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회

1. 언젠가―1

글이 전혀 출판되지 않거나 혹은 극히 미미한 양만이 출판되는 한 모든 글은 성스럽다. 하지만 이미 아주 많은 양의 글이 출판된 다음이라고 해도 역시 모든 글은 마찬가지로 성스럽다. 이건 죽은 동물이 그들이 죽은 나라를 동물이 한 마리도 죽지 않은 경우와 마찬가지로 늙게 만드는가 하는 질문과도 관련이 있다. 

―거트루드 스타인, 『아메리카의 지리적 역사 혹은 인간 본성과 인간 정신 사이의 관계』

 

……한 조각의 들판을 바라본다, 그 들판은 항상 변함없는 모습 그대로의 들판이었는데, 만약 그다음에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본 후 시선을 돌려 다시 들판을 보게 된다면, 들판에는 조금 전에는 보이지 않던 나비와 새가 날아다니게 된다. 

―거트루드 스타인, 『모든 이의 자서전』

 

 

1. 언젠가

 

아눅에게 다가간다. 아눅을 보기 위해서다. 
그러나 가까이 간다고 해서 아눅을 더 잘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도리어 그 반대이다.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은 단지 아눅이 걸친 옷자락과 머리카락, 그의 신발과 족제비의 털이 묻은 뒤꿈치, 그것도 일부뿐이다. 아눅이 입을 열면, 나는 의미의 가장자리를 떠도는 말을 느낀다. 그것이 아눅이다. 아눅은 나를 보지 않는다. 아눅은 기꺼이 외면한다. 갈색 토탄과 연초록 이끼류로 만들어진 성긴 질감의 그물 같은 섬유, 그리고 수분을 흠뻑 머금어 얼룩진 자작나무 껍질 가면, 그것이 아눅이다. 그래 아눅, 하고 나는 속삭인다. 그래 아눅. 아눅의 귀는 참나무처럼 두터운 옹이와 털과 겹겹의 비늘로 뒤덮여 내 속삭임을 들을 수 없겠지만 나는 개의치 않는다. 도리어 더 낮은 목소리로 나는 속삭인다. 그래 아눅. 
나는 아눅을, 아눅의 긴 옷자락과 동물냄새 나는 신발을, 머리에 쓴 삼각형 나무껍질 모자, 청동색 옛날 동전을 쥐고 있는 뼈처럼 딱딱한 그의 회색 손가락을 만질 수 없다. 오, 단 한 번도 나는 그러지 못한다. 나는 집안에 머물고 있는 반면 아눅은 결코 집안으로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눅을-만질-수-없음은 나를 좌절시키지 않는다. 아눅의-거기-있음을 내가 생각하기 때문이다. 
생각한다는 것은 안다는 것을 초월한다. 
이른 아침, 잠에서 깨어난 나는 눈을 뜨기도 전에 미소를 짓는다. 나는 커다란 욕망을 품고 살지만, 내 욕망을 영원히 잠재울 줄 안다. 그렇다고 내가 욕망을 하찮게 대하거나 억누르는 건 아니다. 내 무릎에서 잠자는 욕망의 머리를 쓰다듬기, 욕망이 영원히 깨어나지 않도록 소리 내지 않고 입술을 움직이며 자장가를 부르기, 욕망의 꿈을 온화하게 보살피기, 이것이 내 일이다. 오직 그러기 위해서 나는 잠든다. 오직 잠들기 위해서 긴 자장가를 쓴다. 아니, 어느 날 내게 들려오기 시작한 말없는 자장가를 말로 번역한다. 
아눅을 명상한다. 나는 아눅을 명상하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아눅을 보기를, 아눅과 함께 있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마치 내가 아눅이 아닌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던 것처럼. 그것이 내 자연이다. 하지만 모든 자연은 태양이 이미 종말인 것과 마찬가지로 종말이기도 하다.

