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이중 잣대 (1)
주아는 자신의 고통이 가장 크다고 생각했다. 이 세상에 자식을 잃은 것보다 더 큰 불행은 존재하지 않을 것 않았다. 그녀의 저주가 유재의 사고와 관련된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었다 해도 그녀가 겪은 만큼의 불행을 겪은 사람은 없었다. 그들이 잃은 건 기껏해야 건강이나, 직장, 배우자, 가정의 평화, 일상 같은 거였지 자식은 아니었다. 그녀도 그 모든 것들을 잃어봐서 말할 수 있는데, 자식을 잃은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얼마나 더 간절해야 그들에게 자신이 겪은 고통과 같은 크기의 고통을 안겨줄 수 있는지 궁금했다. 잠을 더 자지 않고 먹지 않으면 가능할까, 머리카락이나 인형을 이용하면 가능할까, 무당을 찾아가 부적이라도 쓰면 가능할까. 생각만 한 것이 아니라 직접 해본 것도 있지만 효과는 없었다. 저주는 넓게 퍼져나갈 뿐, 더 깊이 들어가지는 않는 것 같았다. 수요모임이 저주를 멈추기 위한 모임이라는 것을 알고서도 계속 나간 이유는 사실 역설적으로 그 힘을 더 크게 만들어 쓸 방법을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그것을 알게 되면 사고와 연관된 이들에게 자신이 겪은 것과 같은 크기의 고통을 돌려주고 싶었다. 그러나 누구도 그 방법을 알지 못했다. 거기서 그녀가 얻은 건, 자신이 생각보다 별로인 인간이라는 자각뿐이었다.
모임 사람들 모두가 자기처럼 자식을 잃었음에도 주아는 자기도 모르게 고통의 크기를 비교했다. 누군가가 울 때마다 그게 이렇게 울어도 될 만한 일인지 눈물의 양을 비교했다. 물론 모두 슬프고 안타까운 사연들이었지만, 그녀는 남들이 하나같이 부러웠다. 그녀는 나이가 많은 자녀를 잃은 사람들이 부러웠다. 자녀가 자라는 것을 볼 수 있어서, 함께한 시간이 길어서, 기억할 것이 많다는 게 부러웠다. 유재보다 더 어린아이를 잃은 부모는 다른 의미에서 부러웠다. 추억은 적지만 잊어야 할 것도 그만큼 적으리라는 것이, 또다른 아이를 낳아 새 삶을 시작할 수 있는 나이라는 것도 부러웠다. 초등학생 자녀를 잃은 사람은 초등학교를 보낼 수 있었던 것이 부러웠고, 결혼한 자녀를 잃은 사람은 손자 손녀가 남아 있어 부러웠고, 자녀가 병사한 사람은 적어도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었다는 게 부러웠다.
가장 부러운 사람은 저주를 통해 복수에 성공한 여자였다. 체험학습 여행을 간 그녀의 고등학교 1학년 둘째 아들은 오층 숙소 창밖으로 뛰어내려 사망했다. 부모는 아들이 인터넷상에 남긴 글을 통해 그간 학교 폭력을 당해왔다는 것을 알았고, 같은 반 아이의 제보로 사고 역시 학교 폭력 사건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가해자들 모두 여자의 아들이 먼저 자신들을 가해하기 시작해 서로 다툰 것뿐이라 주장했고, 그날의 사고는 자신들과 전혀 관계없는 일이라고 하나같이 입을 맞췄다. 제보한 아이마저 증언해주지 않아 그 아이의 죽음은 학교 폭력이 아닌 단순 사고로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얼마 뒤 주요 가해자 두 명이 킥보드를 함께 타고 가다가 교통사고로 사망했고, 같은 무리의 아이들에게도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십자인대가 파열되거나, 급성 질환으로 입원을 했고, 다른 학교 아이와 싸우다가 정학을 당했다. 폭력을 방관했던 반 아이들에게도 크고 작은 나쁜 일들이 생기면서 억울하게 죽은 아이가 모두를 저주하고 있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한 학년 위인 큰아들을 통해 소문을 전해 들은 여자는 처음에는 시원한 기분이었으나, 점점 두려워지는 마음에 모임을 찾아온 거라고 했다.
