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AI가 사진에서 나를 제대로 지우지 않고 돌돌 말린 파라솔로 만들어버린 건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가볍게 든 생각-나의 본질이 정녕 우산인가? 했던 게 어쩌면 진실이었을지도. 접힌 파라솔은 내 모니터가 대기화면을 띄울 때마다 ‘쉬는 중’ 안내판처럼 나타났다. 그러나 다시 마우스를 건드리자마자 수많은 작업창이 비 오듯이 쏟아졌다. 그것도 국지성 호우처럼 내 자리에만, 내게만.
질문들에 압사당할 것 같은 심정이 되면 일시 정지 버튼이 절실해졌다. 책상 위에 왼팔을 내려놓고 머리를 기댔다. 오른쪽 방향이 그나마 누구의 시선과도 부딪치지 않는 쪽이었다. 눈을 감으면 하나 둘 셋 넷…… 손목으로 전해져오는 진동. 이렇게 오래가는 작동 장치를 본 적이 있나? 누가 듣거나 말거나 제 박자대로 흘러가는 세계, 엄청난 대서사 안에 내 맥박이 포함되어 있다는 데서 오는 이상한 징그러움. 그리고 인간의 맥박만큼이나 성실하게 질문하는 T.
‘무슨 일이 있나요?’ ‘임과장님 몸이 안 좋으십니까?’ ‘의무실로 가시겠습니까?’
그 질문을 받음으로써 또다른 영역에 진입했다는 것을 알았지만, 바로 일어날 수 없었다. 파티션 너머 기둥 사이 어딘가에서 “초토화됐다던데. 거기 난리래. 지금”과 같은 말들이 들려왔다. 주어도 목적어도 불분명한 말들, 그 안에 생략된 것이 무엇인지, 누구인지 나는 너무 잘 알았다.
팀장이 나를 악천후용 러닝화로 분류했을 때 같이 있던 사람들은 농담으로 받아들이고 웃었지만, 나는 그의 촉이 예리한 것 같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그 말이 농담이었든 진담이었든 간에 그는 일찌감치 내게서 어떤 기질을 알아본 것이다. 비가 내릴 것을 미리 감지하는 새들의 기질을, 본능적으로 시작되는 저공비행을. 내가 버둥거리는 것이 눈에 보였나? 수면 아래 절박하게 움직이는 발을 어떻게 간파했을까? 그게 진짜 내 모습인지의 여부보다 더 알고 싶은 것은 또 누가 그렇게 생각하는지였다.
“유행에 휩쓸려 시작했습니다. 오 킬로미터 뛰고서 대상포진이 왔는데 두 달 후에 바로 하프마라톤 참가했어요. 절반만 뛰려고 했는데, 하프의 하프만요. 심리적 피니시라인은 십 킬로고 그 이후는 덤이었습니다. 그런데 덤이 예상보다 힘이 세더라고요. 얼떨결에 완주!”
첫 하프마라톤 완주 후에 내가 한 얘기는 사내 웹진의 동아리 인터뷰에 실렸는데, ‘얼떨결에 완주!’가 볼드체로 표시되어 있었다. 실은 얼떨결에 한 완주는 아니었다. 나는 덤으로 무엇을 남겨둘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악바리처럼 뛰었다. 그런데 왜 저렇게 인터뷰를 했을까. 지나치게 열심히 하는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았는데, 그 기저에 무엇이 깔려 있는지 모르겠다. 동아리 사람들은 러닝 기록을 공유하며 누적 거리 랭킹에 대해 자주 얘기했다. 나는 하위권이었는데 앱을 실행하지 않고 달릴 때가 많아서였다. 필요하다고 느껴질 때만 적당히 앱을 실행해 사람들과의 거리감을 조정했다.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게.
생각해보면 어제오늘만의 일은 아니었다. 열네 살 여름방학 때는 저녁마다 모래주머니를 종아리에 매달고 달렸던 기억이 생생하다. 직전 학기의 체육 시간에 느낀 치욕 때문이었는데, 달리기 실력을 높이기 위해 남몰래 훈련을 했다. 그것은 나만의 철저한 비밀이었다. 그때 간직한 비밀들은 이십 년쯤 봉인되어 있다가 삼십대 직장인의 소소한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절박함이 휘발된, 적당히 숙성된 실패담을 하나둘 풀어놓으면서 현재형 모래주머니를 숨겼다.
