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회

그런데 왜 그들이 자기 것을 우리에게 나눠줘야 하지?

……그런데 왜 그들이 자기 것을 우리에게 나눠줘야 하지?

……우리는 왜 그들에게 그것을 달라고 요구해야 하지?

이런 것을 생각할 시간은 없다. 물감이 말라붙기 전에 나머지 글자를 마저 써야만 한다. 이미 쓸 문구들을 어림해두었다. ‘대책 없는 인공 강우제 살포 협박 멈춰라’ ‘살길 마련하고 쫓아내라’ ‘땅 사람 구름 사람 다 죽이는 인공 강우제 멈춰라’. 아빠가 오늘 공사장에서 나무판자와 각목 조각들을 주워다주기로 했다. 그것들로 피켓을 만들 것이다. 손잡이가 한 개인 것부터 두 사람이 맞잡아 들 수 있는 길쭉한 것까지, 다양한 모양으로. 혹시 천이 남으면 길고 얇게 잘라 머리띠를 만들어도 좋겠다. 모두가 이마에 하나씩 두를 수 있도록. 나는 언젠가 땅에서 보았던 데모 행렬을 떠올린다. 그들도 머리띠를 두르고 있었다. 거기엔 뭐라고 쓰여 있었나. 단결, 아니면 투쟁이었던 것 같은데. 나는 신이 나서 물감을 더 짠다. 끝이 뾰족한 빨간색, 파란색, 검은색 물감 무더기가 만들어진다. 아빠가 돌아오기 전까지 모두 완성할 생각이다. 그럼 보고 칭찬해줄 테니까. 도움이 되었다고, 신통하다고 말해줄 테니까. 나는 반으로 자른 페트병에 받아둔 물에다 붓을 헹구고 다시 심기일전한다.

그러는 동안 동생은 구석에 엎드려 있다. 그 좋아하는 휴대폰도 멀찍이 치워놓은 채, 절하는 사람처럼 엎어져서는 작은 엉덩이를 높이 치켜든 자세로. 아마도 뭔가를 그리는 중인 것 같다. 들여다보는가 싶더니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북북 잡아 찢는 소리도 난다. 그러더니 한참 후 스케치북을 들고 쭈뼛쭈뼛 다가온다. 그럴 줄 알았지. 나는 속으로 웃으며 고개를 든다.

나 그린 거 봐라.

뭔데?

동생이 스케치북을 내민다. 나는 좀 당황한다. 뭘 그렸는지 한눈에 알아차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게 뭐지? 꼭대기에 커다란 눈이 하나 달린 상자 같은 물건이 스케치북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다. 그 주변에 날아다니고 있는, 노란색과 연두색으로 칠해진 직사각형들은 아마도 지폐인 것 같다. 자세히 보니 지폐들은 그 상자의 머리처럼 보이는 곳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다.

이게 뭐야?

내가 갖고 싶은 거.

그래서, 그게 뭔데?

돈 나오는 로봇.

동생이 말하고 낄낄 웃는다. 나는 황당해서 헛웃음을 터뜨리며 그림을 다시 본다. 상자에 달린 여러 개의 로봇 팔은 각각 다른 물건들을 쥐고 있다. 과자, 휴대폰, 뼈에 붙은 고깃덩어리, 만화책, 그리고…… 분홍색 꽃무늬 옷을 입은 파마머리 여자. 나는 동생에게 그림을 돌려준다.

돈 나오는 기계 가져서 뭐 하게?

뭐든 하지.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싶은 게 뭔데?

몰라 일단, 국수 또 먹을래.

아까 거기서?

응. 아까 거기서. 뽑기도.

동생이 어린아이처럼 재잘거린다. 아니, 동생은 어린아이가 맞다. 정말로 어린애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쓰던 글씨에 다시 열중하는 척한다.

그럼 나 좀 도와라. 데모 잘되는 게 돈 버는 거니까.

뭐 하면 되는데?

음, 일단 물 좀 갈아와.

