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회

엄마, 우리 이사갈까?

“엄마, 우리 이사갈까?” 

베개 두 개를 포개어 베고 누우면서 나는 물었다. 이석증을 앓고 나서 생긴 버릇이었다. 

“왜, 새로 드간 회사에서 월급 두 배 준다냐?” 

엄밀히 말하면 연봉은 깎인 상태였다. 입사 후 새 팀을 꾸려 운영하는 대신 연봉의 일부를 연말 성과급으로 받기로 한 것이었다. 빅테크 기업 방식이라고 면접에 나온 사장은 설명했다. 마흔은 됐을까 싶은 그는 아버지에게서 회사를 물려받았지만 책의 ‘ㅊ’자도 모른다고 국장은 미리 귀띔했다. 과연 임원진 면접은 AI 이야기에서 시작해 자율주행과 일론 머스크를 지나 그 주에 했다는 맞선 얘기로 맺었다. 요는 이태원의 유명한 그리스 음식점이 터무니없이 비쌌다는 거였다.  

“이 건물 팔면 우리 이 동네 구축은 들어갈 수 있잖아.” 

“국악원은 어짜고?” 

“더 좋은 데로 옮기면 되지.” 

“야,” 

그 뒤에 이어질 엄마 말은 듣지 않아도 훤했다. 국악 학원이 우리처럼 지상에 있는 것 봤느냐, 다들 지하로 기어들어가서 소리를 할라 치면 콧구멍으로 곰팡내가 폴폴 들어오면서 목구멍이 막혀버리는데, 여기는 한밤에 쇠를 쳐도 민원 안 들어간다(하지만 그건 이곳이 오거리 길가에 덩그러니 놓인, 누군가 매수한다면 골조만 남기고 다 부수어야 할 정도로 허름한 건물이기 때문이었다). 서울에서 최초로 등록한 국악 학원이라는 점도 엄마가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영광이었다. 지금은 상상조차 못할 일이지만 전화번호부를 좌락 펴면 업체는 물론 집 전화번호까지 다 나오던 시절, 국악을 배우려는 연습생들이 이 고매한 국악원을 찾아왔다고 했다.  

“아무리 그래도 지금 학원 환경이 말이 돼? 이러다 사고 나.” 

등을 돌리고 누운 채로 엄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내 코고는 소리가 들려왔고 피이 하며 엄마는 깊은 잠에 빠져버렸다. 1960년대에 지은 이 건물은 잦은 개축과 증축으로 문자 그대로 ‘쑥대머리 귀신형용’이 되었다. 거기에는 내가 알 수 없는 서울시의 도시 개발 정책과 그에 따른 도로의 건설, 중요무형문화재 판소리(흥보가) 예능 보유자 강옥선 명창과 엄마를 비롯한 그의 제자들의 길고 긴 구원(舊怨)이 한몫했다. 하지만 누구도 그것까지는 자세히 말하지 않았다. 

그 세월 동안 건물은 올랐다가 허물어졌다가 계단이 놓였다가 그 계단을 밀고 방이 났다가 하면서 지금과 같은 꼴이 되었다. 나선형으로 구조가 휘어졌고 방과 가게들이 제각각 다른 형태로 들어차버렸다(전체 모습을 확인한 것도 포털에 위성지도가 생기면서였다). 가게 수는 갑자기 늘었다 줄었다 했다. 상가 쪼개기도 어느 정도이지 늘 중구난방이었다. 

무엇보다 심각한 건 계단이었다. 뒤꿈치를 들어야 발끝으로 겨우 올라설 수 있을 정도로 좁디좁고 높디높았다. 다 녹슨 난간이 있었지만 70도 가까운 경사의 아찔함을 막기란 어려웠고 그 긴 세월 누구 하나 굴러떨어져 죽지 않은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어쩌면 이미 누군가 죽었는데 엄마가 감췄을 수도 있지만. 

작은 화원과 식당 사이 문도 없는 입구로 들어서면 막바로 계단이고, 이층으로 오르면 엄마의 오랜 제자 양이 이모의 ‘힐링우리문화센터’였다. 반층을 더 오르면 포도덩굴 무늬 철제문이 나오는데 거기는 한석구씨 집이었다. 내가 한 번도 들어가보지 못한 공간으로, 전체 구조의 정확히 대각선에 위치해 통행을 꼬이게 만든, 건물의 거대한 절벽이자 침묵이라 할 수 있었다. 거기서 삼층으로 올라가면 이분의 일이 우리집, 나머지 이분의 일이 서울국악원이었다. 문턱과 문설주 흔적을 보면 원래 같은 공간이었을 듯한데 계단참이 생겨 분리됐고 난방도 우리집까지만 가능했다. 