운이 좋다는 말을 들으면 손으로 브이 자를 만들며 웃어 보였지만 그게 행운이 아니라는 걸, 곡괭이로 일궈낸 결과물이라는 걸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았다. 다만 내 노력을 들키고 싶지 않았을 뿐. 겉으로 보이는 이미지까지 통제할 수 있다면 하고 싶었다. 회사 사람들은 아무리 친밀해도 고과 경쟁의 역학관계 안에 있으니까. 언제든 서로의 밥을, 때로는 밥그릇까지도 뺏을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동료애를 넘어서 전우애를 나누면서도 여전히 선은 있었다. 미묘하고 조심스러웠다. 그러니 ‘악천후용’이니 ‘저공비행’이니 하는 말을 들으면 흠칫 놀라게 되는 것이다.
신입 때 내게 스트레스를 주던 요인 하나는 회사 옆 단골 중식집의 땅콩이었다. 볶은 땅콩을 테이블마다 내주는 곳이었는데 나는 절대 손대지 않았다. 그 기억을 우리 팀의 최에게 들려준 적이 있다. 함께 도토리묵을 먹고 있을 때였다. “이것도 그때는 내가 회식에서 절대 안 먹는 음식이었어. 공통점이 뭐게?” 최는 고개를 갸웃했다. “뭐지?” “젓가락으로 집기 어려운 거. 묵도 그렇잖아. 어떤 것은 집어서 내 접시 안에 오기 전에 두 동강이 나.” “그러네, 미끄러지기도 하고. 그런데 묵은 원래 그런 음식이잖아.” “그래서 도토리묵이나 청포묵 같은 음식은 절대 안 집었어.” “혼자 있을 때도?” “혼자 있을 때는 뭔 상관이야. 아무도 안 보는데. 그런데 안 먹어버릇하니까 혼자 있을 때도 손이 가지 않더라, 어색해서. 원래는 좋아했는데.”
“누가 보면 뭐가 문젠데?”
“그러게, 뭐가 문제라고. 그만큼 내가 소심했단 얘기야. 집어오다가 흘리면 누가 흉을 볼 것 같았어. 그거 하나도 못 집느냐고 할까봐. 흰 테이블보 같은 게 깔려 있으면 더 위축되는 거야.”
“세상에. 땅콩 같은 건 손으로도 막 집어먹는다고.”
“별걸 다 걱정했구나 싶지? 나 사무실 유선전화도 너무 싫었다니까. 누가 엿듣고 있을까봐.”
최는 내가 도토리묵을 집어서 입안에 넣는 것을 아주 흥미로운 시선으로 보면서 말했다. “지금은 거의 달인인데? 노력의 결과인가?”
“믿음의 결과. 잘 만든 묵은 안 갈라지더라고. 탱글탱글해.”
타인의 젓가락질도 예외가 아니다. 의식적으로 보려 하지 않아도 눈에 들어오는 것, 습관이다. 태오와 내가 마주앉아 처음 식사를 했을 때, 그가 한입 베어물고 접시에 내려놓은 단무지는 확실한 도발이었다. 단무지를 한입씩만 베어문 다음 본인 접시 위에 올려두고 또 새 단무지를 집어 한입 베어물다니, 그야말로 주의를 빼앗는 퍼포먼스 아닌가. 그가 동그랗게 베어문 흔적이 차곡차곡 쌓였고, 본인보다도 내가 먼저 인지했을 것이다. 그즈음에 찍은 반달 사진 같다고 생각했다. 달과 나 사이에 있던 느티나무 잎새 하나가 함께 찍혀서 결과물에는 마치 달에 검은 입이 생긴 듯했다. 말을 하기 위해 입을 벌린 것처럼, 잎이 만든 입처럼.
우리가 처음으로 일 ‘바깥에서’ 만났을 때, 태오와 나 사이에 놓인 테이블은 그의 등판보다도 좁았고 식당 내부는 사람들로 북적북적했다. 우리는 말을 주고받기 위해 의자를 당겨 앉았는데, 가까워진 거리 때문인지 그가 조용히 웃는 게 시야에 또렷하게 들어왔다. 환한 미소, 꿈을 꾸는 것 같은 미소였다.
