 없었다. 하필 왜 이런 추레한 남자와 결혼했는지, 왜 덜컥 아이까지 낳아버렸는지 후회스러웠다. 이런 마음은 엄마를 뚫고 나와 아빠를 찔렀다. 엄마가 아빠를 무시하면서 싸움이 심해지자 아빠는 다시 일을 시작했고, 주로 지방으로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둘이 자주 마주치지 않으면서 싸움의 횟수가 현저히 줄어든 것 같았으나 싸움의 확률로 따지자면 백 퍼센트에 가까웠다. 집에 오기만 하면 싸우게 되니 아빠는 점점 집에 들어오지 않게 되었다.
아빠가 오지 않는 날이면 엄마는 수업을 마친 늦은 시간에도 외출했다. 수업을 빼고 이른 시간부터 나간 적도 있었다. 내가 얼마나 어리건, 집을 혼자 지키건 말건 엄마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는 엄마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했으나, 옷차림과 표정에서 엄마가 도망갈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러나 다음날이면 다시 돌아오곤 했지만 나는 엄마가 집에서 완전히 떠나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원래 있던 쾌락의 자리로 돌아간 셈이었다. 나도 엄마 딸이어서 그런지 엄마가 다른 남자를 만나든 말든 상관하지 않았고, 다만 내가 버려지면 어떻게 하나, 엄마가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걱정만 했다. 그때 나는 남자가 없어도 버려질 수 있는, 사랑 받지 못할 존재라는 것을 전혀 몰랐다.
내가 입다물고 있었는데도 아빠는 엄마가 성인 나이트와 술집을 드나들며 여러 남자를 만나 외도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빠는 그 사실을 알고도 화내지 않았고 오히려 차분해진 얼굴이었다. 아빠는 이혼하고 싶어했으나 엄마는 별거를 원했다. 아빠는 나를 데려가고 싶어했고, 엄마는 보내고 싶어했다. 나는 전학 가는 것이 싫다는 핑계로 집에서 버텼다. 실은 아빠에게로 가면 엄마를 완전히 잃게 될 거라는 판단에 그랬던 것인데, 나는 이 아둔한 결정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나는 엄마와 남았지만 엄마를 잃고 늘 혼자 지냈다. 별거를 시작한 엄마는 마음에 맞는 남자가 생기면 함께 지내느라 자주 집을 비웠다. 고1이 되던 해 아빠의 죽음으로 둘의 별거가 끝나고 난 뒤로는 엄마는 좋다고 하는 남자만 있으면, 그가 미혼이건 기혼이건 마다하지 않고 집을 나가 살림을 차렸다. 엄마는 그렇게 살면서도 이미 세상에 있지도 않은 아빠와 결혼한 것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아빠와 헤어지기만 하면 다시 시작할 수 있을 줄 알았으나 내가 있어 완전히 새로 시작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니 아빠와의 결혼이 아니라 나를 낳은 것을 후회한 것이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이따위인 엄마를 나는 사랑했다. 아니, 사랑하는 줄 알았고, 사랑해야만 하는 줄 알았고,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줄 알았다. 엄마는 내 친권자였고 세대주였고 동거인이었지만 살을 맞대고 산 시간이 많지 않아 엄마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어나는 체험이 아니라 엄마의 물건들과 주변 사람들이 엄마에 대해 하는 말을 통해 엄마를 배웠다. 나는 엄마에게 모종의 결핍이 있어 이런 사람이 되었고 이렇게 살 수밖에 없었던 거라고 이해해보려 했다. 그런데 끝에 다다르면 결국 엄마는 노는 게 좋고, 쾌락이 좋고, 자기만 중요했던 사람이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훗날 엄마와 잠시 함께 사는 동안 엄마의 입으로 들은 이야기는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들고 이해했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그 차이가 나에게 새로운 감정을 불러 일으켰는데, 그 감정을 차마 입으로 내뱉을 수 없어 속으로 꾹꾹 삼켰다.
유재가 보던 애니메이션 주제곡의 ‘노는 게 제일 좋아, 친구들 모여라……’하는 소절을 함께 따라 부르던 엄마가 깔깔 웃으며 유재에게 ‘너도 그렇지? 나도 그래’라고 말하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겨우 참고 있던 그 감정이 혐오라는 것을 알았다. 그때 나는 베란다로 나가 허공에 대고 오래 묵은 감정을 쏟아냈다. 그래 씨발, 혐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