스케치북을 내려놓은 동생이 더러운 물이 든 페트병을 들고 집을 나간다. 나는 붓을 쥐고 다시 글씨를 쓰려고 하지만 왜인지 아까처럼 잘되지 않는다. 나는 나무로 된 자루 끝을 잘근잘근 씹는다. 데모 잘되는 게 돈 버는 거라는 말을 왜 했을까. 나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나. 모르겠다. 물론 땅 사람들이 우리 말을 들어주고 땅에 살 곳을 마련해준다면 좋은 일이다. 그런데 왠지 뭔가…… 옳지 않은 일처럼 느껴진다. 왜 우리의 살 곳을 정하는 일을 생판 모르는 남이 베푸는 선의에 맡겨야 하는 걸까. 모두가 그걸 바라고 모여 목소리를 높인다는 건 아무래도 이상한 일이다. 누구도 누구에게 선의를 베풀지 않는 이곳에서는 더더욱.

동생은 맑은 물이 든 페트병을 들고 금세 돌아온다. 나는 페트병에 붓을 꽂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야, 배 안 고프냐?

고파.

오늘 저녁엔 맛있는 거 먹자.

아빠는?

알아서 먹고 오겠지. 뭐 먹을래? 치킨? 햄버거? 피자?

신이 나서 달려들 거라고 생각했는데, 눈이 동그래진 동생은 쭈뼛거리며 대답이 없다. 나는 펼쳐뒀던 물감을 한쪽으로 치우며 동생의 기색을 살핀다.

야, 나 돈 많아.

진짜? 얼마 있는데?

이 새끼가. 너 치킨 한 마리 먹일 돈은 있어.

한 대 쥐어박을 것처럼 팔을 들어올리자 동생은 몸을 움츠리며 히죽히죽 웃는다. 나는 벗어뒀던 옷을 집어들고 팔을 꿴다. 뭘 먹을까. 뭐든 좋겠다. 한 그릇에 사천원 하는 잔치국수 따위보다 더 맛있는 걸 먹을 것이다. 우리가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것. 큰마음을 먹어야, 아니 큰마음을 먹어도 쉽게 먹지는 못하는 것. 어디 가서 배불리 먹었다고 자랑할 수 있는 것. 어린애에게 물감과 붓을 쥐여주고 먹고 싶은 걸 그려보라 시키면 제일 먼저 그리기 시작할 그런 것을.

얼굴에 그 물감부터 좀 지워라. 그러고 갈 거야?

아 참.

동생이 양손으로 얼굴을 문지른다. 새빨간 물감 가루가 떨어져 내린다. 마른 피처럼. 단결, 투쟁. 신이 나서 집을 박차고 달려나가는 동생의 바지 주머니가 아직도 불룩하다. 나는 동생을 따라 나가며 나도 모르게 흥얼거린다. 단결, 투쟁. 단결, 투쟁.

 

 

30

 

데모는 아침 아홉시. 그러나 우리집 앞에 대여섯 명의 남자들이 모인 것은 전날 밤부터다. 아빠와 뒷집 아저씨, 그리고 낯익은 몇몇 동네 아저씨들. 나는 방안에 길게 누워 창문으로 새어 들어오는 그들의 목소리를 듣는다.

확성기는?

준비됐어. 스피커도 준비됐고.

스피커는 내일 저녁에 반납해야 돼.

아무튼 쪽수가 너무 적어. 다 합치면 몇이지?

애엄마들까지 긁어모으면 스물 둘인가 셋.

젊은 애들은 오기로 된 거 맞지?

춘 여사네 첫째 녀석이 모아 올 거야.

그놈을 믿어? 싹수가 노랗던데.

안 오면 안 오는 대로 해야지 무어.

칙, 라이터가 켜지는 소리. 커어억 퉤, 폐 속에 고인 가래를 끌어올려 뱉어내는 소리. 뒤이어 창문 틈으로 스며들어오는 매큼한 담배 연기도 하나의 소리다. 나는 또렷한 정신으로 어둠 속에 누워 귀로 냄새를 맡는다. 바깥의 사람들이 내 기척을 느끼지 못하도록 조심히 돌아눕는다.

