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회

생존배낭에 들어가는 식품이라면 장기 보관이 가능해야 한다

7.

생존배낭에 들어가는 식품이라면 장기 보관이 가능해야 한다. 그게 라면보다 국수를 넣는 이유이기도 하고, 편리하고 가벼운 파우치 포장을 두고 알루미늄이나 철로 된 통조림을 선택하는 이유다. 결국 비상 상황에서 사람이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는지가 관건이기 때문인데, 사실 최소한의 마지노선인 칠십이 시간 연장만을 위한 거라면 이런 고민까지는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칠십이 시간 안에 위기 상황이 끝난다면 말이다. 언제 재난이 닥쳐 칠십이 시간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될지 가늠할 수 없기에 주기적으로 점검하며 마감일을 갱신할 뿐.

생존 용품 회사에서 내가 만든 배낭들이 실제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제품이 누군가의 ‘것’이 된 이후 정말 비상 상황에 놓인 적이 있는지, 아니면 배낭이 꾸려지는 행위만으로도 충분히 어떤 역할을 해냈을지. 생존배낭이 사망 현장에서 발견되는 경우가 드문 것은 아니었으나, 출근 시간대의 지하철 플랫폼에서 발견된 그 배낭은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기습 재난과 같았다. 방치된 죽음의 현장에 놓인 생존배낭이라니. 떠들썩했던 그 뉴스를 알고 현장 사진을 보면 누구나 궁금해할 법했다. 사진이 찍힌 시점에 이 사람은 아직 살아 있었나 아니면 이미 죽어 있었나.

제품 하나하나에 다 위치 추적기를 매달 수는 없고 그럴 필요도 없지만, 할 수만 있다면 우리를 모두 경악하게 만든 그 생존배낭의 행방을 알고 싶었다. 노숙인의 사망 시점으로부터 삼 주가 흘렀다. 단지 그 배낭의 현재 위치가 궁금한 게 아니었다. 내가 궁금한 건 앞으로의 행방이었다. 이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가 그 배낭이 어떻게 노숙인의 손에 들어갔는지보다 훨씬 더 중요했다.

사건을 담당하는 경찰을 만나 현장에서 발견된 배낭 얘기를 했다. 배낭에 구조상 결함이 없음을 확인하고 싶다고 했지만, 그는 아직 조사가 진행중이니 기다리라고 했다. 그러면서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길에서 습득한 제품이었을 텐데 그 배낭이 하필 지퍼 불량이었고, 그 안에 포도당 캔디가 있었고, 사망자가 저혈당이었기에 골든타임을 놓쳤다는 식의 말들을 신경쓰는 것이냐고 했다.

“당연히요. 모든 가능성을 생각해야죠. 저희 제품이 지금 사진에 그렇게 크게 찍혀서 돌아다니는데요. 제품 불량일 가능성은 없다고 봅니다. 그렇지만 브랜드 이미지라는 게 있잖아요.”

내 말을 주의깊게 듣던 경찰은 “바로 그런 이유로 저희도 공식적인 언급은 조사 완료 후에 하겠습니다. 현재 조사중이니까요”라고 했다. 내가 뭐라고 더 말하려 하자 이번에는 다소 과장되게 손을 내저었다.

“뭐 불매운동이 시작되고 그런 것도 아닌데 과장님, 기웁니다. 기우. 배낭은 잘 보관하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시고요.”

“조사가 완료되면 저희가 배낭을 회수할 수도 있나요? 저희 차원에서도 이 일은―”

“그게 유류품이라 조금 복잡합니다. 무연고 사망자 화장 공고 나갔으니까 유족이 나타나면 유족분들께 넘겨드려야 하거든요. 기한이 며칠 남았으니까 일단 기다려봐야죠. 과장님은 제품 제조사 입장이잖아요, 제조사에서 그걸 가져가는 건 극히 예외적인 경우고요. 애꿎은 불매운동이라도 벌어진다거나, 배낭이 뭐 엄청 중요한 단서고 그러면 모르겠는데 그게 아니면 사실……”

“아니, 왜 자꾸 불매운동을 얘기하세요.”