해서 국악원 복도 벽에는 프로판가스 통 세 개가 늘 붙어 있었다. 미사일처럼 생긴 강철 실린더들은 언제 이 건물을 폭파시킬지 모를 위험한 존재처럼 느껴졌다. 그건 마치 엄마 학원을 다니며 내가 느꼈던 아슬아슬함과 닮아 있었다. 나는 소리를 꽤 잘했고 상도 종종 받았지만 그 아슬아슬함을 못 견뎌 포기하고 말았다. 그 세계는 나를 완전히 잡아먹을 것 같았다. 나를 삼키고 소화시켜 내 인생을 전혀 다른 것으로 만들어 내놓을 듯했다. 간단히 말하면 엄마처럼 살아야 할 것 같아 두려웠다. 나는 그 두려움에 떠밀려 춤, 소리, 악기를 하나하나 포기했고 미래를 딴 쪽으로 돌려놓았다. 다른 학생이 되었다. 고전무용을 포기하자 예고 준비생에 한해 허락되던 ‘두발 자유’가 사라지고 단발머리가 되었다. 다른 애들처럼 국영수 학원에 나갔고 콜팝이 최애 간식이 되었다. 몸무게가 불어나 사십 킬로그램을 넘자 생리를 시작했고 엄마와 상의하지 않고 일반고 원서를 썼다. 포기까지가 어려웠지 그 뒤로는 치마의 후크를 한 칸 늘려 걸듯 쉬운 일이었다.  

 

 

“제가 고르면 된다는 말씀이세요? 임원진 면접 없이요?” 

“어차피 이차장이랑 일할 거니까, 아예 팀 구성부터 맡긴다는 거지.” 

나는 공유폴더에서 이력서들을 띄웠다. 인사과에서 2차까지 거른 면접 대상자라는데 모두 신입이었다. 아니, 그러면 하나부터 열까지 새로 가르쳐야 한다는 말 아닌가. 누구를 강사로 불러왔나. 못마땅한 기미를 눈치챘는지 국장은 기본적인 교정·교열 업무는 다른 부서에서 가르칠 거라고 했다. 수습 기간에는. 

“수습이 몇 개월인데요?” 

“일 년이에요. 정확히는 십일 개월. 아주 생짜를 가져다가 만드는 거니까.” 

십이 개월이 아닌 건 계속근로 상태로 인정되는 걸 피하려는 방법이겠지. 퇴직금 같은 문제가 생기니까. 그동안 지은 죄를 모두 사하고 새로 태어나는 가톨릭 세례도 칠 개월이면 받는데 십일 개월이라니. 국장은 원하면 두 명까지 뽑을 수 있다고 했지만 나는 한 명이면 된다며 잘랐다. 회사는 반드시 인당 일 인분 이상의 업무를 맡긴다. 한 사람이 한 사람만큼의 일을 하면 일을 ‘못’한다고 하고, 한 사람이 한 사람만큼도 ‘못’한다 싶으면 일을 ‘안’ 한다고 한다. 갈아넣을 수 있는 만큼 최대로 갈아넣어야 흐뭇해하는 것이 회사 아닌가. 두 명을 팀원으로 들였다가 얼마나 갈리려고. 나는 일단 한 명으로 팀 시스템을 만들어보겠다고 답했다.  

“그래요, 이차장 좋을 대로 해도 되지 뭐. 수습은 언제든 뽑아 쓰면 되니까.” 