 

아침, 화덕 위의 커다란 솥에서 물이 끓기 시작한다. 나는 내 작은 자연의 종말을 개의치 않으면서, 차가운 우유와 꿀이 든 단지를 식탁에 차린다. 찐 귀리에 뜨거운 물을 부어 죽을 만든다. 냉장고에서 꺼낸 밀가루 반죽을 작게 잘라 기름을 한 방울 바른 손으로 둥글게 만들어 납작하게 누른 뒤 팬에 올려 굽는다. 나는 서둘지 않고 천천히 움직인다. 빵이 익는 동안 송진 향로를 잊은 것이 생각나 화덕을 열고 불씨가 가물거리는 작은 숯덩이를 집개로 집어 가문비나무 송진이 들어 있는 향로에 담는다. 송진 위에 가문비나무 잎을 뿌린다. 흰 연기가 피어오르는 향로를 창턱으로 옮긴다. 창턱에 향로를 놓기 전 향로의 긴 손잡이를 들어 괘종시계의 추처럼 천천히 진동하도록 놓아둔다. 아무것도 깔리지 않은 마룻바닥에 신문이 떨어져 있다. 일주일에 한 번 배달되는 지역신문이다. 나는 신문을 식탁 위로 가져간다. 사실 신문은 나를 위한 물건이 아니다. 나는 신문을 거의 읽지 않는다. 지역신문에 실리는 대부분의 기사는 의례적인 행사들, 부고와 출생, 교회의 세례와 견진성사, 성인식, 지역 행사나 축제, 개업, 댄스 파티나 스포츠 경기, 라틴어 강습, 지역 예술가들의 낭독회나 음악회 등의 안내인데 그 어느 것도 나와는 큰 연결점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간혹 가문비나무 숲에서 아주 옛날 동전이 발견되었다거나 가까운 농장의 화재 소식, 강에서 백조가 죽었다는 등의 기사는 내 흥미를 끌기도 한다. 나는 많이 읽지 않는다. 닥치는 대로 읽는 습관은 어린 시절과 함께 빠르게 사라졌다. 그보다는 느리게 반복해서 읽기를 좋아한다. 읽을거리라면 다락방에 쌓여 있는 오래된 책들로 충분하고 또 가까운 도시의 도서관을 이용할 수도 있다. 끓는 물을 작은 주전자에 덜고 거기에 약간의 우유와 한 조각의 버터, 검게 익은 두송나무 열매와 찻잎을 넣어 버터차를 만든다. 마지막으로 소금을 살짝 뿌린다. 집안은 물이 끓으며 올라오는 김과 빵이 익는 냄새, 가문비나무 송진의 흰 연기와 향으로 가득하다. 나는 바닥과 탁자에 떨어진 기름과 밀가루를 닦아내는 일을 뒤로 미루고 주방 위쪽 선반에서 화집을 한 권 꺼내 펼친다. 저녁. 박명. 검은 전나무 숲. 온몸이 오직 검은색으로만 이루어진 개. 홀로 있는 여자. 해변에 쓰러진 나체. 홀로 있는 검은 개. 흰 절벽 아래의 나체. 날카로운 바위 절벽이 있는 황량한 바닷가 풍경이 하나하나 나타난다. 화집의 페이지가 내 손가락에 묻은 기름과 밀가루로 번들거리고 더러워지지만 나는 개의치 않는다. 나는 아주 위생적이거나 완벽함을 추구할 만큼 부지런한 편은 아니다. 흠 없는 아름다움이나 청결을 최우선시하지도 않는다. 아니 차라리 완전히 반대에 가까울 것이다. 종종 부주의하거나 아무런 생각도 의식도 없이 행동해버릴 때가 있다. 나는 비누 없이 얼굴과 머리카락을 씻고 빨래를 한다. 혹은 아예 씻지 않거나. 그게 아니라면 내 육체와 영혼 그리고 설거지와 걸레 세탁과 마룻바닥 청소 그 모두를 위해 오직 반 조각의 비누로 충분하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납작한 빵을 집어들어 먼지만 대충 털고 그냥 먹는다. 그게 자연스럽고 나는 자연스러움이 마음에 든다. 나는 진흙이 튄 맨발을 씻지 않고 밤에 잠자리에 든다. 이불이나 행주는 물론 블라우스나 셔츠도 다림질하지 않는다. 좀이 슬어 큰 구멍이 난 스웨터를 그대로 입는다. 그게 자연스럽고 좋다. 물론 스웨터를 수선할 털실이 없는 것이 결정적인 이유이기는 하다.