“예를 들자면 그렇다는 겁니다. 그렇게 극단적 상황이 벌어지면 또 모를까.”

“언제쯤 완료될까요, 그럼?”

“아무도 모르죠.”

그래서 우리 회사에서는 경찰의 공식 확인 문구를 포함하지 못한 채 입장문을 발표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타이밍이었으므로. 문장의 배치 순서와 표현에도 신경을 썼는데 선을 명확히 긋되 긴장의 역학관계 속에 참전하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이를테면 K선과 B선의 책임 공방 같은 것. 우리 회사는 내심 러닝 대회 협업을 한 K선이 사망 사건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롭기를 바랐지만 그런 마음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경찰은 내게 “유족이 나타나”지 않으면 유류품을 경찰이 정리하게 되니 그때 다시 얘기를 하자고 했는데, 그게 내가 노숙인의 무연고 사망일 공고를 따로 챙겨 본 이유였다. 그 배낭이 함부로 쓰레기봉투에 버려지거나 다른 의도를 가진 이들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막고 싶었고, 내 사무실 책상처럼 최대한 통제 가능한 영역에 두고 싶었다. 이 사건으로 인한 긴장과 가십이 모두 휘발될 때까지 완전히 봉인하거나 직접 폐기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 화장 일정을 조금 다른 마음으로 태오가 기록해두었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그에게 이런 마음을 전할 수가 없었다. 우리의 메모는 그 배경이 달랐으니까. 태오는 그를 추모할 수 있는 장소를 기록해놓고도 자신이 그곳에 가도 될까를 내내 고민하는 사람이었다.

배낭의 결함 여부는 경찰의 일차 관심사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이 집중하는 것은 지하철 회사의 책임과 의무였고, 며칠 후 폭탄처럼 속보가 터진 후에는 더 그랬다.

‘B9 노숙자 변사 사건 역무원 투신’이란 기사가 속보로 떠오른 건 태오의 일주일 휴가가 끝날 즈음이었다. 스쳐지나가듯 기사 제목을 봤을 때 무언가 내 등을 타고 빠르게 지나갔다. 피가 식는다는 게 이런 거구나. 태오에게 다급히 전화를 걸었을 때 그는 받지 않았고, 안주임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얼음처럼 차가워진 손끝으로 몇 번이고 태오에게 안주임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나는 허둥댔다. 어찌할 바를 몰랐다. 태오의 메시지가 내 눈앞에 나타날 때까지 내내.

“나 잘 있어요. 걱정하지 말아요.”

 

투신한 사람은 스물여섯 살 인턴 역무원으로 B선 안전실의 근무 일지에 기록되지 않은 사람이었다. 원래 안전실 담당이 아니었지만 폭우와 천장 붕괴로 B선 전체가 초비상인 상황에서 급히 동원된 경우였다. 그 사실을 은폐한 것은 회사의 고질적인 인력 문제가 비난을 받을까봐였다고 하는데, 안전실 내부의 CCTV도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역무원들조차도 누가 확인 버튼을 눌렀는지가 계속 미궁이었다. K선의 역무원이, 그러니까 태오가 승객의 민원을 B선으로 이관했을 때 B선의 안전실에 있었던 사람이 바로 그였다. 모두가 비상이라 누구에게 물어볼 틈도 없이 확인 버튼을 눌렀던 것이다. 담당 역무원들이 붕괴된 천장과 막힌 출구 문제로 분투하고 있는 동안에 인력의 사각지대가 만들어진 셈이었다.

그는 사건 발생 이후 극도의 불안감을 호소했고, 경찰 조사를 받은 후부터는 약 없이 잠들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다 결국 건물 옥상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시도했다. 다행히 행인에 의해 빠르게 발견되어 병원으로 옮겨졌다. 의식이 돌아온 그는 침묵했다. 병실 앞에는 ‘절대 안정, 면회 사절’ 종이가 붙었다.

이 일로 인해 책임의 무게가 B선 쪽으로 더 기울었다. 투신한 역무원이 가족에게 남긴 유서에 뭐라고 적어두었는지는 공개되지 않았지만, B선은 그야말로 초토화되었고 정치인들은 앞다투어 이 사건을 언급했다.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병폐라고 했다. 일찍이 B선 역무원의 신상털이를 했던 온라인 플랫폼에는 그다음 타깃에 대한 말들이 오가기 시작했다.

