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회

꿈 같은 몇 시간이 흐른 뒤

꿈 같은 몇 시간이 흐른 뒤, 네일 숍을 나서는 나는 이전과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

열 손톱 모두가 아름답게 빛난다. 주변의 지저분한 살을 깨끗하게 도려내고 손톱을 아몬드 모양으로 다듬은 뒤 색을 칠했다. 그냥 칠한 것이 아니라 무슨 뜨거운 기계에 집어넣었다 뺐다 하면서 공을 들인 덕분에 마치 가마에 구워낸 도자기처럼 단단하고 매끈하다. 그 위에 보석도 붙였다. 하나에 만원씩 하는 스와…… 뭐라고 하는 것을 다섯 개나. 나는 자꾸만 눈앞에서 손가락을 움직여본다. 손끝의 각도에 따라 빛이 휘황찬란하게 번쩍인다. 돈이 전혀 아깝지 않다.

하지만 좋은 것은 그 아름다움뿐만이 아니다. 양손을 힘없이 내맡기고 거기에 앉아 있었던 시간, 이 분야의 전문가가 오직 내 손톱을 예쁘게 꾸미고 다듬는 것에만 집중하도록 손을 내어주었던 것. 그것이 정말로 좋았다. 작은 도구들이 손끝을 간질이던 감각과 뜨거운 물수건으로 손을 덮을 때의 온기, 향긋한 핸드크림이 발려지던 순간의 기분, 그 모든 것들이 좋다는 말로는 부족할 만큼 좋았다. 심지어는 느긋하게 대화까지 나누었다. 이 근처 사세요? 학생이세요? 손이 거치신데 핸드크림을 자주 바르세요. 물론 내 대답은 전부 거짓말이었지만, 좋은 핸드크림을 하나 사야겠다는 다짐만은 정말로 하게 됐다. 그런 것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 기분이 좋을 것이다.

나는 한껏 들뜬 채로, 이 기분을 망치지 않기 위해 정신을 바짝 차린다.

아빠나 동생에게 보여줄 수는 없다. 구체적인 금액까지야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게 매우 비싼 거라는 사실은 금세 알아챌 테니까. 돈이 어디서 났느냐고 꼬치꼬치 캐물으며 기분을 잡칠 게 틀림없다. 그들은 이게 얼마나 예쁜지 모른다. 이 절대적인 예쁨 앞에 돈 따위는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 사람들에게 보여줘봤자 소용없는 노릇이다. 원도 마찬가지다. 돈이 썩어나서 그딴 곳에 쓰냐며 면박이나 줄 테지.

결국 내가 택한 사람은 춘 여사다. 구름을 올라온 뒤, 나는 춘 여사에게 인사 대신 손을 쫙 펴서 내보인다. 고깃집에서 본 그 여자처럼. 춘 여사의 표정이 단번에 밝아진다.

어머! 예쁘기도 해라, 이게 뭐야?

네일 아트 받았어요. 아빠나 원한텐 비밀.

나는 춘 여사가 만져볼 수 있도록 앉아 있는 그의 얼굴 가까이 손을 들이민다.

정말 예쁘네. 어디서 했어?

일하는 데 근처에서요.

너무 잘했네. 그럼, 젊은 아가씨 손이 이래야지.

춘 여사가 목소리를 높여 호들갑을 떤다. 그의 무거운 엉덩이가 의자 위에서 들썩거린다. 나는 당연하다는 듯 미소 짓는다. 이게 내가 원했던 반응이다. 나는 춘 여사의 눈 속에서 내 손톱 위 보석이 반짝거리는 것을 본다. 그리고 동시에, 마음속에서 기쁨이 조금씩 스러지는 것을 느낀다. 춘 여사는 내 나이 때 이런 손톱을 가져보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앞으로도 마찬가지겠지. 내 손을 쓰다듬는 춘 여사의 손은 거칠고 쪼글쪼글하다. 낯설지 않은 그 촉감이 내 마음을 아프게 한다. 나는 미소를 잃지 않은 채 가만히 손을 잡아 뺀다.