이틀 뒤 국장과 나만 참여한 면접이 열렸다. 나더러 결정하라더니 질문은 국장이 도맡아 했다. 압박 면접을 하려는지 지원자가 무슨 대답만 하면 정말? 진심으로? 하고 캐묻는 통에 뭉근한 두통이 일었다. 우리 회사 책 중 가장 감명깊게 읽은 출판물은 무엇입니까? 하는 질문에 『외로우면 도덕경을 읽어라』라고 답하자 “에이, 그거 우리가 손 많이 댔지” 하고 난데없이 자사 책을 깎아내리거나 『초월의 역사』라는 최신간을 대자 “이해는 하셨어요?” 하고 되물었다. 그렇게 기대에 차 있던 지원자의 얼굴이 무안함으로 얼룩지는 것을 나는 망연히 바라보았다. 이번 회사도 망한 걸까 싶었다. 한 삼 년 채워 옮겨야 하는 ‘나가리’인 건가. 면접은 지원자만 치르는 게 아니다. 지원자도 회사 면접을 본다. 직장이란 ‘일하고 싶습니다’라는 희망과 ‘일하고 싶지 않습니다’라는 판단이 상호작용하는 유기체이니까. 

끝나고 의견을 나눴을 때 부장과 내가 꼽은 지원자는 달랐다. 내가 뽑고 싶은 지원자는 국립국어원의 현행 외래어표기법으로 도스토옙스키인 러시아 대문호의 『가난한 사람들』을 답변으로 택한 사람이었다. 국장은 회사에서 오래전 그런 문고판 세계문학 시리즈를 냈다는 사실을 모르는지, 아니면 책 제목이 워낙 토를 달기 뭣한 것이라 그런지 별다른 트집을 잡지 않았다. 나는 면접 장면을 환기시키며 의견을 피력했다. 

“자소서 문장력이 좋네요. 방송작가 일을 해서 문맥을 치고 넘어가는 속도가 빨라요. 아르바이트도 보면 사람 직접 상대하는 일을 많이 했고요. 요즘 사회성 딸리는 신입들 많아서 대면 경험 부족하면 필자 상대 못해요. 디자이너, 마케터랑 소통도 안 되죠. 기획력이라고 생기겠어요?” 

국장은 자기 머리통을 긁으며 한 팔로 기지개를 죽 켰다. 그러고는 내가 내민 이력서를 시득시득 들춰보았다. ‘강해란’이라는 지원자였다. 마치 배우가 필모그래피를 밝히듯 독서 이력을 중심으로 자신을 소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책에 관한 온라인상의 반응을 모아 자신의 취향이 얼마나 보편적인 설득을 얻고 있는지도 써놓았다. 이력서를 읽던 국장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서점에서도 일하고 카페 서빙을 해도 북카페에서 했네요. 근데 부모가 쌀집을 해? 아니, 아직 쌀집이 남아 있어? 요즘 누가 쌀집에서 쌀을 사? 쌀집 남아 있는 동네면 야, 어디 서울 변두리도 있기가 힘든데.” 

나는 지금 쌀집이 중요한가 싶었지만 그즈음 국장이 중구난방으로 떠드는 사람이라는 걸 파악한 터라 이 산만한 회의를 끝내야겠다고 판단했다. 

“저희 동네에도 있어요, 쌀집.” 

“아니, 쌀집이 있어?” 

“계란집도 있고요.” 

“어렸을 때 사러 가면 닭털 날리던 계란집이 아직도 있구나. 이차장 사람 사는 것처럼 사네.” 

사람 사는 것처럼, 그 말에 물음표가 박혔지만 무시하고 아무튼 나는 그 지원자를 밀었다. 국장은 대놓고 반대하지는 않았고 다른 이력서를 내밀며 이 사람은 어떠냐고 물었다. 아주 프로페셔널해 보이던 지원자였다. 화장이며 옷차림이며 성숙해서 못해도 대리급 정도로 보였다. 하지만 나는 그런 안정감이 오히려 신뢰하기 어려웠다. 

“옛날에는 고생 많이 하면서 자란 사람들이 성실하고 회사에 오래 다니고 했는데, 요즘은 그게 역작용을 해서 같이 있어보면 어떻게 해도 안 풀리는 자기 고집이랄까, 자기 확신이랄까 하는 게 강하더라고. 겉으로는 유하고 싹싹해 보이는데 일하다가 수틀리면 갑오징어 같은 이만한 석회뼈가 나와서 뭔 대화를 해도 이가 안 들어가요, 이가.” 

