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회

5. 들판을 본다―(2)

나는 들판을 본다. 느슨하게 기울어지는 드넓은 산비탈의 들판이었다. 뿌리와 수분과 이끼, 키 작은 들꽃과 풀들로 이루어진 지면은 깜짝 놀랄 만큼 부드러웠고 발을 디딜 때마다 거의 발목까지 푹푹 빠질 정도였다. 원래는 소를 풀어놓고 기르던 목초지인 땅이다. 아래쪽에 아무도 살지 않는 낡은 집 한 채가 있었다. 여기서 소를 키우던 농부들의 집인데 최근에는 비어 있다고 했다. 그것이 우리의 유일한 이웃이었다. 주인이 떠나버린 집 벽에는 비와 바람에 검게 썩어버린 나무조각 성상이 매달려 있었다. 나는 전날 관청에 가기 위해 입었던 초록색 블라우스와 검은 스커트 차림 그대로 우리가 지난밤 머문 산장 오두막 앞 벤치에 앉아 있다. 갑작스러운 여행이라서 작은 손가방 말고 다른 옷은 챙겨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바람이 불어왔으므로 나는 초록빛 숄로 머리를 감쌌다. 들판 너머 멀리 희고 단단하게 솟아오른 석회암의 산등성이들이 보였다. 나는 산에 있다. 처음에 체룹이 산으로 가자고 했을 때 나는 좀 놀랐는데, 그는 평소에 도보여행이나 산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늘은 빛을 머금은 거대한 푸른 벽과 같았다. 매와 독수리가 있을 것이다. 오두막 마당 장작 창고 앞에는 반으로 길게 자른 통나무를 파서 만든 물통이 있었고 그 안으로 샘물이 졸졸 흘러내렸다. 아침에 갑자기 수백 개의 방울소리가 들렸고 문을 열어보니 마당을 가득 채운 양들이 통나무 물통 주변에 모여들어 물을 마시고 있었다. 그처럼 많은 양들을 가까이서 본 건 처음이었다. 하지만 양들은 우리 존재에 대해서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단지 우리가 한 걸음 다가가면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거리를 유지할 뿐이었다. 양치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창고에 가서 장작을 한 바구니 가져와 난롯불을 피웠다. 아침식사를 만들고 샤워를 하기 위해서는 우선 난롯불을 피워 물을 데워야만 했다. 체룹은 과거에 이 오두막에서 묵은 적이 있다고 했다. 그때는 아랫집에 농부 가족이 살고 있었고 매일 아침 그들에게서 신선한 우유를 살 수 있었다는 것이다. 오두막은 산 아래 작은 도시의 도서관에 속해 있었다. 도서관은 그곳에서 행사를 갖는 작가나 음악가에게 오두막을 숙소로 제공했고, 행사가 없을 때면 호텔보다 저렴한 숙박비를 받고 예술가들에게 빌려주고 있었다. 체룹은 십 년도 더 전에 도서관에서 다른 시인과 함께 낭독회를 했고, 그때 사례비 대신 이 오두막에 며칠 동안 머물 수 있는 숙박권을 받았다고 했다. 그동안 일부러 산을 찾을 일은 한 번도 없었으므로 그의 숙박권은 유효한 채로 남아 있었다. 덕분에 지금 우리는 산에서 머문다. 산의 공기는 싸늘했고 투명한 햇빛은 피부에 차가운 화상을 남길 만큼 강렬했다. 오두막 맞은편 높은 산봉우리들은 눈에 덮였다. 