그날 오후에 K선으로 경찰의 전화가 걸려왔다. 이미 했던 조사를 또 하는 이유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B선이 이런 상황에 놓였다고 해서 K선이 안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불안한 공기는 지하철의 열린 통로를 타고 이곳에서 저곳으로 퍼져나갔다. ‘시체 냄새를 맡고 찾아오는 독수리처럼 몰려드는 인파’란 말이 거듭 온라인에 올라왔을 정도로 각종 촬영 장비를 든 사람들이 지하철역으로 찾아왔다. 플랫폼에서 드론을 띄운 유튜버도 있었는데 곧바로 경보음이 울리고 역무원이 뛰어오자 그는 이것이 일종의 테스트였다는 말을 했다. “사람이 죽었을 때는 안 오더니 드론을 띄우니까 냉큼 오네!” 하면서.

태오가 복귀하자마자 마주한 상황이 이랬다. 당시 근무자들 누구냐, 직무 유기한 직원 누구냐, 죽지도 못할 거면서 왜 뛰어내리냐, K선에서는 누가 뛰어내릴 거냐, B선에서 먼저 폭발해서 다행이다 싶은 거 아니냐…… 인턴이든 사회복무요원이든 승객이든 모두 질문하는 사람들을 피해 다녔다. K선 직원이 아닌 엉뚱한 사람이 그곳 소속인 양 인터뷰에 응한 것이 그대로 기사화되면서 잠시 소동이 일기도 했다. 급히 태어났다가 금세 사라진 기사들, 그사이의 몇 시간은 그대로 증발했지만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은 건 아니었다. 이미 사라진 기사의 어떤 문장들은 그것을 읽은 이의 생각 속으로 옮겨가 그들의 숨이 되었다.

그 와중에 태오의 글이 올라온 것이다. 새벽 두시경이었다.

‘그날 전화를 받은 사람은 접니다. 부디 제 동료들을 더이상 언급하지 말아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사건 이후 한시도 그날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괴롭고 후회스럽습니다. 죄송합니다.’

그 글은 작성된 지 두 시간 만에 삭제되었는데 그사이 박제되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박제된 글은 머리와 목이 분리된 듯했다. 태오의 눈과 귀는 여기 있는데 목 아래 몸통이 댕강 잘린 채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두 시간 사이에 언론사 세 곳이 태오의 글을 인용해 기사를 작성했다. 태오가 ‘역무원의 얼굴’이었다는 것을 언급하며 ‘K선의 얼굴 역무원, 양심 고백’이라는 헤드라인을 뽑았다. ‘K선 담당자의 후회스럽다는 고백’이라는 헤드라인도 있었다. 수많은 댓글이 달렸다. 한태오. K선의 인턴. 역무원의 얼굴로 뽑힌 인턴으로 계약 종료 후 정규직 전환 검토 대상. 역무원의 얼굴 중에서도 가장 인기가 많은 인턴. K선 플랫폼 곳곳에서 광고 사진과 홀로그램으로 자주 출몰. 다만 그날의 사건 현장에는 나타나지 않았음. 최초로 전화 제보를 받은 당사자……

진실이 아닌 댓글이 훨씬 더 많았다. 꿀 보직 낙하산, 예전에 A선에서도 근무했다가 근무 태만으로 징계를 먹은 적이 있었던 사람, 유실물 처리 담당이었는데 민원 사항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다는 얘기 있음, 인턴 중에 유독 구설이 많음, 외모에만 신경쓰느라 업무에는 소홀했다는 평, 그런데도 정규직 전환 검토 대상 1순위였다 함, 소셜미디어 인플루언서 활동에만 치중한 듯, 회사에서도 거기 묻어갔음, 같은 팀 동료와 크게 충돌해서 분란을 키우기도 했음, 그래서 팀 이동했는데 옮긴 팀에서도 또 문제 발생, 지각이 잦아서 동료들의 항의 많이 받음, K선의 2미터 집게가 아니라 K선의 엑스맨, 구멍, 이 사람 하프마라톤 서브3 했다고 함, 그 기록으로 비밀 통로를 달렸으면 노숙자 살고도 남았음, 대학 때도 싹수 노란 티가 났음, 평소 노숙자와 비둘기 혐오 발언을 자주 했음, 과격 발언 사이트에 자주 글을 남겼는데 지금은 싹 지운 것 같음, 밤 교대 근무 때 승객과 폭행 시비 붙은 전력 있음, 우리 형이 그 회사에 근무하는데 듣기로는, 내가 그 일을 이 년 해봐서 아는데 그 경우는, 왜 회사에서 이 사람을 보호했는지 아는 사람은 다 알 얘긴데……