이제 날이 밝으면 정말로 그 일이 일어날 것이다. 이미 모든 준비가 끝났다. 목표는 심플하다. 인공 강우제를 살포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는 것, 꼭 살포해야겠다면 그전에 땅 어딘가에 우리가 살 곳을 마련해달라는 것.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내일도, 모레도 반복할 것이다. 모두가 납득할 만한 해결책이 제시될 때까지 싸울 것이다. 투쟁. 나는 어둠 속에서 조용히 그 단어를 발음해본다. 둥글게 모였다 힘없이 벌어지는 입술. 나는 새우처럼 웅크린 채로 방 한구석을 바라본다. 내일 아침 사용할 물건들이 쌓여 있다. 어디서 빌려 왔는지 모를 커다란 스피커, 확성기와 마이크, 그리고 내가 정성껏 만든 피켓들. 창문을 뚫고 들어온 달빛이 조명처럼 그것들을 비춘다. 샛노란 빛 아래 드러난 그 물건들은 어쩐지 허접하고 보잘것없어 보인다. 저런 것으로 이길 수 있을까. 우리와 생각이 다른 누군가를 납득시킬 수 있을까.

원은 지금 잠들어 있을까.

나는 양팔로 내 몸을 끌어안는다. 원을 생각하면 가슴속에서 무언가 허물어지는 것만 같다. 내 옷 속으로 밀어넣던 차가운 손, 돌아서서 뛰어가는 내 볼을 칼날처럼 스치던 머리카락. 그날 이후로 원과 단둘이 만난 적은 없다. 다른 어른들과 함께 있을 때 잠깐 얼굴을 본 것이 전부다. 우리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비스듬히 서로를 쳐다보았다. 얼굴 한번 붉히지 않고. 그것은 구름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원은 어른들에게 데모에 참여하겠다고 말했다. 다 같이 좋자고 하는 일이니까요, 그렇죠? 비꼬는 투였지만 어른들은 눈썹을 찡그릴 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 말이 뜻하는 바를 잘 안다. 원은 나에게서 대가를 받아내고자 할 것이다.

그리고 그건 아무것도 아닌 일이다.

정말로 아무것도.

어둠 속에서, 나는 무릎을 세워 다리를 벌린다. 팬티 속에 오른손을 집어넣고 가운뎃손가락에 힘을 주어 뻑뻑한 질 안에 그대로 밀어넣는다. 입구쯤에서 느껴지는 약간의 따가움, 그리고 불쾌한 이물감 외에는 아무 느낌도 없다. 손을 닦았어야 했나 생각하지만 이미 늦었다. 손가락을 조금씩 앞뒤로 움직여본다. 여전히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겁을 먹고 너무 얕게 집어넣어서 그런가. 그러나 손가락을 조금 더 깊이 밀어넣어보아도, 아무런 느낌이 없다.

그 순간 나는 마음속에서 어떤 감정 하나를 발견한다. 그것은 증오다.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눈을 부릅뜬다. 천장을 노려보며 손가락을 움직인다.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증오는 몸집을 불려 마침내 내 몸보다, 이 집보다, 구름보다 커진다. 나는 아주 미운 누군가의 눈알을 후벼내려는 사람처럼 질을 힘껏 쑤신다. 그러면서 원이 내게 이 짓을 하는 모습을 수백 번 상상한다. 옷을 홀라당 벗고 있겠지. 돼지처럼 땀을 흘리겠지. 거뭇거뭇 때가 묻은 앙상하고 큰 손을 내 목 양옆에 받쳐놓은 채로 평생 들어보지 못한 소리를 내겠지. 생각만으로도 당장에 죽여버리고 싶어진다. 정말로 죽일 수 있을 것 같다. 어렵지 않은 일이다. 상상 속에서, 나는 내 몸 위에 엎드린 원의 핏줄 선 목에 칼을 꽂는다.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는 피를 온 얼굴로 맞는다.

빼낸 손가락은 젖어 있다. 어둠 속이라 무슨 색의 액체인지는 보이지 않지만 시큼 달큼한 냄새가 난다. 나는 손가락을 코밑에 갖다대고 킁킁거리다 이불에 슥 닦아내어버린다.

바깥에서는 여전히 두런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른들이 뿜어낸 담배 연기가 유령처럼 집안을 맴돌다 잠든 동생의 얼굴로 내려앉는다. 나는 손을 휘저어 유령을 쫓아낸다. 지금 이 순간 무엇도 나를 행복하게 해줄 수 없을 거라고 확신하면서. 세상은 불행하고 나쁜 것으로만 가득차 있다. 구름도 땅도 마찬가지다. 세상 끝에서 끝까지 걸어가도 기쁨은 마주칠 수 없을 거다. 단 한 조각도.