주아는 여자의 고통이야말로 자신과 비교 가능하다고 생각했으나, 그래도 아들이 고등학생이 되기까지 함께 살았으니 자기보다는 나은 게 아닌가 싶었다. 그녀는 여자의 일기를 들은 날, 부러운 마음에 그녀를 따로 만나기까지 했다. 주아는 그녀에게 저주의 능력을 어떻게 쓸 수 있었는지 물었다. 여자는 매일 아들의 사진을 들여다보고 마음으로 기도했을 뿐이라고 했다. 여자는 아들이 태어난 순간부터 죽기 전날까지의 일을 끊임없이 복기했고, 자신이 빨리 손쓰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어떤 순간에 개입했어야 아들이 그렇게 되지 않았을지 생각했고, 가해자들을 어떻게 응징해야 할지 궁리했다. 그녀는 매일 떠오르는 아들에 관한 생각을 남편에게 쉴새없이 이야기했다. 남편은 여자가 아들을 자꾸만 입에 올려 편안하게 저세상으로 가지 못하게 만든다고 화를 냈고, 여자는 남편이 고통을 회피하려고 한다고 비난하며 다투었다. 그 다툼은 여자가 힘을 잃지 않게 만들었다. 여자는 아들이 여행지에서 돌아오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아이가 살아 있는 것처럼 이야기했다. 사람들은 그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어색하게 굴거나 마주하기를 꺼렸다. 그런 반응은 그녀가 생생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분노의 힘을 불어넣어주었다. 가해자들이 죽기 전까지 여자는 자주 학교나 그들의 집 근처를 배회했다. 운 좋게, 아니 운 나쁘게 가해자를 마주치거나 그들의 부모를 마주치면 그저 바라보고만 왔다. 겨우 그랬던 것뿐인데 결국 여자의 염원은 이루어졌다. 그녀가 원한 것은 가해자들의 죽음, 하나뿐이었다.
여자가 했던 일 중 주아가 하지 않은 건 하나도 없었다. 여자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한 건 없었는데 여자는 완전한 복수에 성공했고, 주아는 그러지 못했다. 주아는 그녀에게 한 일이 더 없느냐 물었다. 죽음 외의 일들은 여자가 원한 것도 아니었고, 그것을 위해 더 뭔가를 한 적도 없다고 했다. 주아는 여자에게 앞으로 어떻게 하고 싶냐고, 가능하면 조금이라도 관련된 인간들을 모조리 응징하고 싶지 않냐고 물었다. 예상과는 달리 그녀는 이제 저주를 멈추고 싶다고 했다. 가해자가 죽었다 해도 자기 아이가 살아오지는 않는 거고, 그 복수가 또다른 원한을 낳을지 모른다고 했다. 저주의 힘이 자신들에게만 있을 리가 없다고 하며 누군가는 멈춰야 한다고 했다. 주아는 그녀의 말이 와닿지 않았다. 이미 충분히 복수한 뒤에 느끼는 배부른 후회 혹은 위선적인 제스처라고 생각했다. 주아는 완전한 복수가 아니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사고 관련자의 자식들이 모두 죽어나가는 것, 그들이 고통에 뒤덮여 일상을 살아가지 못하게 되는 것, 그 상태로 최대한 오래 사는 것. 주아는 자신의 고통의 크기에 상응하는 고통은 그것 말고는 없다고 믿었다. 그녀에게 그런 말을 하자, 고통의 크기를 그렇게 비교할 수 있냐고 물었다. 주아는 당연히 그렇다고 생각했다.
주아가 기억하는 한 자신보다 고통스러운 사람은 없었다. 그녀는 마치 고통이 자기 전유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누군가가 자신의 고통을 이야기할 때마다 가소로운 기분이 들었다. 사람들이 자신의 힘든 이야기를 할 때, 그녀는 혹시 자신보다 불행한 아이가 있을까 궁금해 귀기울여 들었다. 겉으로 보기엔 경청하는 듯했으나 속으로는 고통의 무게를 저울질했다. 어려서 철로에 던져질 뻔한 아이도, 아빠와 일찍 헤어진 아이도, 그 아빠를 잃은 아이도, 엄마에게 사랑받지 못한 아이도, 집에 방치되어 혼자 살아갔던 아이도, 남의 집에서 밥을 얻어먹은 아이도, 혼자 있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돌봐야 했던 아이도, 처음으로 마음을 기댄 남자에게 버림받은 아이도, 억울한 소문에 시달리던 아이도, 고향에서 뿌리 뽑힌 채 다른 지역을 홀로 전전해야 했던 아이도 그녀뿐이었다. 누구의 고통도 자신의 고통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을 깨달은 그녀는 자신의 신세가 측은했으나 한편으로는 말도 안 되는 우월감에 사로잡히곤 했다. 이기고 지는 문제도 아닌데, 어쨌건 이겨서 좋았던 건지,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불행한 신세를 견딜 수 없었던 건지 알 수 없다. 그녀는 자신의 그런 비뚤어지고 못된 마음이 점점 더 큰 불행을 가져온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너무 당연해 말하는 것도 우습지만, 유재를 잃은 고통은 그 모든 고통들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유재의 죽음이 주는 고통과 같은 무게의 고통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 고통을 되갚아주기 위해서는 모두의 죽음을 고대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