나는 이건 또 무슨 저의인가 싶어 침묵을 지켰다. 국장은 내가 못 알아듣는다고 생각했는지 갑오징어는 먹어봤지? 하고 확인했다. 당연히 먹어봤다. 갑옷 같은 뼈가 있어 갑옷 갑 자를 쓰는 두족류의 하나. 이가 안 들어간다고 표현하다니 그러면 그걸 씹어봤다는 건가, 그냥 비유인 건가. 일하면서 비유를 쓰는 상사만큼 골치 아픈 인간도 없다. 그 비유법으로 인해 황당해지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결국 자기도 모르는 자기 마음에 쏙 들 만한 걸 찾아오라는 말밖에 되지 않으니까. 

“갑오징어가…… 비싸죠.” 나는 겨우 대거리했다.  

“갑오징어도 한철이지.” 국장이 휴대폰을 슬쩍 보며 말했다.  

“그러니까 귀하죠.” 

“보통이 아닐걸?” 

“그만그만한 사람은 그만그만하게만 일하겠죠.” 

“어이구 이차장, 보라고. 나중에는 그냥 마트 가면 사시사철 쌓여 있는 오징어가 그리워질 테니.” 

 

회사가 새 팀에 마련해준 자리는 구석이지만 그나마 창가였다. 오전에만 드는 연약한 햇살을 받으며 선인장이 자라고 있었다. 어느 퇴사자가 버리고 갔다는 선인장 이름을 찾아보니 ‘만세 선인장’이었다. 살뜰히 신경썼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나는 치워버리지는 않았다. 관엽식물보다 손 가는 일이 없었고 뭔가가 ‘응집’되어 있는 아우라가 마음에 들었다. 잎으로 드러내거나 꽃으로 발산하지 않고 자기 안에 쥐고 있는 듯했다. 뭔가를, 시간을, 혹은 미래를. 일곱시가 넘었는데 교열국에는 조중균씨가 앉아 있었다. 저녁도 안 먹고 야근을 하나, 힐끔 보니 책상에는 두툼한 교정지와 함께 표준국어대사전이 놓여 있었다. 진짜 저걸로 교정을 보는 건가. 설마 장식용이겠지, 그 내용 그대로 웹에 올라가 있는데. 나는 인사를 할까 하다가 그냥 우리 팀의 등만 껐다. 

버스는 북적였지만 금세 자리가 났고 다행히 지금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대였다. 저녁이 돌아와 부글부글 끓던 하루를 잠재우는 시간. 이제 뭔가를 해보기에는 다 늦어버린, 긴장이 풀어지고 하루 동안 달성되지 않은 일들이 그냥 그런 채로 놓여나는 시간. 웬만한 날씨에도 절대 문을 열어놓지 않는 종로3가의 금은방 거리와 웬만하면 문을 활짝활짝 열어놓는 종로5가의 약국들은 늘 묘한 대비를 이뤘다. 저 또한 자비의 일종일까. 지붕을 뚫어 중풍 환자를 예수 앞에 내렸던 성경 속 후예들이 삼십 퍼센트 할인을 찾아 약국의 문턱을 넘는 것. 나는 휴대폰에 저장해둔 해란씨의 이력서 사진을 다시 살펴보았다. 

요즘 트렌드답게 공원을 배경으로 찍은 일상 사진이었다. 단발로 자른 머리에, 길고 마른 얼굴, 단정한 입매. 턱에 힘을 줬는지 뺨에는 살짝 보조개가 잡혀 있었다. 어디서든 한 번은 지나쳤을 법한 얼굴이었다. 지하철역이나 빵집, 올리브영이나 세포라 같은 상점 혹은 카페나 작은 소극장에서. 오랜만에 신입을 받아 그런지 처음 팀을 구성하는 것도 아니면서 별생각이 다 들었다. 식성은 어떨까, 매 점심 같이 먹자면 그것도 일인데. 그러다 고개를 드니 새벽의 한강을 슬로모션으로 뛰고 있는 영도가 눈에 들어왔다. 은색 테두리의 광고 모니터 속이었다. 러닝을 하던 영도는 이내 활기찬 비즈니스맨이 되어 홀로그램으로 표현된 주식 차트 위를 누비더니 숙고 끝에 서류들에 박력 있게 서명하고 긴 외투를 걸쳤으며 집에 가서는 오렌지빛 조명 아래 샤워를 했다. 