나는 등을 둥글게 구부리고 몸을 웅크린다. 잠을 자두는 게 좋을 것이다. 내일은 피곤할 테니까. 아랫배 깊은 곳에서 뭉근한 통증이 느껴지는 것도 같다. 하지만 이런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다.

 

 

31

 

마지막 사람까지 모두 내려온 뒤, 아빠는 모여 선 사람들의 얼굴을 일일이 확인하며 수를 센다. 나와 아빠까지 합해 스물세 명. 나는 그들에게 피켓과 머리띠를 하나씩 나누어준다. 대열 끝에 삐딱하게 서서 저들끼리 뭔가를 속닥거리고 있는 원과 그의 친구들에게도. 받아든 사람들은 어색한 동작으로 이마에 띠를 맨다. 모두 잘 알고 있다, ‘투쟁’이라는 글자가 앞으로 가도록 매야 한다는 것 정도는. 나는 아빠에게 허리를 숙이라고 손짓한 뒤 머리에 띠를 둘러 묶어준다.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아빠의 이마는 벌써 땀에 젖어 있다.

자, 오늘 힘들 텐데 다들 기운 냅시다. 더우면 바로바로 물들 마시고, 지치지들 말고.

아빠가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한다.

그럼 생수라도 한 병씩 나눠주든가.

대열 끄트머리에서 누군가가 다 들리도록 중얼거린다. 그게 누구 목소린지는 보지 않아도 알 것 같다. 아빠는 못 들은 척 걸어가 대열의 맨 앞에 선다. 내가 아빠의 옆에 서는 것을 신호로 우리는 걷기 시작한다. 시청까지는 걸어서 한 시간 정도. 일부러 사람이 많은 큰길로만 갈 것이다. 한 명이라도 더 많은 땅 사람이 우리를 볼 수 있도록. 나는 고개를 똑바로 들고 걷는다. 두려울 것은 하나도 없다. 창피할 것도 없다. 익숙한 골목을 지나친다. 왼발 앞에 오른발, 오른발 앞에 왼발. 날씨는 매우 좋음. 구루마에 실린 스피커가 덜그럭덜그럭 소리 내며 뒤따라온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양쪽으로 가게가 늘어서 있는 번화가가 나타난다. 출근하는 사람들이 바쁘게 걸어가고 있다. 우리는 그 인파 사이로 행진한다. 사람들이 우리를 흘긋거린다. 어깨 너머로 돌아보는 사람들도 있다. 이곳에 집을 가진 사람들. 안정된 일자리를 가진 사람들. 우리를 마음대로 쳐다볼 수 있는 사람들.

계속 걸어라. 앞에서 밀리면 뒤에서도 밀려.

아빠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나는 내 발걸음이 느려졌다는 것을 깨닫는다. 대답 대신 피켓을 똑바로 고쳐 쥔다. 왼발 앞에 오른발, 오른발 앞에 왼발.

갑자기 내 앞에 새빨간 것이 휙 나타난 것은 일이십 분 정도 더 걸었을 때다. 나는 깜짝 놀라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우뚝 서서 그것을 바라본다. 작은 노인이다. 허리가 꼬부라졌고 이 더위에도 새빨간 비닐 점퍼를 입었다. 그 노인은 무슨 할말이 있는 것처럼 우리를 빤히 노려보더니, 피켓에 쓰인 글자들을 골똘히 읽는다. 그러고는 뒤늦게 그 뜻을 이해했다는 듯이 별안간 소리친다.

아주, 이, 아주 도둑놈의 새끼들이야!

무심히 지나던 행인들이 깜짝 놀라며 발걸음을 멈춘다. 뒤따라오던 행렬도 일제히 멈춰 서서는 뭐야, 무슨 일이야, 하며 고개를 빼꼼 내밀고 앞을 살핀다.

비키세요.

아빠가 말하지만 노인은 아랑곳 않고 다시 한번 외친다.