흰 연기처럼 하늘로 솟구치는 구름들이 봉우리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추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두막 앞 나무 탁자에서 아침을 먹기로 했다. 눈 덮인 산봉우리들과 푸른 창공이 숨막히게 아름다웠으므로 시선을 떼고 싶지 않았다. 빵과 커피와 치즈가 전부인 식탁이었다. 식사가 끝난 뒤에도 나는 아침 식탁을 치우는 것을 뒤로 미룬 채 싱싱하고 맑은 공기와 햇빛 속에 더 오래 머물기를 원했다. 맞은편 설산의 봉우리들을 바라보는 일을 멈추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체룹은 홀로 산 아래 도서관으로 갔다. 어제 늦은 밤 도착했으므로 도서관장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체룹은 걸어서 도서관으로 내려갔다. 한 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우리는 자동차를 타고 오두막으로 왔지만 여기 머무는 동안은 도보 여행자처럼 지내기로 했다. 아니 사실은 포장되지 않은 가파른 산을 번번이 오르내리기에는 자동차가 너무 낡아서 혹시 도중에 아예 멈춰 설까봐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오두막에는 그동안 머물렀던 예술가들이 남겨놓은 방명록이 있었다. 지난밤 나는 잠자리에서 그 방명록을 읽었다. 한 일본인 음악가는 색연필로 주변 풍경을 몇 장이나 스케치해놓았다. 군데군데 출처를 알 수 없는 시와 인용문들이 있었다. 아마도 이 오두막의 거주자들은 산 위에서의 기나긴 밤 동안 방명록을 마치 일기처럼 작성했으리라는 인상을 받았다. 많은 이들이 여러 페이지에 걸쳐 홀로 보내는 산속 오두막 생활을 기록해놓았다. 직접 찍은 겨울 산의 풍경을 폴라로이드로 찍어 붙여놓은 거주자도 있었다. 그중 하나는 들판에 모여 있는 양떼들이었다. 검은 양치기 개를 가까이서 찍은 사진도 있었다. 우리 역시 방명록에 뭔가를 남겨놓아야 한다고 체룹이 말했다. 도서관은 방명록 한 권이 가득차면 그걸 도서관에 보관하여 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 한다고 했다. 그는 도서관에 들렀다가 도서관장과 점심을 먹고 책을 몇 권 빌릴 예정이라고 했다. 나를 위해서도 책을 찾아보겠다고 했다. 나는 가능하다면 산과 도보여행에 관한 책을 원했다. 혹은 이 고장 출신 작가들의 책이나. 당장 읽고 싶을 만큼 마음에 드는 책을 만난다면 아마도 그는 도서관에서 좀더 시간을 보낼 것이다. 도서관장과 이야기가 길어질 수도 있다고 했다. 나는 기다림에 익숙한 것만큼이나 홀로인 것에도 익숙하므로 상관없다고 대답했다. 산을 바라보며 커피를 한 잔 더 마시고, 사과와 크래커가 있으니 점심식사로 충분할 것이다. 그러고 나면 아마도 잠시 주변을 산책할 수도 있으리라. 나는 뮌헨을 떠나기 전 체룹의 들판용 장화를 차에 실었던 것이다. 햇빛은 살갗을 찌를 만큼 강한데다 바람은 얼음처럼 싸늘하므로 나는 오두막에 있는 흰 담요를 외투처럼 몸에 두르고 길을 나설 것이다. 