“왜 웃는지 알 것 같은데.”
그러자 태오가 기대하는 눈빛으로 내 다음 말을 기다렸다.
“비현실적인 느낌 그런 거 아니에요? 지금 이렇게 있는 거.”
그는 내게 기울이고 있던 상체를 꼿꼿이 세우면서 두 팔을 쓸어내렸다.
“소름 돋았어요. 어떻게 알았지? 그렇게 티나요?”
“엄청.”
실은, 나도 같은 마음이어서.
그날 우리는 헤어지는 시간을 자꾸 미루는 바람에 나중에는 휴대폰에 알람 설정을 해야 했다. 알람이 울리면 그땐 정말 단호한 안녕을 하자고. 느끼기로는 누가 삼십 분씩 담긴 물컵을 홀랑 엎지른 것 같았고, 우리는 알람을 뒤로, 뒤로, 두 번이나 미룬 다음에야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주 오래전 일이 아니다. 한 달 새 벌어진 일들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계획대로 어디로든 소풍을 갔을 것이다. 콘서트를 보러 가고 서로의 집에서 요리를 해 먹고 다가올 크리스마스의 계획을 미리 세웠을 것이다. 서로의 꿈속으로 상대방을 초대하기 위해 애썼겠지. 그는 내 자리를 만들어두었을 것이고, 나는 꿈을 꾸고 싶어했을 테고. 카톡을 주고받다가 자정이 넘어 우리의 대화창에 날짜변경선이 그어지면 누구든 먼저 ‘폴짝!’이라고 메시지를 보냈을 것이다. 그렇게 많은 날들을, 매일을 폴짝거리며 넘어갔을 것이다.
이런 상황이 올 거라고 누가 예측이나 했을까. ‘악천후용’이라는 별명을 가지고도 미리 준비할 수 있는 종류의 폭풍이 아니었다. ‘어디어디행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런 말이 들리는 세계란 정말 어마어마하지 않나. 보통 우리 삶은 그렇지 않으니까. 어디를 향해 갈지 알 수 없는 일들이, 어떤 신호도 주지 않고 닥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니까. 아니, 전부 다 그러니까. 행선지를 확인하고 올라타도 전혀 다른 곳으로 흘러가는 것이 인생이니까.
언제였지. 만나자마자 예보에도 없던 소나기를 마주했던 날, 우리는 편의점에서 비닐우산을 하나 사서 함께 썼는데, 요란하게 쏟아지는 빗속에서 우리의 한쪽 어깨는 이미 흠뻑 젖어 있었다.
“이따가 어깨 확인할 거예요, 얼마나 젖었는지. 젖은 만큼 날 사랑하는 거니까. 마음의 지분 체크.”
내 말에 태오가 그때껏 잘 들고 있던 우산을 휙 치우고는 나까지 흠뻑 젖게 만들었다. 그는 소리치는 나를 두고 우산을 돌돌 말아서 뛰어갔고, 나는 그를 잡느라 또 뛰어갔고, 그렇게 우리는 빗속을 얼마간 깔깔대며 질주했다. 그저 서로가 목적지인 채로.
삼십 분이면 닿을 곳을 두 시간 가까이 서성이다 도착했다. 길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나 시간을 끌고 싶었다. 태오의 집에 가는 것은 세번째였다. 두 번은 태오와 함께였다. “내가 보고 싶어서 무작정 찾아오고 그랬으면 좋겠다. 그럴 날도 오겠죠?” 태오가 그렇게 말했던 기억이 나는데 그게 이런 상황이 될 줄은 몰랐다. 일부러 뒤로 뒤로 미루고 유예하는 동안 태오가 내 메시지를 읽었다는 표시가 떴다. 답이 오거나 전화가 걸려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조금 안심이 됐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역 밖으로 나오자 깨끗한 하늘이 보였다. 바람은 거셌다. 새들이 날고 있는 것인지 휩쓸리는 것인지 구분되지 않을 만큼. 두 시간 전, K5의 플랫폼은 폭우에 흠뻑 젖은 우산들로 번잡했는데, 이곳은 달랐다. 비는 그쪽의 일이라는 듯이, 조금도 젖은 흔적이 없었다. 국지성 호우가 일상이 됐다. 이 동네에는 폭우가 쏟아지는데 몇 블록 너머에는 먹구름 하나 없는 게 낯설지 않을 만큼.