나는 두 개의 찻잔을 찬장에서 꺼내 조심스럽게 버터차를 따른다. 고무줄 대신 연필을 집어 머리카락을 고정한다. 익은 빵을 팬에서 꺼내 두 개의 접시에 나누어 담고 소금과 충분한 기름, 약간의 파를 뿌린다. 작은 사발 두 개에 귀리죽을 덜고 두송나무 열매를 몇 알 넣는다. 원한다면 우유와 꿀을 추가해도 된다. 꿀은 충분히 남아 있고 농부에게서 사온 신선한 우유 두 병도 한번 끓였다가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바구니에는 아직 약간의 사과와 감자가 있지만 아침 식탁은 이미 먹을 것이 충분하니 다음 식사를 위해서 남겨둔다. 식료품을 모조리 먹어치우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지하실의 양배추나 호박 이외에도 최소한 통조림 수프나 약간의 국수 정도는 항상 남겨놓아야 한다. 내가 사는 여름 거주지는 아주 외따로 떨어진 곳이고 언제 또 시내로 장을 보러 갈지 모르기 때문이다. 주중에는 큰길로 나가면 하루에 두 번 다니는 버스를 탈 수 있지만 나는 바퀴 달린 바구니를 끌고 걸어서 장을 보러 가는 편을 선호한다. 버스 시간을 맞추기도 어렵고 또 숲을 통과해서 걸어가는 지름길이 훨씬 더 가깝기 때문이다. 물론 날씨가 나쁘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11월이다. 이미 들판에는 서리가 가득하다. 이달이 가기 전에 눈이 내릴 것이다. 어쩌면 다음주. 아니 어쩌면 내일이라도. 나는 창밖을 바라본다. 화집을 덮는다. 문을 열고 테라스로 나간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이 그렇듯 불안한 기대가 나를 채운다. 나는 헛간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된다. 나는 탄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개 짖는 소리를 태어나 처음으로 들은 사람처럼 놀란다. 
내가 보는 것이 거기 있다. 내 봄이 그것을 있게 만들기 때문이다. 보는 것은 직관인 반면 있음은 상상이다. 내 눈은 내가 본 것을 믿지 못한다. 그러나 믿음은 내게 자연스럽지도 흥미롭지도 않다. 나는 내가 본 것 안에서, 내가 믿지 못하는 것 안에서 산다. 나무가 있다. 한 마리 검은 개가 있다. 흰색 서리에 덮인 들판 가장자리 반쯤 허물어진 사냥꾼의 파수대가 폐허의 탑처럼 떠 있다. 청회색 하늘의 구멍에서 쏟아져내리는 안개, 그리고 회색빛 아침. 세계의 윤곽과 자아가 완화된다. 개 짖는 소리가 지나간 뒤 긴 메아리가 허공에 푸른 자국으로 얼어붙는다. 집 앞 저수지의 수면은 황금빛과 붉은색 낙엽으로 가득하다. 저수지로 내려가는 기슭에는 커다란 가시가 달린 덤불이 무성하다. 내 손은 무의식중에 차가운 얼굴 피부를 건드린다. 거미줄처럼 반짝이는 희미한 빛 속에서 말이 사라진다. 말이 잊힌다. 표정과 몸짓이 마비된다. 나는 얼어붙는다. 돌아온 자가 거기 있다. 그는 오두막 안으로 들어서기 전 문 앞에서 청어 뼈 문양이 든 회색 외투를 가볍게 턴다. 나는 그의 외투 어깨에 박힌 커다란 붉은 가시를 뽑는다. 멀리 들판 너머에 한 마리 검은 개가 있다. 먼 나라의 냄새가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