나는 신선한 샘물을 손으로 떠 마셨다. 들판의 꽃을 꺾어 작은 꽃다발을 만들었다. 어쩌면 말린 꽃잎으로 방명록을 장식할 수 있으리라. 나는 체룹의 들판용 장화를 신고 부드러운 들판을 천천히 걸었다. 나무 성상이 있는 농가로 다가갔다. 나무 성상을 가까이서 보기를 원했다. 그것은 습기로 인해 시커멓게 변색하고 뒤틀린,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였다. 농가 앞으로 난 길은 도보 여행자들의 경로였으나 나는 단 한 명의 여행자도 마주치지 않았다. 가까이서 보는 들판은 보랏빛과 갈색이 섞인 초록이었다. 작은 관목들과 희고 노란 꽃들이 별처럼 흩어져 있었다. 멀리 보이는 산들은 수목한계선 아래로 황금빛 숲을 이루었다. 그 위로 눈 쌓인 봉우리들이 파도처럼 겹겹이 펼쳐졌다. 드문드문 서 있는 작은 나무들은 아직 잎을 간직하고 있었고 거센 바람에 다들 몸을 비스듬하게 기울인 자세였다. 가까운 산들의 단단하고 새하얀 암석 위로 맞은편 산의 검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반면 멀리 뒤편의 눈 덮인 산들은 투명한 햇빛 속에서 흩어지는 안개처럼 윤곽이 흐릿한 흰빛이었다. 간혹 나는 고개를 돌려 산 아래로 향하는 도보 여행자들의 길을 내려다보았다. 체룹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이미 산을 내려갔고 아마도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그 길을 걸어 오두막으로 올라올 것이다, 우리가 오두막에서 읽을 책을 배낭을 넣고. 오두막의 냉장고에는 도서관장이 미리 넣어둔 약간의 식료품과 빵과 크래커, 차와 커피가 있었고 그것만으로 며칠 동안은 그럭저럭 버틸 수 있었다. 산에는 목가적인 풍경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일본인 음악가는 방명록에, 어느 날 산에서 한 도보 여행자가 높은 바위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당했다고 적어놓았다. 도보 여행자는 혼자였고 산에서 마주친 누군가가 그를 등뒤에서 밀었다고 했다. 범인이 누구였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다행히도 바위는 그리 높지 않은데다 아래는 부드러운 흙이 깔린 습지초원이어서 여행자는 생명을 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름을 이니셜로만 기록한 한 거주자는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읽다가 발견했다는 인용문을 남겼으나 출처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한 조각의 들판을 바라본다, 그 들판은 항상 변함없는 모습 그대로의 들판이었는데, 만약 그다음에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본 후 시선을 돌려 다시 들판을 보게 된다면, 들판에는 조금 전에는 보이지 않던 나비와 새가 날아다니게 된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이후에야 오두막으로 돌아온 체룹은, 도중 길을 잃고 헤매던 중에 우연히 양치기를 만났다고 말했다. 그는 오두막으로 올라오다가 지름길이라고 생각하고 도보 여행자들의 경로를 벗어난 샛길로 접어드는 바람에 산중턱에서 길을 잃고 말았다. 그의 눈앞에는 바위와 불탄 나무들, 붉은 열매가 열린 낮은 가시덤불이 끝없이 이어지는 낯선 석회암 지대가 펼쳐졌다. 온 길을 되짚어 다시 되돌아가려고 했으나 방향감각이 교란된 듯 방금 지나온 길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무작정 헤매다보면 같은 장소를 빙빙 돌거나 아예 엉뚱한 다른 방향으로 가버릴 위험도 있었다. 그래서 그는 어쨌든 오두막이 있는 산 위를 향해서 계속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길은 점점 바위투성이로 변했다. 어느 순간 바람이 거세지는 것을 느꼈고 구름이 빠르게 몰려왔다고 했다. 가파른 길은 계속 좁아지다가 마침내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빽빽한 가시덤불을 헤치며 걷던 그는 갈증이 나고 지쳤다. 한참을 힘겹게 헤매던 중 갑자기 낮은 관목들 사이 탁 트인 개활지가 나타났고 거기 모여 있는 양과 염소 떼와 마주쳤다고 했다. 양치기와 검은 양치기 개가 함께 있었다. 체룹을 발견한 양치기 개가 짖으면서 다가왔고 양치기는 짧은 피리 소리로 개들을 다시 불렀다. 작은 나뭇가지 혹은 뼈처럼 보이는 피리는 집게손가락 길이 정도로 짧고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가늘고 아주 높은 음을 냈는데, 그것은 해질 무렵 새의 비명처럼 들렸다고 했다. 양치기는 양털 가죽 외투에 나무껍질로 만든 모자를 썼고 기이한 모양의 지팡이를 들었다. 양치기의 등에 맨 배낭에는 어린 염소 한 마리가 들어 있었다고 했다. 배낭에서 고개를 내민 어린 염소는 지치지도 않고 계속해서 울음소리를 냈다. 양치기는 외투 주머니에서 손바닥처럼 납작한 빵을 꺼내 염소에게 먹였다. 체룹은 바위에 걸터앉아 있다가 양치기에게 다가가 길을 물었다. 양치기는 햇빛에 검게 그을린 얼굴에 말수가 적었고 산에서 오랫동안 홀로 지내서인지 그다지 사교적이지는 않았지만, 그에게 물과 납작한 빵을 나누어주기도 했고 오두막으로 가는 길을 가르쳐주었다고 했다. 