이, 이 도둑놈의 새끼들! 싸그리 불태워 죽여도 모자랄 놈들!

노인은 침을 튀기며 손가락질한다. 마치 우리가 방금 노인의 호주머니를 털다가 들키기라도 한 것처럼. 아빠는 입을 꾹 다물고 노인을 노려본다.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는 것 같다.

아빠, 그냥 가요.

나는 다시 걷는다. 이런 것은 상대해주면 더욱 기세가 등등해질 뿐이다. 아빠가 따라오고, 행렬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노인은 꽥꽥 소리를 지른다. 도둑놈의 새끼들, 아주 빨갱이 같은 새끼들, 거지새끼들. 발걸음을 빨리하자 목소리는 점점 멀어진다. 나는 마음속으로 노인의 말을 곱씹어본다. 도둑놈의 새끼들, 이건 틀렸다. 아무것도 훔치지 않았으니까. 빨갱이 같은 새끼들, 이것도 틀렸다. 빨갱이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지만 거지새끼들, 이건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세 개 중 한 개만 맞았으므로 탈락. 탈락이다.

계속 걷는다.

백화점 앞을 지나고 지하철역을 지난다. 막 짜낸 과일 주스를 파는 노점을 지나고 휴대폰 케이스와 열쇠고리를 파는 좌판을 지난다. 머리띠에 땀이 배어드는 것이 느껴진다. 덥구나. 기계적으로 다리를 움직이며 나는 뒤를 돌아본다. 행렬은 중간중간 끊기긴 했지만 잘 따라오고 있다. 아빠는 한 번도 두리번거리지 않은 채 그저 묵묵히 걷고만 있다. 여기는 와본 적이 없는 곳인데. 아빠는 길을 알고 가는 걸까. 이 길이 시청으로 가는 길이 맞기는 할까. 나는 문득 이상한 상상을 하기 시작한다. 사실 아빠가 길을 모르는 거라면. 우리가 시청으로 가고 있는 게 아니라면. 가도 가도 시청은 나타나지 않고, 이렇게 더위와 목마름에 지친 채 피켓을 들고 걷는 것만이 우리 삶에 남은 유일한 할일이라면. 그리고 아빠는 사실 그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거라면. 나는 아빠의 옆얼굴을 바라본다. 그게 아니라고 말해주길 바라면서. 그때 아빠가 발걸음을 멈춘다. 다음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몸서리를 친다. 아빠의 얼굴에 순식간에 놀람과 절망이 차오르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저건……

나는 길 건너편, 아빠의 시선이 향한 곳을 바라본다. 처음에 나는 내가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건지 이해하지 못한다. 거기 있는 것은 서로 바짝 붙어 주차된, ‘경찰’이라고 적힌 커다란 흰색 버스 여러 대가 전부였으니까. 아빠는 들고 있던 피켓을 내게 쥐여주고는 길을 건너 그쪽으로 다가간다. 재빨리 따라붙는데, 그때 버스 한 대에서 젊은 남자 경찰이 불쑥 튀어나온다.

시위 오셨습니까?

아빠는 눈에 적의를 담은 채 말없이 경찰의 눈을 바라본다. 단추가 여러 개 달린 남색 셔츠를 입은 그는 원과 비슷한 또래처럼 보인다. 나는 아빠가 그 경찰에게 왜 그렇게 화가 나 있는지를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어떤 잘못도 하지 않았고 경찰 역시 그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는 아빠의 행색을 흘긋 보더니, 고개를 비틀어 아직 길을 건너오지 않은 우리 행렬을 살펴본다.

이쪽으로 오십쇼. 그 뒤에 분들도 다 오세요.

남자가 어딘가에 무전을 한 뒤 따라오라고 손짓하며 앞서 걷는다. 사람들이 아기 오리떼처럼 줄줄이 길을 건너 우리를 따라잡는다. 남자는 주차된 버스와 버스 사이, 사람 둘쯤이 겨우 지나갈 수 있을 만한 틈으로 우리를 들여보낸다.

버스 너머는 시청 광장이다.