태오의 집은 빌라 3층이었다. 건물 앞에 아무도 없는데도 어쩐지 주위를 살피게 됐다. 입구로 들어서려던 순간 내 바로 오른쪽에서 까-까-까 하는 소리가 났다. 까치가 내 귀에 대고 우는 것 같은 느낌, 나를 덮쳐올 것 같은 큰 소리에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돌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커다란 소나무가 있는 쪽이었는데 마치 나무 전체가 온몸으로 내게 경고한 듯한 느낌이었다. 이윽고 나무에서 까치 몇 마리가 날아올랐다. 태오가 밥을 줬다던 그 까치들인가.
“저기요, 까치는 유해 조류인데. 주민들이 싫어할 텐데. 몰려드니까.” 그때 내가 그렇게 말했던가. 태오가 목소리를 낮춰서 “몰래 줘요”라고 했던 건 또렷이 기억난다. “근데 나만 그런 건 아닌 것 같아요. 저번에 보니까 까치가 치킨 뼈를 물고 날아가더라고요. 누가 치킨을 줬나봐요.” “어우, 그 동네 가면 안 되겠네요.” 그렇게 말하고 키득키득 웃었던 기억, 그 대화 또한 아주 오래전이 아니었다.
현관 앞 우편함에서 301호를 확인했다. 우편물이 많이 쌓여 있어서 누가 봐도 저 집에 무슨 일이 있나 싶을 정도였다. 사람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 그 편이 나을까 싶어서 그대로 두려다가, 301호에 불이 들어와 있는 게 너무 잘 보여서 일단 챙겼다. 광고지, 고지서, 그리고 손으로 발신인의 이름을 적어둔 봉투도 하나 있었다. 그 종이뭉치를 들고 계단을 올라갔다.
벨을 누르지 않고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태오가 문을 열었다. 도끼질을 당한 거대한 나무가 천천히 쓰러지듯이 그는 내게로 몸을 기울였다. 나는 그를 꼭 안았다. 익숙한 냄새, 익숙한 심장박동, 그리고 익숙한 목소리. ‘왜 전화 안 받았어! 왜 꺼뒀어!’ 그런 말은 안 하기로 단단히 마음먹고 왔지만, 묵묵히 곁에 있어주리라 다짐하고 왔지만, 문이 열리자마자 나는 태오를 안고 엉엉 울었다.
그날 우리는 스티븐 맬런의 사진을 통해 뉴욕 지하철의 퇴역 이후를 봤다. 수명이 다한 전동차 한 량을 바다로 풍덩 떨어뜨려 인공 암초로 만드는 프로젝트였다. 이미 수천 대가 바다에 이렇게 가라앉아 있다지, 그곳에는 이제 새우나 홍합 같은 생물들이 모여 살고 있을까. 열차는 그렇게 전혀 다른 세상의 집이 되었는데 그 프로젝트가 계속 이어지지는 못했다. 예기치 않은 일들은 언제나 일어나니까. 전동차 재질의 변화도 그 이유였다. 어떤 열차들은 바닷속에서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너무 쉽게 허물어져서 그 안에 바다의 미래를 담아두기엔 무리였다.
“그런데 이런 인공 구조물, 이것도 홍해파리 활동에 도움이 된대요.”
