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회

죽 방을 도는데 대체로 악수로 상견례를 마치는 임원들과 달리 차이사는 차 한잔하자며 붙들었다

죽 방을 도는데 대체로 악수로 상견례를 마치는 임원들과 달리 차이사는 차 한잔하자며 붙들었다. 사장의 사촌형인 차이사는 오랫동안 영국 대학에 있다가 이 년 전 회사로 넘어온 인물이었다. 거기에는 또 긴긴 사연이 있지만 부장의 표현대로 요약하자면 회장이 보기에도 자기 아들이 영 물건이 못 됐기 때문이었다. 비교를 안 하려고 해도 둘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외모만 봐도 차이사는 과거 브라운관의 스타였던 피어스 브로스넌을 닮았고 사장은 그냥 어딘가 짱구같았다.

깨끗하고 단정한 옷매무새는 물론이고 화초처럼 부드러운 인상과 몸짓, 적절한 친화력으로 차이사는 항상 주변 분위기를 온화하게 만들었다. 나이가 어려 그런지 없는 존경을 억지로라도 받아내려고 심술부리는 사장과, 격의 없이 잘 지내려고 노력하는 차이사의 모습은 착잡한 대비를 이뤘다.

해란씨와 나는 마호가니 책상이 길게 놓인 방 소파에 앉았다. 잎이 조금씩 움트고 있는 느릅나무 가지가 창으로 보였다.

이사님, 그림 좋아하세요?”

원과 물결무늬 그리고 동물들로 이루어진 점묘화가 벽에 걸려 있었다. 해란씨는 말이 없고 아이스 브레이킹은 내 담당이었다.

, 제가 대학은 호주에서 했는데요. 그때 아르바이트 열심히 해서 천 달러나 주고 산 그림이에요.”

차이사는 경쾌한 발걸음으로 선반과 차탁을 오갔다. 도와줘야 하나 싶었지만 그러면 결국 해란씨도 불편해지는 것이 아닌가 싶어 말았다. 피어스 브로스넌이니까 그 정도는 상관 안 하겠지.

그림처럼 보이지만 그 나라 사람들에겐 부족의 역사와 경험을 나누는 스토리텔링이지요. 호주 선주민들에 대한 유럽인들의 박해, 말도 못했잖아요. 지금도 캔버라 국회의사당 앞에서 오십 년 넘게 텐트 치고 시위중이에요.”

오십 년……침묵을 지키던 해란씨가 중얼거렸다.

! 오십 년이요!”

공통 화제를 찾아 반가운지 차이사는 우리 쪽으로 한 걸음 다가오며 말을 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흐트러짐 하나 없는, 마치 방금 의류 관리기 문을 열고 나온 사람 같았다.

애보리지널 텐트 엠바시라고, 옮기면 선주민 텐트 대사관이죠. 방문자한테 환영과 보호의 의미로 스모크 세리머니를 해주는데, 그렇게 눈물이 나요. 일단 연기가 매우니까요.”

나는 마지막 농담에 웃음이 터졌지만 해란씨는 별 반응 없이 수첩을 들여다보았다. 차담까지 마치고 나니 점심시간이었다. 메뉴를 정하기 위해 뭘 좋아하는지 묻자 해란씨가 구내식당 밥을 먹고 싶다고 답했다.

구내식당?”

떨떠름하게 되물었다. 평소에 어떻게든 약속을 만들거나 아니면 혼자 먹는 한이 있어도 외식을 하곤 했으니까. 그날그날 원하는 대로 고르는 점심 메뉴와 커피 한 잔은 녹아내리는 통장 잔고를 보면서도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삶의 낙이 아닌가.

해란씨 앞으로 구내식당 밥 내내 먹을 텐데.”

앞으로 먹어야 하니까 그냥 첫날부터 먹으려고요. 기대는 낮춘 다음 올려가는 게 좋잖아요. 나중에 정식으로 환영식 열어주신다면서요.”

해란씨는 말끝에 잠깐 미소를 보였지만 그건 상냥함의 표현도 사교적 제스처도 아닌 스스로 긴장을 풀기 위한 노력처럼 느껴졌다. 나는 더 권하려다가 식당이 있는 별관 지하로 안내했다. 벌써 일층 현관까지 직원들 줄이 이어져 있었다. 오늘의 메뉴를 확인하고 줄을 거슬러 홱홱 밖으로 나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뭔가, 오늘의 메뉴는. 이름대로 정직하게 무채만 수북하게 올려놓은 무생채비빔밥인가, 뻣뻣한 고기 몇 점이 든 누린내 나는 설렁탕? 국자가 비껴 지나간 듯 떠진 소량의 순두부가 붉은 고추기름 속을 부유하는 이름만 북창동인 순두부찌개?

서점 아르바이트 할 때 대기업 구내식당에서 밥 먹었거든요. 팔천원이었고.”

해란씨 구내식당 경험자네. 근데 우리 식당은 뭐랄까, 호불호가 많이 갈려요.”

그래도 열두시에 먹을 수 있어서 좋아요. 거기는 열두시에는 직원만 받고 외부인은 한시부터 먹을 수 있거든요. 맛이야 어떻든 여기는 그런 구분이 없고 티가 안 나니까요. 그런 거…… 사소하지만 되게 특별한 차이잖아요.”

나는 해란씨가 상당히 반추 성향이 강한 사람이구나 생각했다. 쉬지 않고 돌아가는 솜사탕 기계 같은 머릿속. 생각이 몇 가닥으로 흘러가다 계기를 만나면 풍선처럼 부풀어 서서히 형태와 의미를 갖추고 가장 피곤하게는 감정을 남기는.

차이사님 친절하시지? 회계 쪽 이사님이라 그럴 필요도 없는데 편집부를 살뜰히 챙기세요.”

오늘 메뉴는 다행히 닭볶음탕이었다. 볶음 요리는 그나마 엔간한 수준을 유지했다.

, …… 그런데 저는 좀 이해가 안 갔어요.”

뭐가?”

수저를 집다가 나는 당황해 물었다. 빠르게 복기했지만 기억에 담아둘 부분 하나 없는 밋밋한 대화만 나누고 왔을 뿐이었다.

오십 년간 텐트에서 시위한 사람들 얘기를 하면서 농담을 할 수 있다는 거요.”

아직 식사는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나는 아주 단단한 것, 예를 들면 부장이 한 연체동물의 뼈까지 운운하며 전달하려고 한 인력 관리의 난제와 맞부딪친 기분이었다. 마침 식당 한편에서 부장은 다른 부서장들과 함께 닭뼈를 살뜰히 발라내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