저 멀리 서 있는 것은 태어나서 처음 보는 크기의 회색 건물이다. 뒤쪽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시청 건물은 구름이 통째로 들어갈 수 있을 만큼 거대해 보인다. 그 앞에 광장이, 우리가 찾던 그 광장이 펼쳐져 있다. 우리는 순식간에 광장의 아름다움에 압도당한다. 푸르고 맑은 여름 하늘을 배경으로, 탁 트인 광장은 도심 한가운데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넓고 깨끗하다. 바닥엔 흰 돌과 잔디가 번갈아 깔렸고 일정한 간격마다 커다란 화분이 하나씩 놓였다. 그 안엔 생전 보지도 못한 형형색색의 꽃들이 가득 심겨 있다. 바닥의 분수대에서 리듬에 맞춰 물줄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이 보인다. 곳곳에 있는 벤치에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앉아 있다. 아이를 데리고 있는 사람, 뭔가를 마시고 있는 사람,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 우리는 경찰이 이끄는 대로 그 사람들 앞을 지나친다. 그들은 우리에게 전혀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순간 우리 모두는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고 나는 짐작한다. 땀투성이에 잔뜩 지쳐 어깨가 수그러든 우리가 이곳에 정말로 끔찍하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이 아름다운 장소에서 우리의 목숨과 권리에 대해 외치는 것은 어쩐지 부당한 것 같다는 생각을. 그렇다, 이것은 옳지 않게 느껴진다.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았는데 벌써 악당이 된 것 같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느릿느릿 따라가는 사이 앞서 걷던 경찰은 어느새 광장을 거의 다 가로질렀다. 어디로 가는 거지, 생각하는데 멀찍이 다른 경찰들이 잔뜩 모여 있는 것이 보인다. 그들은 캠프파이어라도 하듯 어깨를 맞붙이고 둥글게 서 있다. 다른 점은 바깥쪽을 보고 있다는 것.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이어, 그들이 들고 있는 길쭉하고 검은 물건이 눈에 들어온다. 나는 처음에 그것이 땡볕을 막기 위한 도구인가 짐작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니 그게 얼마나 우스운 생각이었는지를 깨닫는다. 그건 방패다. 막기보다는 때리기에 더 적합해 보이는, 여차하면 누군가의 머리를 내려찍을 수도 있을 것처럼 보이는 방패. 우리를 보자 그들이 조금 물러나 길을 터준다.

자, 이리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우리는 영문을 모른 채 시키는 대로 경찰들이 내어준 틈으로 줄지어 들어간다. 행렬 맨 마지막 사람이 스피커가 든 구루마를 끌고 들어오자마자 경찰들은 다시 틈새를 좁힌다. 천천히, 나는 주변을 둘러본다. 사방 어디를 보아도 단단히 돌아선 경찰들의 등밖에 보이지 않는다.

집회 신고 하신 대표자이신가요?

우리를 데리고 온 경찰이 아빠에게 묻는다. 아빠는 대답 없이 그를 노려보지만 경찰은 아랑곳 않고 말한다.

아홉시부터 열두시까지 신고하셨죠? 지금부터 진행하시면 됩니다. 교통 방해나 신고지 이탈을 하시면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처벌받을 수 있고요. 돌발 상황 발생시 저희가 진압에 나설 수 있다는 점 미리 말씀드립니다.

돌발 상황이요?

내가 아빠 대신 묻는다.

예, 뭐 일정 데시벨 이상 소음을 내신다든가, 저희한테 폭력을 행사하신다든가 하면 말이죠. 아무튼 집회 신고서에 적으신 거 외에 다른 행동을 하시면 안 됩니다.

마치 우리가 그럴 작정이라는 걸 미리 알고 있다는 듯한 말투다. 나는 돌아서서 행렬을 본다. 사람들은 불만스러운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중이다. 어쩔 수 없다. 여기서 시작할 수밖에. 구루마를 끌고 온 이웃 아저씨 둘이 스피커를 내린다. 사람들은 땡볕에서 오래 걸은 탓에 모두 지쳐 있다. 둘씩 짝지어 줄을 맞춰 서는가 싶더니 아이고, 소리를 내며 누군가 주저앉는 것을 시작으로 결국 다들 바닥에 털썩 앉아버린다. 그러고는 자, 이제 뭘 하면 되는지 읊어봐, 하는 눈빛으로 우리를 올려다본다. 서 있는 것은 나와 아빠뿐이다.