 

여기까지가 내가 안주임에게서 들은 얘기였다. 안주임은 이런 얘기를 전하는 게 법적으로 문제가 된다는 걸 알지만 지금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며 무엇보다도 “임과장 상황을 아니까” 나에겐 가감 없이 말하는 거라고 했다. 안주임은 그 새벽에 태오와 통화를 했고, 태오는 통화 이후 게시물을 삭제했다.

“그렇지만 이미 너무 멀리 갔죠. 우리 손을 떠나서. 개인적인 안타까움의 표현인 것으로 알고 있다, 회사의 공식 입장이 아니다, 오늘 내내 그렇게 말하고 다녔습니다. 앵무새처럼. 그쪽 분위기도 좋지 않죠?”

“난감하죠.”

“강팀장님 뭐라고 안 해요? 뒷목 잡았을 것 같은데. 우리 역장은 난리였어요. K선의 2미터 집게잖아. 자기가 흘린 거 주워와야지. 제대로 매듭지어야지. 그렇게 말하고요.”

나는 말을 아꼈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강팀장은 “이거 미친 놈 아니야!”라고 소리를 빽 질렀다. 처음에는 K선의 인턴을 향한 분노였으나 곧 K선 전체의 직원 관리 실태로 비난이 옮겨갔다. 이건 협력사인 우리 회사에서 문제를 삼으면 충분히 손해 배상 청구도 가능할 정도의 일이라고 했다.

태오는 충동적으로 글을 올린 걸까. 역무원의 얼굴이니까 늘 그래왔듯이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게 얼마나 짧은 생각인지, 그 ‘개인행동’으로 인해 회사와 동료들이 얼마나 피해를 입는지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태오의 선임인 안주임의 몫이었다. 안주임은 태오가 어떤 심정이었는지 충분히 알지만, 태오를 좋아하지만, 이건 아니지 않느냐고 내게 말했다. 전날 B선 인턴의 자살 시도 소식은 태오뿐 아니라 자신에게도 충격이었다고, 모두에게 그랬을 거라고 했다.

“그래서 조심스럽다고요, 제 입장도 너무.”

게시물 삭제 건으로 통화를 한 뒤에 태오가 전화를 꺼두어서, 메시지에도 답이 없어서 이야기를 지속하지 못한 게 내내 걸린다고 안주임은 말했다. 우리는 K5에서 네 블록이나 떨어진 곳의 대형 카페에서 만났는데, 목소리를 낮춰 조심조심 말하고 있었는데도 이 일대의 모두가 태오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뒤 테이블 어디선가 이런 얘기가 들려왔다.

“매뉴얼대로 했다잖아요. 그런데도 사고가 벌어진 건 이제 회사 밖의 영역이지요. 이미 공은 네트 너머 저쪽으로 넘어갔는데 그걸 왜 그 K선의 집게인지 가위인지 회사 유니폼 입은 사람이 사과하고 나섭니까. 괴롭다는 둥, 왜 앓는 소리를 하느냐고요. 공감이요? 에이, 그건 공감이 아니죠. 무조건 사과, 무조건 책임, 그렇게 접근할 게 아니죠, 솔직히. 매뉴얼이 왜 있는데.”