그럼, 들어갈게요.

그래, 잘 가.

내 허리께를 툭툭 두드리는 춘 여사에게 고개를 끄덕인 뒤 나는 집을 향해 걷기 시작한다. 엄지에 붙은 보석을 검지 손가락 끝으로 비비자 가장자리의 날카로운 면이 만져진다. 꾹꾹 누른 뒤, 손끝에 그어진 자국을 아랫입술에 대고 문질러본다. 거칠다. 얄팍하구나, 모든 것이. 그렇게 생각하자 정말로 텅 빈 껍데기가 된 것만 같다. 내가 느끼는 모든 감정은 지나치게 가변적이다. 사춘기인가,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주제에. 나는 이유 없이 비어져나오는 눈물을 아무렇지 않은 척 참아낸다.

 

 

27

 

늦은 밤 누군가 집 문을 두드린다.

형님, 계신가?

걸걸한 목소리다. 자려고 누워 있던 나와 동생은 깜짝 놀라 서로 눈만 마주본다. 아빠가 부스스 일어난다. 문을 여니 건장한 남자의 실루엣이 드러나며 담배 냄새가 집안으로 확 끼쳐든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어둠 속을 노려본다. 뒷집 아저씨인 것 같다.

이 밤에 어쩐 일이야.

얘기 좀 하러 왔지.

이 시간에?

형님이 워낙 바쁘시잖아. 낮에는 볼 수가 있어야지.

아빠는 곤란한 듯 망설이다 집을 나간다. 터벅터벅 걷는 두 남자의 발소리가 멀어진다. 무슨 얘기인가를 주고받는 것 같은데 들리지는 않는다. 나는 귀를 기울이려다 포기한다.

뒷집 아저씨 맞지?

응. 요즘 둘이 자주 만나더라.

둘이?

응.

별일이네, 하고 나는 돌아눕는다. 그때 문득 불길한 예감이 든다. 뭔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듯한,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 이 잊음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될 것만 같은 그런 느낌. 나는 누운 채로 곰곰 기억을 곱씹다가 생각해낸다. 예전에 시장이 구름 위에 온다고 했었던 날, 아빠를 향해 쏟아지던 박수 소리를. 아빠가 대표로 나서겠다고 했을 때 아빠를 부추기던 사람이 분명 뒷집 아저씨였다. 저 아저씨는 어떤 사람이더라. 오랫동안 가까이 붙어 살았지만 제대로 대화를 나눠본 적은 없다. 덩치가 크고 목소리가 굵은 데 비해 하는 짓이 쪼잔하다고 생각한 적이 몇 번 있을 뿐이다. 그래, 예를 들면 이런 일. 아주 어렸을 때 어디서 고무공을 하나 얻어온 적이 있었다. 그것을 집 옆의 빈 벽에다 던지고 받으며 놀기를 좋아했는데 하루는 그 아저씨가 나와서 시끄러우니 다른 곳에 가서 놀라고 했다. 그러고도 몇 번을 더 공을 던지며 놀다가 어느 날 와보니 내가 놀던 자리에 깨진 소주병 조각이 흩뿌려져 있었다. 누가 보아도 일부러 뿌려놓은 모양새였다. 햇빛에 무심하고 찬란하게 빛나고 있던 초록빛 유리 파편들. 그걸 내려다보며 참으로 속 좁고 못된 인간이구나, 어린 나이에도 그렇게 생각했고 그뒤로 그를 보아도 인사를 하지 않았다. 다만 그 아저씨는 평소 우리 아빠를 형님이라고 부르며 깍듯이 대했는데 그건 아마 두 사람이 같은 인력사무소에 다니며 종종 마주치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래도 친하게 지내는 것 같지는 않았는데, 요즘 들어 자주 만난다니 이유가 뭘까. 나는 베개 밑에 팔을 괴고 생각한다.

데모 때문일까.