아빠, 시작해요.

나는 아빠를 재촉한다. 우리를 안내해준 경찰은 이미 어딘가로 가버렸지만, 아빠는 아직도 허공만 노려보며 서 있다. 무언가 골똘하게 생각하는 얼굴로. 아빠의 꽉 다물린 입술을 바라보다 나는 문득 그가 불쌍하다고 생각한다. 아직도 세상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돌아가게 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니, 아직도 어그러질 기대가 남아 있었다니. 그것은 슬픔을 넘어 조금 우스꽝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 마음을 떨쳐내려 나는 고개를 돌리고 아빠 대신 행렬 뒤쪽을 향해 말한다.

스피커 연결해주세요.

스피커 옆에 쭈그려앉아 있던 아저씨들이 아 참 그렇지, 하는 얼굴로 둘둘 말린 발전기의 코드 선을 풀기 시작한다. 곧 스피커가 켜짐과 동시에 삐익, 하는 노이즈가 잠시 동안 모두의 귀를 멀게 한다. 우리는 동시에 얼굴을 찡그리지만 돌아서 있는 경찰들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이윽고 스피커에 연결된 마이크가 내 손에 쥐어진다.

나눠드린 구호 있지요. 저랑 아빠가 선창하면 큰 소리로 따라 외쳐주세요.

누구도 대답하지 않는다. 나는 마이크를 잠시 살펴보는 척하며 심호흡을 한다. 몸통의 검은 코팅이 조금씩 벗겨져 있다. 어디서 빌려온 누구의 것일까. 아니, 그런 것을 생각할 시간은 없다. 이제 투쟁을 외쳐야 할 때다. 나는 아랫배에 힘을 딱 준다.

……땅 사람 구름 사람 다 죽이는 인공 강우제 살포 멈춰라아!

생각보다 큰 소리에 나는 지레 놀란다. 태어나서 이렇게 큰 소리를 내본 건 처음이다. 더군다나 이런 광장 한복판에서. 가슴이 활랑거린다. 바닥에 쭈그려앉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인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올려다보고 있다. 원과 그의 친구들마저 입을 딱 벌린 채다. 아무도 나를 따라 외치지는 않는다. 멈춰라, 멈춰라 하고 후창을 해주기로 했는데. 분명 그렇게 약속이 되어 있었는데. 나는 다시 한번 외친다.

……살길 마련하고 쫓아내라, 구름 사람들 다 죽는다아!

이번에는 산발적이고 힘없는 후창이 따른다. 다 죽는다, 다 죽는다. 정말로 다 죽기 직전의 사람들처럼 맥아리가 하나도 없지만 나는 그런 대로 만족한다. 힐끗 아빠를 바라보는데, 아빠는 나를 보고 있지 않다. 나는 조금 화가 난다.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진 않지만 어쨌든 아빠를 따라서 시작한 일인데.

아빠, 아빠도 좀 해요.

나는 아빠의 옷깃을 잡아당긴다. 아빠가 말한다.

뭘 하라는 거야.

뭐라고요?

나는 어이가 없어 마이크를 쥐고 있다는 것도 잊고 아빠를 빤히 쳐다본다. 아빠가 마이크를 신경질적으로 뺏어 들더니 전원을 꺼버린다.

넌 보이지도 않냐.

뭐가요?

봐라. 주변을 좀 보라고.

아빠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으로 눈을 돌렸으나 보이는 것은 돌아선 경찰들의 등뿐이다.

뭘 보라는 거예요?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그래, 아무것도 안 보이지. 아무것도 안 보인다고.

나는 그제야 아빠의 말을 이해한다. 사방에 둘러싼 경찰들 때문에 바깥에서는 우리가 전혀 보이지 않을 것이다. 나는 까치발을 들고 경찰의 어깨 너머를 본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다. 우리의 목소리를 들어야 할 사람들은 저 건너편, 분수와 화분과 잘 전정된 나무들과 함께 있다. 이쪽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상태로. 이들은 우리를 감시하는 동시에 감추고 있다. 완전히 무력화시키고 있다. 상자 안에 잡아 가둬놓은 쥐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