지금은 외투를 입는구나, 그때는 아디다스 점퍼만 주야장천 입더니만. 하기는 외투만 입을까. 턱시도도 블레이저도 최고급 캐시미어 재킷도 입고, 그래 어느 패션 화보에서는 무스탕 차림이던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벨을 누르고 시장에 내렸다. 수육을 삶아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대문 안이라 동네는 시장 이름조차 충신(忠信)이었고 나는 그 안의 정육점 네 곳을 돌아가며 이용했다. 

언젠가 단골 정육점 사장에게 “아니, 맨날 이렇게 고기를 먹어서 어떡해. 아가씨가 예쁜 옷도 입고 해야지” 하는 말을 듣고 나서부터였다. 물론 사장은 어려서부터 나를 봐왔고 그만한 말을 못할 사이는 아니지만 그때야 나는 내가 고기를 사는 게 가십거리가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금방이라도 세상을 떠날 것처럼 깡마른 몸이면 그렇지 않았겠지, 어느 동굴의 고행자처럼 갈비뼈가 다 드러나 네 발로 기지 않고는 움직이지 못할 정도의 몸이라면. 지난번 쟀을 때 내 몸무게는 팔십 킬로그램에 육박해 있었다. 그래, 그래서 뭐. 인터넷으로 주문하면 눈치볼 필요도 없겠지만 그러면 아무래도 지는 기분이었다. 무엇보다 시장에서 사는 고기와 비교가 안 됐다. 가격이 싸면 맛이 터무니없고 맛있으면 가격이 터무니없었다. 

“어서 와요.” 

언제나 뜨개질중인 여자 사장이 인사를 건넸다. 긴 직물이 무릎을 넘어 마루 아래까지 늘어졌다. 

“수육거리 뭐 좋아요?” 

“소? 돼지?” 

사장은 천천히 손을 멈추고 바지에 붙은 보풀을 떨었다. 

“돼지요.” 

엄마 의견에 따르면 이 집 돼지는 웃으며 잡힌 것 같고 소는 서러워하다 잡힌 것 같다고 했다. 그 집 소고기 별로라고 하면 될 일을 엄마는 꼭 그렇게 지나친 실감을 불어넣었다. 정작 애들이 “선생님, 어떻게 하면 소리가 잘 나와요?” 물으면 “고기를 많이 먹어서 힘부터 세져야지”라고 답하면서. 

“돼지는 뭐 앞다리 아니면 뒷다리지.” 

사장의 손가락들이 장갑 안으로 밀려들어갔다. 

“삼겹살, 목살 이런 건요?” 

“삶는 고기에 뭐 그렇게까지.” 충신시장 상인답게 자기 신념이 확실했다. 나는 먹을 것에 관한 한 그런 쪽을 믿었다. 

“앞다리가 맛있던가, 뒷다리가 맛있던가, 살 때마다 헷갈리더라고요.” 

나는 허리를 숙여 진열대 안을 들여다보았다. 뒷면 거울이 붙은 유리통 안에서 고기들은 줄을 맞춰 놓여 있었다. 

“이렇게 외우면 쉽죠. 앞다리는 한자로 전지(前肢)고, 뒷다리는 후지(後肢). 후지니까 후지다.” 

후지니까 후지. 너무 분명해서 다시는 까먹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고기를 사서 나와 박스며 비닐들이 뒹구는 골목을 터덜터덜 걸었고, 이내 큰길로 나왔다. 국악원 앞 횡단보도에 서자 창을 열고 오거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엄마와 한 사람이 보였다. 팔을 마구 휘두르는 것으로 보아 엄마는 뭔가를 설명하는 듯했고 옆 사람은 새로 온 수강생인 듯싶었다. 학원 사정이 그렇다보니 엄마는 웬만하면 수강생들을 받았다. 한때는 층층마다 내로라하는 고수들이 머물며 ‘쓰것다’ ‘쓰덜 못하것다’ 한마디로 학생을, 아니 제자를 골라 받았다지만 옛일이었다. 신호가 바뀌어 차들이 서자 엄마가 손을 흔들며 날 알은체했다. 평소답지 않게 다정하네, 생각하며 검은 봉지로 싼 고기를 들어 보였을 때 나는 함께 서 있는 헌칠한 남자가 누구인지 알아봤다. 영도였다. 

 

 

* 다음 주 연재는 설 연휴로 인해 한 주 쉬어갑니다.

2월 25일 수요일, 오후 3시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