체룹을 기다리면서 나는 어젯밤 방명록에서 읽었던 사고 이야기를 떠올렸고, 그래서 갑작스러운 두려움에 엄습당했노라고 말했다. 구름이 몰려오던 순간 방명록의 기록이 생생한 그림처럼 떠올랐다고. 먹구름보다 짙은 공포가 마음을 뒤덮었고, 나는 절망과 간절함 속에서 그를 기다렸노라고. 들판을 걷고 있는데 등뒤에서 뻐꾸기가 울었다고. 두 마리의 매가 창공을 빠르게 빙빙 돌며 날았고 하늘의 절반은 여전히 푸르른 빛으로 반짝였지만 나머지 반은 청회색 짙은 구름으로 덮였다고. 바람이 얼음의 칼날처럼 내 얼굴을 후려쳤다고. 바람이 관목들을 뿌리째 찢어발기고 나무를 흔들었노라고. 그때 믿을 수 없지만 분명 어디선가 총소리가 들려왔다고. 아마도 내가 잘못 들었거나 혹은 뻐꾸기의 울음소리였을지도 모르지만, 아니면 멀리서 들려온 아주 짧은 천둥소리거나, 나는 순간 양손으로 귀를 막았다고 말했다. 지진이 일어난 듯 발밑이 흔들렸다. 분명히 그것을 느꼈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들판 한가운데 있었고, 조금 전까지 꽃들이 노랗게 반짝이던 들판은 갑자기 무서울 만큼 텅 비어 보였노라고. 산들은 날카로운 벼랑으로 변하고 번개를 그득 머금은 구름은 죽음의 낫을 휘두를 준비를 마친 상태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고. 나를 둘러싸고 있던 투명하고 푸른 허공이 갑자기 청회색 독을 뿜어내는 납과 금속으로 변했다고.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그가 영영 돌아오지 않을까봐 너무도 두려웠다고 나는 말했다. 그 두려움은 그가 돌아온 지금까지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고. 
하지만 산에서 날씨가 급변하는 건 드문 일이 아니라고 체룹이 대답했다. 번개가 치면 도보 여행자들의 길 가운데 우묵하게 패인 공간으로 들어가 누우면 된다고 했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자신은 오두막으로 오는 도중 구름이 몰려오는 것은 보았으나 천둥소리나 총소리는 물론 뻐꾸기 울음소리도 전혀 듣지 못했다고 했다. 게다가 이 지역의 지진은 매우 드물다, 하지만 뭔가가 다가온다면, 그게 무엇이든, 탁 트인 평평한 들판에서 벗어나 우묵한 공간으로 가서 누우면 된다고 했다. 그러면 둥근 황금빛 번개의 공은 나를 발견하지 못한 채 내 머리 위 허공을 둥실거리며 몇 번 회전하다가 그냥 스쳐지나가버릴 거라고. 그리고 만약 내가 들은 것이 정말로 총소리였다면, 그건 사냥꾼이 가까이 있다는 의미일 뿐이라고 체룹은 말했다. 