그러고 보니 인공 강우제는 어떻게 되었나. 할아버지가 죽고 엄마가 도망가는 동안 그것에 대해선 까맣게 잊고 있었다. 항상 그래왔듯 이번에도 뿌린다는 말만 요란했지 실제로는 아무 일도 없을 것 같기는 하다. 그 증거로, 우리 모두가 아직 구름 위에 있으니까. 아무렴 그게 그렇게 쉬울까.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을 간단히 없애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그냥 데모고 뭐고 하지 말고 이대로 버티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며 까무룩 잠에 빠져들려는 차에 동생이 말한다.

누나.

왜.

또 나쁜 일이 일어나?

뭐라고?

나는 돌아누워 동생 쪽을 본다. 어둠에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이쪽을 보고 누웠는지 저쪽을 보고 누웠는지조차 알 수 없다.

그게 무슨 말이야.

자꾸 나쁜 일만 일어나잖아.

야, 그게 인생이야.

농담조로 피식 웃으며 대꾸한 나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것을 보고 뒤늦게 후회한다. 이불을 뒤집어쓴 동생의 형체 위로 죽음 같은 침묵이 드리워져 있다.

걱정 마, 아빠 곧 들어오실 거야.

……이게 인생이면, 난……

내가 벌떡 일어나 동생의 입을 막으려는 찰나, 바깥에서 발소리가 나더니 문이 벌컥 열린다. 누가 시킨 것처럼 나와 동생은 동시에 눈을 감고 자는 척을 시작한다. 쿵쿵거리며 들어온 아빠는 짜증이 나 있는 듯한 기색이다. 어둠 속에서 옷을 벗어 방구석에 던지더니 그대로 자리에 누워버린다. 아빠가 입속에서 내는 쯧, 하는 소리가 들린다. 기분이 나쁠 때 내는 소리다. 저 소리를 들으면 왠지 모르게 심장이 벌렁거리고 귀가 홧홧해진다. 저지르지도 않은 끔찍한 잘못을 들키기 직전인 것만 같은 기분. 아마 저쪽에 누운 동생도 똑같이 벌렁대는 심장과 뜨거워진 귀를 가지고 웅크려 있을 것이 틀림없다. 무슨 얘기를 하고 왔길래 저럴까. 나는 눈을 감고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쓴다. 아직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직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

그리고 나는 별안간 꿈에 떨어진다.

나는 하늘을 본 자세로 바닥에 곧게 누워 있다. 여긴 어디지. 땅을 짚고 일어나려고 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둔탁하고 무거운,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내 온몸을 제압하고 있다. 그것은 밀어내려 안간힘을 쓸수록 더욱더 거세게 나를 짓눌러온다. 나는 저항을 포기한다. 그리고 눈을 굴려 이곳이 어디인지를 살핀다. 꿈 특유의 초월적인 전개에 따라, 다음 순간 나는 바닥에 누워 있는 나인 동시에 높은 어딘가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내가 된다. 나는 희고 짧은 원피스 차림에 아무렇게나 잘린 머리를 하고 있다. 누워 있는 곳은 네모난 돌을 고여 만든 제단처럼 보인다. 그 제단을 중심으로 나와 같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둥글게 모여 엎드려 있다.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나는 그 사람들 가운데 아빠와 엄마와 동생과 원, 춘 여사, 심지어 죽은 할아버지와 그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까지 있다는 사실을 안다. 이들은 오늘 내가 죽는 것을 보기 위해 이곳에 모였다. 예정된 사실. 막을 수 없다. 나는 내 죽음이 끝난 뒤 피가 흥건한 제단을 뒤로한 채 웅성거리며 흩어지는 이들의 모습까지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기다리겠다, 생각하고 나는 하늘을 본다. 태양이 서서히 하늘을 가로질러오고 있다. 저 빛이 내 몸을 직선으로 찌르는 순간, 죽음은 올 것이다. 어떤 모습으로? 의문은 곧 풀린다. 있었는지도 몰랐던, 어쩌면 방금 막 생겨난 건지도 모를 뒤쪽 계단을 밟고 커다란 고양이 인형이 내게 다가온다. 나는 놈을 한눈에 알아본다. 그건 내가 폐지 더미 밑에 숨겨둔 바로 그 고양이 인형이니까. 얼굴 가까이 다가온 고양이가 힐끗 고개를 들어 하늘을 확인한다. 태양은 거의 눈앞까지 다 왔다. 사람들의 숙여진 고개 밑에서 흥분과 두려움이 느껴진다. 고양이가 내 얼굴 가까이 몸을 들이민다. 나는 향긋한 학종이 냄새를 맡는다. 색실로 수놓아진 입이 달싹거린다.