안주임이 주위를 둘러보더니 자리를 옮기자고 했다. 우리는 조금 더 외진 곳으로 가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회사에서 태오에게 요구한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삭제한 글에 대해 함구하는 것. 당연히 안주임과의 대화에서 오간 내용을 외부에 발설하지 않겠다는 약속도 포함되었다. 자칫 회사에서 게시물 삭제 압박을 준 것처럼 말이 돌면 그 또한 곤란하니까. 다른 하나는 외부 대응을 개인적으로 하지 않는 것. 그러니까 언론 대응 창구를 회사로 일원화하는 것. 이 두 가지가 기재된 서류를 이미 태오에게 이메일로 발송했다고 했다. 조심스럽다면서 이 이야기를 제3자인 내게 해도 되나. 그러나 안주임은 서류에 없는 은밀한 요구가 하나 더 있었다는 사실까지 털어놓았다. 태오가 그 제보 건에 대해서 경찰 출동 이전에 이미 역장에게도 보고했다는 사실, 그건 지나가듯이 나눈 얘기였는데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절대 입 밖으로 내면 안 된다는 것 말이다.

“아시잖아요. 회사 입장이 어떨지는.”

“‘역무원의 얼굴’이라는 포장지로 잘 싸여 진열된 고깃덩이 주제에 본인이 정말 K선 역무원의 얼굴인 양 착각했던 것, 그렇게 오만을 떤 게 괘씸했단 얘기네요.”

다소 거친 표현이었는데도 안주임은 동조하지도 부인하지도 않았다. 하마터면 빼먹을 뻔했다는 듯이 이렇게 덧붙였을 뿐이다.

“한태오만의 일이 아니지, 우리라고 다르겠어요?”

고개를 푹 숙이자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안주임은 다시 손으로 머리를 쓸어올렸다. 몇 번이나 마른세수하듯 얼굴을 맨손으로 문지르더니 이렇게 말했다.

“언젠가 열차에서 나 닮은 사람 본 얘기 했었죠. 닮은 정도가 아니라 도플갱어 그 자체였다고. 지금 그 열차에 앉아 있는 기분이에요. 저기 한태오가 움직이는데, 꼭 십 년 전의 내 모습 같아서 너무 닮아서 벌떡 일어나고 싶은데도,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는 거야. 가서 한태오를 붙잡아 세워야 하는데, 물어볼 것들이 있는 것 같은데.”

자리를 양보하기 싫은 거겠지.

“너무너무 피곤해서 일어날 힘이 없다고요. 그런데도 지금 그 친구가 하는 일을 최대한 잘 수습하고 싶은 거예요. 한태오 혼자 이거 못해요. 이 상황이 얼마나 우려스러운지, 얼마나 위험한지 그 어린 친구는 모른다고. 이 바닥이 꽤 좁아요. 하긴 요즘 안 좁은 바닥 있나요. 사적 감정으로 회사의 입장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그게 어떤 꼬리표가 될지 과장님도 알잖아요. 우리가 이메일 보내고 카톡하고 전화하고 다음 수순은 내용증명 보낼 참인데, 언제까지 회피하겠어요. 나 진짜 조심스럽게 하는 부탁인데 연락이 닿으면 이메일 체크 좀 해달라고, 아니 나에게 연락 좀 달라고 꼭 전해줘요. 최대한 안전한 자리에 둘 거예요, 한태오를. 잘 협조하면 인사 처리에 불이익이 가지 않게 할 거고, 개인 신상 관련 유포자들이나 다른 여타 고발이나 소송 건에 대해서도 법률적인 거 회사에서 처리할 거예요. 이 일이 잘 수습되면, 이게 오히려 한태오에게도 전화위복이 될 거래요.”

어느새 ‘예요’에서 ‘래요’로 변한 그 간극이 커서 나는 멍하니 안주임을 바라보았다.

“그 말 믿어요, 주임님은?”

“방법이 없으니까. 나도 그 친구가 잘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해요. 무탈하길 바란다고요.”