나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사냥꾼을 실제로 만나본 적이 없었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체룹은 순간 정색한 얼굴로 자신이 사냥꾼이라고 대답했다. (“말하는 걸 잊은 것 같은데, 내가 바로 사냥꾼이야.”) 그건 내가 전혀 몰랐던 일이었다. 하지만 곧 체룹은, 사실 거의 사냥꾼이 될 뻔했었다는 의미라고 고백했다. 그가 사냥꾼이 되고 싶었던 것은 정말이지만 최후의 순간에 포기해버렸다고. 대신 그의 형제가 사냥꾼이 되었다고 했다. 그런데 그의 형제는 화가이기도 했다. 그들은 마을도 없는 외딴 들판에 홀로 서 있는 농가에서 자랐고, 그런 농가에는 보통 한 명의 사냥꾼이 있기 마련이라고 했다. 숲 가장자리 밀밭의 사냥꾼 파수대를 지킬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여름에 풀들이 우거지면 어린 두 형제는 키보다 큰 쇠스랑을 높이 치켜들고 풀 사이를 지나갔다. 쇠스랑이 없다면 풀 베는 남자들이 형제를 발견하지 못하고 커다란 낫을 휘둘러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형제의 임무는 풀 베는 남자들을 앞서가면서 풀 사이에 웅크리고 숨어 있는 어린 노루를 미리 찾아내 쫓아내는 일이었다. 그러지 않으면 어린 노루들의 다리가 잘려나갈 테니 말이다. (“아아, 고향의 풀들이 얼마나 높이 자라는지 네가 안다면.”) 풀이 베어진 들판 위로 9월의 빛이 온다. 흰 거미줄과 같은 가을이 온다. 사냥꾼이 숲 가장자리 파수대 위에 앉아 있는 계절이다. 
하지만 내가 그의 고향에서 파수대 위에 앉아 있는 진짜 사냥꾼을 만날 일은 아마도 없을 거라고 체룹은 덧붙였다. 자신은 두 번 다시 고향의 들판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냥꾼 형제도 그걸 알게 될 것이다. 아마 예전부터 짐작하고는 있었겠지만 그의 편지가 그걸 더욱 확실히 해줄 것이다. 체룹은 어제 이른 아침 눈을 뜨자마자 책상으로 가서 사냥꾼 형제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고, 산으로 떠나오기 직전에 완성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우체국에 들러 편지를 부쳤다. 그건 형제에게 보내는 절교 편지였다고 체룹은 말했다. 그의 어머니인 M 부인은 얼마 전 요양원으로 갔고 낡은 농가를 꾸려나가는 일은 사냥꾼 형제가 알아서 할 것이다. 체룹은 어제 편지에 썼다, 자신은 두 번 다시 고향으로 가지 않을 것이다, 오래전 고향의 죽은 팔 습지에서 최초이자 최후로 노루를 죽인 뒤 그 피를 보면서 그렇게 결심했다고, 그는 편지에 썼다. 이제 산에서 내려가면 뮌헨으로 돌아가는 길에 고향 농가 인근 시내의 요양원에 들러 잠시 어머니를 만나겠지만, 그건 그가 어머니를 보는 마지막이 될 거라고, 그리고 죽기 전에는 두 번 다시 어머니를 만나러 가지 않겠다고, 그는 형제에게 썼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죽기 전에는 두 번 다시 형제나 누이를 보지 않을 것이라고, 죽기 전에는 두 번 다시 고향으로 가지 않을 것이라고 체룹은 형제에게 썼다고 말했다.