누나, 이게 인생이면 난……

나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돌린다. 이어지는 말을 듣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이미 입이 말을 뱉고 있다. 남은 것은 그 말이 내 귀를 향해 헤엄쳐와 귓구멍을 통해 들어온 뒤 머릿속에 엎질러지는 일뿐이다. 그러지 않아도 나는 그 말이 어떻게 끝날지 알고 있다. 아주 잘 알고 있다.

살기 싫다고?

태양이 성실한 초침처럼 움직인다. 고양이가 내 가슴 위로 거대하고 통통한 회색 손을 뻗는다. 예리한 손톱이 빛나는 손을. 나는 눈을 똑바로 뜨고 그 칼날이 높이 들어올려지는 것을 본다. 모여든 사람들은 낮게 웅웅거리며 저주처럼 들리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무슨 뜻일까. 나는 그중에서 아는 목소리를 구분해내려고 애쓴다.

칼날이 가슴에 내려꽂히기 직전, 꿈은 맛없는 껍질을 뱉어내듯이 나를 놓아준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숨을 몰아쉬는 혼란스러운 몇십 초가 지나고 나서야 나는 그 소리의 정체를 깨닫는다. 휴대폰 진동 알람이다. 알람을 끄며, 나는 손바닥으로 가슴께를 문질러본다. 아무것도 박히지 않았지만 그래서 왠지 허하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다. 뻑뻑한 눈을 껌벅거리다 나는 이불을 박차고 일어난다. 이런 공허함에는 몸을 움직임으로써 얻어지는 잠시 동안의 망각만이 특효약임을 알고 있기에.

 

 

28

 

데모에 대한 걱정은 현실이 된다. 나는 놀라지도 않는다. 모든 걱정은 대개 현실로 변하게 되어 있으니까. 아빠는 차분한 목소리로 데모 계획에 대해 설명한다. 사람들을 모은다, 시청 앞에서부터 시작한다, 시장 나오라며 목소리를 높인다, 시장을 만나게 되면 인공 강우제 살포에 대한 확실한 계획과 보상책을 얻어낸다, 그전까지는 물러나지 않는다.

그게 다예요?

그게 다지.

아빠가 간단히 대답한다. 내 귀에 아빠의 계획은 마치 간식을 내놓으라고 조르는 어린아이들의 모임처럼 들리지만, 나는 더 대꾸하지 않은 채 아빠가 말을 계속하도록 내버려둔다.

당분간 바빠질 거다. 알아보니 이번 시장은 보통 놈이 아니야. 정권이 바뀌면서 더 힘들어졌다. 빨리 처리했어야 했는데.

보통 놈이 아니니까 시장씩이나 하겠죠.

네가 해줘야 할 일이 좀 있어.

아빠는 피곤해서 핏발이 선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뭔데요?

두 가지다. 첫째로 젊은 애들을 좀 모아줬으면 좋겠어.

그 젊은 애들이란 원과 두서넛쯤 되는 원의 친구들이라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나는 대놓고 한숨을 내쉰다. 원이 데모에, 그리고 어른들이 하는 일에 불만이 많다는 사실은 아빠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적극적으로 참가하라고까진 안 해. 그냥, 데모에는 사람이 많을수록 좋으니까.