이번에는 내가 홍해파리 얘기를 먼저 꺼냈다. 이런 얘기를 하고 싶었다. 야생에서도 홍해파리는 원하는 대로 노화를 늦출 수 있고, 그건 그들이 인간보다 더 오래 살아오는 동안에 터득한 생존 본능이라고. 네가 지난번에 한 말, 그러니까 홍해파리의 회춘은 실험실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말에 대해 꽤 많이 생각했다고. 인간이 육안으로 관찰할 수 없을 뿐이지 그 일은 야생에서도 계속되고 있다고. 장소에 따라 달라지는 게 아니라고. 어디서든 일시 정지 버튼을 눌렀다가 뗄 수 있고, 회귀해서 다시 성장할 수 있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포식자와 같은 외부 요소의 개입을 아주 무시할 순 없지만, 홍해파리의 생존 본능은 인간이 아는 범위 이상의 것이라고. 인간이 바다에 띄운 선박, 인공 구조물 그런 게 다 홍해파리의 이동을 돕는다고. 아주 작은 폴립이 선박 외부에 딱 붙어서 이동하는 거 보면 정말 놀랍다고.
“무임승차이긴 하죠. 어쨌든 나는 홍해파리 알고리즘에 갇혀버렸어요. 태오씨 덕분에.”
“무임승차보다는…… 히치하이커.” 태오가 말했다.
홍해파리라면 우리가 통과하는 이 밤을 어떻게 통과할까. 입을 벌리고 거대한 포식자처럼 덤벼드는 이 밤을. 밤의 히치하이커처럼 이 구간을 건너갈 수 있을까. 홍해파리는, 우리는.
그때 태오의 휴대폰이 울렸다. 낯선 번호였다. 회사일까? 언론사일까? 아니면 그냥 스팸일까? 그의 휴대폰을 조금 멀리 밀어뒀다. 전화가 길게 울리다가 끊어졌다. 보다시피 전화를 켜둘 수가 없었다고 그가 말했다. 번호를 하나 새로 파야 하나 생각할 정도였다고.
“여전히 꿈에서 라디오를 들어요?”
“들려요.”
“재난 방송만 나오고?”
태오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가끔 이상하다고 생각하죠. 꿈인데도 재난이 너무 많아서. 근데 듣다보면 또 유행가도 나오고, 깔깔 웃는 대화도 나오고. 어제는 꿈에서 깬 다음에도 라일락 향기가 나서 이게 무슨 일인가 했어요.”
“라일락 향기면 좋은 거 아닐까?”
“꿈에서는 한겨울이었거든요. 이 겨울에 웬 라일락인가 했으니까. 그것도 재난인가보다 했고.”
꿈에서도 태오는 지하철 역사 내부로 들어가지 못했다. 천 피스 이천 피스 퍼즐처럼 조각난 형태라서 얼핏 보면 이전과 다를 바 없는 꿈속 세계였지만 자세히 보면 이 꿈과 저 꿈 사이에 균열이 있었다. 이어지다가 끊기고, 또 이어지다가 끊겼다. 태오가 열차에서 실제로 경험한 것들이 조금씩 뒤틀려 나타났다. 앞에 서 있던 사람의 에코백을 뚫고 나온 볼펜 촉에 팔뚝을 긁혔던 기억이라거나, 쏟아지는 인파에 가방을 몸 쪽으로 당기려 했는데 낯선 사람의 손가락이 만져졌다거나. 가방끈이라 생각했던 게 타인의 손가락이라니 깜짝 놀라서 깨어나니 꿈이었다는 것이다. 하루의 첫 열차와 마지막 열차를 차곡차곡 띄워보내던 역무원이 아니라 어리둥절한 초보자로 그는 꿈속에 놓여 있었다. 때로는 꿈에서 도망치고 싶었다고, 그런데 꿈이 끝나지 않았다고 했다. 역의 이름을 알아내려고 애를 쓰면 꿈에서 깨어났기 때문에 무리해서 그곳의 위치를 파악하려 하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그는 역 곳곳을 돌아다녔지만, 그곳이 어디인지 보여주는 정보는 끝까지 나오지 않았다. 꿈의 출구도 닫혀 있었다. 괴로웠다.
“그럴 때 택시를 부르라며. 그럼 된다며.” 일부러 언젠가 태오가 했던 농담을 던졌지만, 태오는 웃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아주 가느다란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내게 미안하다고 했다. 미안하다고. 많은 것이 생략된 말이었지만 그가 무엇을 전하고 싶은지, 심정이 어떤지 알 것만 같았다.
“이걸 주고 싶어서. 나 이런 거 처음 만들어봤어요. 그래서 삐뚤빼뚤해, 태오씨 이름이. 근데 귀엽지.”