진심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믿었다. 안주임은 우리와 비밀을 공유한 사이가 아닌가. 하지만 안주임이 나를 만나 ‘넌지시’와 ‘꼭’을 번갈아 쓰면서 얘기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임과장 상황 아니까’라고 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우리의 비밀은 이미 비밀 통로의 문고리가 되어 있었다. 안주임은 자신이 그걸 붙잡고 있다고 자꾸 말하는 것이고. 언제 태오와 마지막으로 통화했는지, 태오가 어떤 얘기를 했는지 안주임은 알고 싶어했다. “저보다 주임님이 더 최근에 통화하신 거예요. 그후로 내내 꺼져 있어요.” 내 말에 안주임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그대로 두면 안 돼요. 연락이 닿아야 해요, 과장님. 이 상황 같이 이겨내야 하지 않겠어요?”

그가 병가를 냈다고 하지 않았느냐고, 그 사실을 상기시키자 안주임은 이렇게 말했다. “그러니까 부탁드리는 거예요. 회사 밖에서 만나시잖아요.”

“부탁이 아니라 이건―”

협박 아닌가요, 라는 말이 입가에 맴도는 걸 참고 있는데 안주임이 말했다.

“더한 것도 할 수 있어요, 필요하다면. 이거 아주 시급하고 중대한 일이니까. 우리 모두에게.”

우리에겐 태오의 번복이 필요했다. 그날 안주임이 몇 번이나 반복한 ‘우리’라는 말. ‘우리’라 함은 지하철 회사뿐 아니라 생존배낭 회사까지 다 포함한 말이라고 했다. 우리는 태오가 K선의 인턴으로서 주어진 매뉴얼대로 대처했고, 지난번 글은 어디까지나 도의적인 안타까움의 표현이었다는 내용을 최대한 자연스럽고 세련된 방식으로 밝혀주기를 기다려야 했다. 회사가 도와줄 것이었다. 단지 딱 한 번만 더 태오가 역무원의 얼굴로 사람들 앞에 서주면 된다고, 태오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안주임은 강조했다.

 

안주임과 헤어진 다음 무작정 열차에 올라탔고, 안주임을 고발할 방법들을 떠올려보았다. 괘씸했다. 방법이 없지도 않았다. 그러나 목적지 없이 어디론가 흘러가는 동안 나는 안주임이 내가 자신을 공격하지 못할 것임을 이미 알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이르렀고, 그래서 더 화가 났다. 열차의 불이 꺼졌다. 종점이었다. 나는 떠밀리듯 일어나 계단을 올라갔고 반대편 플랫폼에서 열차를 기다렸다. 어느새 K10까지 와 있었는데 이곳에는 K선 디자인의 의자들이 놓여 있었다. 의자, 벽 타일, 바닥 타일. 그런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태오가 쓴 글이 모두를 완전히 뒤집어놓은 날 그는 전화를 꺼두었다. 다음날에도 그랬다. 그다음날에도. 그와 연락하지 못한 지 사흘째였다. 먹통이 된 휴대폰은 너무나 하찮은 고철덩어리였다. ‘나 지금 그쪽으로 가고 있어.’ 메시지를 남겼다. 그와 연락이 닿지 않았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통보하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탄 열차는 왼쪽을 향해 흘러갔다. 열차의 꼬리 구간에 서서 뒤로 뒤로 멀어지는 출발점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 손에 닿을 만큼 가까이 있던 등불 하나가 순식간에 과거가 되었고, 그 옆의 등불도, 그 옆의 등불도 그랬다. 곧 나는 태오의 동네에 닿을 것이다. 어서 그에게 닿기를 바라면서도 동시에 나는 무언가를 계속 유예하고 싶었다. 이 짧은 유예가 끝나면 어딘가에 닿게 될 테고, 거기서 무언가를 잃어버릴 것 같아서. 잃어버리고도 잃어버린 줄 몰라 덤덤하다가 시간이 한참 지나 다시 선로로 달려올 것만 같아서. 2미터 집게로도 건져올릴 수 없을 어떤 말, 어떤 표정을 다시 줍기 위해서. 그렇지만 분실 지점조차 기억해내지 못하고 울상 짓겠지. 아직 벌어지지 않은 일이었다. 내가 어떤 것도 몸 밖으로 꺼내지 않았으니까. 그런데도 이미 알았던 것이다. 이 짧은 환승 구간이 끝나고 현실로 넘어가면 무언가를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