오후가 되자 해는 어느새 산을 향해 기울었고 금방이라도 산 뒤편으로 사라져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흰 담요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걸었다. 산들은 광채를 머금은 황금과 녹색에서 거무스름하게 그늘진 보랏빛으로 빠르게 변해갔다. 바람이 점점 거세게 불기 시작했고 키 작은 나무들은 거의 땅에 닿을 듯이 몸을 기울였다. 내 손에 쥐고 있던 꽃다발이 바람에 망가져버렸다. 움켜쥐고 있던 손바닥을 펼치자 여자의 옷자락 모양의 작은 이파리들이 죽은 채로 바람에 날려갔다. 나는 점점 어두워지는 하늘 한가운데 서 있었다. 짙은 구름이 빠른 속도로 창공을 채웠다. 나는 창공의 몸이었다. 체룹이 바위에서 추락하는 장면을 상상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산에서 낯선 사람을 만난다면 그에게 등을 보이지 말라고 마음속으로 외쳤다. 일본인 음악가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으나, 혹시 그 추락 사건의 범인은 양치기로 변장한 강도가 아니었을까. 지금껏 단 한 번도 체룹이 나를 앞서서 죽을 거라고는 생각해보지 못했다. 그걸 원하지 않았다. 뻐꾸기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뻐꾸기 울음소리를 세지 않기 위해 귀를 막았다. 뻐꾸기의 울음은 그걸 듣는 자에게 앞으로 남은 삶의 햇수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뻐꾹. 
한참 전부터 길을 벗어난 나는 바람이 휘몰아치는 축축한 들판 한가운데에 있었다. 들판용 장화뿐 아니라 검은 스커트와 흰 담요는 어느새 덩어리진 젖은 흙으로 엉망이 되었으나 나는 의식하지 못했다. 어디선가 매와 독수리가 나를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거대한 백악의 행성에 나는 홀로 있는 듯했다. 갑자기 나를 엄습하는, 잘못된 장소에 도달해버렸다는 느낌. 나는 찾아 헤매지 않은 채로 여기 도달해버렸다. 그러므로 내가 어디에 있든, 그것은 잘못된 장소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갑자기 번개처럼 머리에 떠오른 생각은, 나뿐만 아니라 체룹 역시 마찬가지로 잘못된 장소에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바로 지금, 바로 이 순간 잘못된 장소에. 체룹, 하고 나는 소리쳐 불렀으나 내 외침은 바람 속에 흩어져버렸고 어디에도 대답은 없었다. 나는 귀를 기울였다. 오직 바람뿐이었다. 오직 텅 빈 들판뿐이었다. 바람은 산과 산 사이를 무자비한 채찍처럼 휘몰아쳤다. 눈과 귀를 후벼파고 멀게 하는 바람이었다. 내 몸이 덜덜 떨렸다. 추위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어느 순간보다 더더욱 나는 혼자였다. 비틀거리며 오두막이 있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으나 반드시 오두막으로 가려는 의지가 있었던 건 아니다.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바람소리에 섞여 어디에선가 가늘고 높은 피리 소리가 들려오다가 사라졌다. 백조의 갈비뼈를 깎아 구멍을 뚫어 만든 피리에서나 날 법한 그런 소리였다. 멀리서 검은 개가 짖었다. 나는 이제 곧 들판 너머에서 검은 개가 나타나 나를 공격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들판 한가운데서 나는 여전히 혼자였다.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허리를 굽히고 고개를 숙인 채 다시 걷기 시작했다. 펄럭이는 흰 담요를 놓치지 않기 위해 미친듯이 움켜쥐었다. 나는 수목한계선 언저리 불구처럼 굳어진 나무였다. 첫번째 빗방울이 떨어졌다. 그때 검은 개가 나를 향해 달려오는 것을 느꼈다. 나는 개를 모르며, 한 번도 개와 함께 살아본 적이 없었다. 개가 덤벼들려고 하면 나는 돌을 던질 것이다. 나는 개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필요하다면 나는 나이프를 들고 주저 없이 개를 찌를 것이다. 그리고 내 허벅지 살 깊숙이 이빨을 박아 넣은 채 죽은 티벳 개 아눅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오두막에 도착한 후, 나는 영원한 허기를 달래기 위해 민들레 수프가 든 우묵한 접시에 숟가락을 담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