파란색 면으로 만든 수면 안대, 태오의 이름을 달아둔 안대였다. 그는 선물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내게 천천히 머리를 기댔다.
휴대폰이 한 차례 더 울리다가 끊어진 후 태오는 자신이 받은 인스타그램의 다이렉트 메시지에 대해 말해주었다. B선 역무원의 투신 사건이 벌어지기 전날 밤 태오의 계정으로 메시지가 왔다고 했다.
“자기가 B선 안전실에 있던 사람인데 혹시 통화할 수 있냐고…… 메시지는 봤는데 대꾸를 안 했어요.”
“가짜일 수도 있잖아.”
“그래서 계정을 확인해봤는데, 가짜 같아 보이진 않았어요. 그래도 내가 뭐라고 대답을 하거나 통화를 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아서. 그냥 지나쳤는데―”
그리고 다음날 그 사람의 사고 소식이 들려왔다.
“왜 연락했을까요, 그 사람이?”
“그걸 계속 생각했어요. 통화로 어떤 말을 하려고 했던 걸까. 내내. 그 뉴스를 듣고서는 더. 글을 올리기 전까지도, 계속. 그런데 얼마 전에 그 사람이 또 메시지를 보낸 거예요. 이런 얘기 괜찮아요?”
태오의 휴대폰을 보았다. 거기 이런 메시지가 있었다.
‘그 글, 지워지기 전에 봤어요. 우리 힘을 내요.’
병원에서 보낸 메시지겠지. 어쩌면 그런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그래서 전화했던 걸까. 같이 힘을 내자고? 펼쳐보지 않은 과거에 대해 알 수는 없지만 태오는 그 메시지를 받고 많이 울었다고 했다. 책임이 그쪽으로 넘어가서 조금이나마 안도했던 게 너무 부끄러워서. 부끄럽고 부끄러워서 잠에 들 수도 없었다고. 그러면서도 끝내 답장을 보낼 수는 없었다고.
태오의 손에 있는 수면 안대를 펼쳐서 그의 눈을 덮어주었다. 이 작은 헝겊이 거대한 선박은 아니어도 조각배쯤은 되지 않을까, 읊조리는 마음으로. 여기 붙어서 폭풍을 피할 수 있다면. 잠시라도 멈출 수 있다면. 잊을 수 있다면.
생식세포를 물 밖으로 내뱉으면 그만인 일부 심해 생물들처럼, 우리는 가만히 그 방의 어둠 속에서 숨을 쉬었다. 그러다 까무룩 잠이 들었고, 깨어나니 오전 일곱시였다. 암막 커튼 뒤로 누군가 이미 와 있었다. 햇빛이었다. 꼭 캥거루 발 모양을 닮았네. 커튼 밑자락과 방바닥 사이의 일 센티미터쯤 되는 그 ‘사이’에 미리 도달한 햇빛이 하얗게 놓여 있었다. 나는 누운 채로 캥거루의 수를 세어보았다. 모두 여덟 마리. 그 햇빛 무리가 어서 커튼을 치워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이 방에서 처음 아침을 맞이했을 때는 햇살이 투명한 이불처럼 우리를 덮고 있었다. 태오가 가장 좋아하는 때가 이 시간대였다. 교대 근무를 하기 때문에 낮에 잠들어야 할 때도 많아 암막 커튼이 필수였지만, 밤에 잠들고 아침에 눈뜰 수 있을 때에는 암막 커튼을 치지 않는다고 했다. 아침에 해가 방안으로 길게 들어오는 게 좋다고.
침대에서 이불을 걷어내고 지난밤의 꿈을 말리는 시간, 나쁜 꿈은 소독되고 좋은 꿈은 뜨거운 기운만 조금 휘발될 수 있도록 열어두는 그 시간을 태오는 사랑했다. 그는 꿈에 매몰된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며칠째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태오를 위해 그 밤에는 암막 커튼이 필요했다. 어떤 것도 침투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심해의 질서가 필요했다.
태오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자는 척이 아니라 정말 깊게 잠든 숨소리 같아서 안심이 됐다. 꿈에 있는 걸까. 그렇다면 부디 편안한 꿈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