물어볼게요. 그리고 또 뭔데요?

깃발이랑 피켓을 만들어야 돼.

뭘로 만들어요 그런 건?

종이랑 물감이랑, 뭐 그런 거겠지.

아빠는 그런 것까지 말해줘야 되냐는 표정으로 나를 본다.

뭐라고 써야 되는데요?

알아서 잘 써봐. 심금을 울릴 만한 말로. 너 그런 거 잘하잖냐.

내가 그런 걸 잘했던가. 아빠 앞에서 그런 재주를 뽐낸 적이 있었나. 기억해내려 애쓰는 사이 아빠는 내 어깨를 감싸쥐고는 툭툭 두드린다. 너를 믿는다는 듯이.

열심히 해봐라. 잘돼서 다 같이 땅에 살면 좋지 않겠니.

과연 그럴 수 있을까. 하지만 반박하는 대신, 나는 집을 나와 걸어가고 있다. 부모의 말에 순종하는 착하고 성실한 딸처럼.

 

무턱대고 찾아왔는데 운이 좋다. 원이 안에 있다고 원의 동생 중 하나가 알려준다. 안으로 들어가니 가로로 길게 누운 원이 과자를 먹으면서 만화책을 읽고 있다.

원아.

어 왔냐.

뭐 하냐.

보다시피.

원이 만화책을 턱짓한다. 나는 원의 옆에 비집고 들어가 앉는다. 원의 세 동생들이 쭈뼛거리며 자리를 피한다. 피해보았자 같은 방안에서 다른 구석으로 옮겨가는 것뿐이지만. 남자아이 하나에 여자아이가 둘. 다들 낯가림이 심하고 못생긴 아이들이다. 이 아이들은 내 동생이 대장 노릇을 하는 패거리와도 놀지 않는다. 그저 자기들끼리 소곤거리며 졸졸 몰려다닐 뿐이다.

만화책 재밌냐.

할 거 없어서 보는 거지 뭐.

나가서 좀 걸을래?

아니, 귀찮아. 여기서 얘기해.

원의 시선은 여전히 만화책에 꽂혀 있다. 나는 엄지와 검지로 만화책을 집어 올려 치워버린다.

아, 왜 그래.

얘기 좀 하자니까. 동생들 없는 데서.

하아 진짜.

그제야 원은 몸을 일으킨다. 원의 동생들이 우리를 빤히 쳐다본다. 나는 원을 앞세워 집을 나선다. 아무데로나 터벅터벅 걷기 시작하지만, 목적지는 정해져 있다. 쓰레기장이다. 이 좁은 구름 위에서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는 대화를 하려면 거기가 제격이니까.

자, 뭔데.

돌아선 원이 츄리닝 바지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며 묻는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생각해둔 바는 없고 그냥 떠오르는 대로 말할 셈이었는데 막상 하려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이게 뭐 별거라고. 나는 원의 눈을 바라본다.

아빠가 데모한대. 뒷집 아저씨랑, 다른 아저씨들이랑.

근데?

너네도 참여했으면 좋겠대.

너네가 누군데?

너랑 니 친구들.

원은 담배를 깊게 빨아들인다. 담배 끝에서 종이 타는 소리가 들릴 만큼 세게. 나는 어ᄄᅠᇂ게 돼도 좋다고 생각하며 대답을 기다린다. 거절당하면 어쩔 수 없다. 아빠한테 돌아가서 원이 싫다고 하더라고, 아무리 설득해도 소용없었다고 말하면 그만이니까.

데모를 뭐 어떻게 한다는데?

자세히는 몰라. 시청 앞에서부터 시작한대. 시장을 만날 때까지 한대.

시장이 그렇게 쉽게 만나지는 사람이냐?

난 모른다니까.

내가 왜 친구들까지 끌고 거기 가서 소용도 없는 짓을 해야 되는데? 땅 사람들 앞에서 쪽이나 팔고.

틀린 말은 아니다. 잘될 거라는 보장은 누구도 할 수 없으니까.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아빠가 했던 말을 똑같이 따라한다.

그래도 다 같이 땅에서 잘살게 되면 좋잖아.

누가 잘살게 해준대?

원이 피식 웃는다. 나는 그만 기분이 나빠진다.

싫으면 마. 네가 싫다고 했다고 얘기할게.

싫다고는 안 했어.

돌아서려는데 원이 나를 붙잡는다. 생각보다 강한 힘으로 내 어깨를 돌려세우는 바람에 나는 아, 소리 내며 원을 올려다본다. 그러고는 얼굴을 찌푸린다. 원이 웃고 있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문득 좋지 않은 예감이 뇌리를 스친다. 그 즉시, 원이 내 눈을 바라보며 묻는다.

너, 처녀야?

나는 귀를 의심한다. 뭐냐고? 내가 뭐냐고? 입을 헤 벌린 채 지금 들은 말을 이해하려고 하는데 원은 틈을 주지 않고 계속 묻는다.

처녀겠지? 맞지? 아무랑도 섹스 안 했지?

나는 겁에 질려 물러나려고 하지만 어깨를 붙잡은 손은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원이 여전히 실실 웃으며 대답을 찾아내려는 듯 제 얼굴을 내 얼굴 가까이 가져다댄다. 그러자 저절로 어깨가 움츠러든다.

미쳤어?

미쳤냐고? 아니. 미친 건 너네 아빠지.

야, 데모하기 싫으면 하지 마.

아니, 할 거야. 그런데 그 전에.

어깻죽지에 있던 원의 손이 별안간 내 목을 그러쥔다. 그 행동보다도 살갗에 맞닿은 손이 너무나도 차가워서, 꼭 이승의 것이 아닌 것 같아서 나는 소스라치게 놀란다. 손이 쇄골을 미끄러져 내려가 티셔츠 속으로 들어온다. 거리낌없이 브래지어를 젖히더니 마치 쥐어짜듯이 왼쪽 가슴을 꽉 움켜쥔다.

우리 이제 할 때도 되지 않았냐.

원의 손가락이 가슴을 더듬는다. 그게 유두를 찾으려는 시도임을 깨닫자마자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는다. 나는 안간힘을 다해 원을 밀쳐낸다. 필요하다면 비명이라도 질렀을 것이다. 아니, 칼이 있었으면 찌르고 달아났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밀쳐내진 원은 별로 실망하는 기색도 없이 여전히 빙글빙글 웃고 있다.

무슨 짓이야 이게?

잘 생각해봐.

뭘?

넌 어른들이 하는 짓은 다 하고 있잖아. 돈도 벌고, 가족도 먹여 살리고, 집 나간 애미도 찾아다니고 이제 데모까지 벌이려는 판인데. 왜 어른들이 즐기는 건 안 하는데?

……미친놈이네 완전히.

잘 생각해봐. 누가 진짜 미친놈인지.

원이 느른하게 대꾸한다. 나는 원을 노려보며 티셔츠 아래로 밀쳐 올라간 브래지어를 추스른다. 비틀거리며 몇 걸음 뒷걸음질치다, 그대로 돌아서서 뛴다. 등뒤에서 들리는 것은 따라오는 발소리 대신 새로이 담뱃불을 붙이는 소리. 그리고 관자놀이에서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 꼭 머리통 전체가 심장으로 대체된 것 같다.

나는 집 문을 부서져라 열고 들어간다. 아빠와 동생이 깜짝 놀라 나를 쳐다본다. 그제야 지금 내 꼴이 어떨지에 생각이 미친다. 머리는 산발에 양뺨은 시뻘겋게 불타고 있을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수치심을 다 가져다 묻혀온 모습일 것이다.

무슨 일 있었냐?

아빠가 묻는다. 나는 대답하기 위해 입을 벌린다. 평소 같았으면 천연덕스러운 거짓말을 오백 개는 지어낼 수 있었을 만한 시간이 흐른다. 시간이 흐르는 것을 이토록 체감한 적이 있었던가. 상기된 뺨을 스치는 시선, 시선들. 천천히 숨이 가라앉는다. 이윽고 나는 말한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29

 

누나, 나 좀 봐라.

흘끗 바라보자 동생은 양볼에 빨간 물감을 둥글게 칠해놓고 헤 하고 웃고 있다. 나는 피식 웃는다.

야, 웃기지 말아봐. 집중해야 돼.

나는 쥐고 있던 붓을 다시 꼬나잡고 종이를 노려본다. 역시 연필로 미리 밑그림을 그려두고 시작할 걸 그랬나. 하지만 천과 물감은 아직 많이 남아 있다. 실패하더라도 다시 하면 된다. 거기서 오는 작은 안도감에 사실 나는 조금 신이 나 있다. 어디, 마음껏 해볼까. 팔레트로 쓰려고 잘라놓은 박스 조각 위에 빨간 물감을 쭉쭉 짠다. 주먹만큼 짠 물감을 이번에는 면적이 넓은 붓에 듬뿍 묻힌다. 이 정도면 됐겠지. 나는 숨을 잠시 멈춘다. 가로로 길게 자른 흰 천 한쪽에 붓을 내려놓고 납작한 네모를 그려본다. 아직 글씨는커녕 그림의 꼴도 갖추지 못한 그것을 흠, 하고 내려다본다.

너무 크게 쓴 거 아냐?

그런가도 싶지만 이왕 시작한 거 별수없다. 나는 네모 아래에 선을 긋는다. 머리가 조금 크긴 하지만 그런대로 괜찮은 ‘물’ 자가 완성된다. 그것과 비슷한 크기로 일필휘지, 나머지 글자를 이어 쓴다.

 

물 러 가 라 !

 

어떤 것 같아?

응, 괜찮은 듯. 잘 쓴다.

빨간 뺨을 한 동생이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콧잔등을 찡그리며 웃는다.

이 작업을 하려고 고깃집에도 하루 휴가를 낸 참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 동생을 데리고 구름을 내려갔다 왔다. 아빠에게 넉넉히 받은 돈으로 흰 천과 물감과 붓을 사고 시장 골목의 국숫집에서 잔치국수도 한 그릇씩 먹었다. 남은 동전은 문구점 앞 뽑기 기계에다 썼다. 플라스틱 캡슐에 든 채 굴러나오는 장난감이라니, 억만금을 들여도 절대 아깝지 않다. 동생은 뽑기 기계의 레버를 한 번씩 돌릴 때마다 원숭이처럼 새된 소리를 질렀다. 지금 동생의 바지 주머니 속에 한가득 들어 있는 그 장난감들을 생각하면 이 정도 노동 따위는 콧노래를 부르며 할 수 있다. 고작해야 천 위에 글씨를 그리는 일인걸. 나는 턱을 쓰다듬으며 글자를 내려다보다가, 이내 구겨버리고 다른 천을 꺼내 다시 쓴다. 역시 연습이 중요하다. 이번에는 좀더 비율이 좋은 글자가 만들어진다.

물 러 가 라 !

나는 쓴 것을 흡족하게 내려다본다. 내가 보기에도 잘 썼다. 흰 천 위에 새빨간 네 글자가 아주 인상적이다. 눈을 감아도 잔상으로 남아 눈꺼풀 안쪽에 박혀 있을 만큼. 이 글자를 읽으면 물러가야 할 사람들이 정말로 물러가고 싶어질 것 같다. 그것이 옳은 일임을 깨닫게 해주는 힘이 이 글자에는 있다. 나는 사람들이 실제로 물러가는 모습을 상상한다. 어떤 사람들이? 그야 시장이다.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다. 땅에 살며 집과 차를 소유한 사람들, 종신 보험과 대학 졸업장을 가진 사람들, 그리고 그중 무엇 하나도 우리에게 나누어줄 생각이 전혀 없는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