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회

나는 더이상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냥 멀거니 서 있다

나는 더이상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냥 멀거니 서 있다. 그러다 문득 뒤쪽에 앉아 있는 원과 눈이 마주친다. 친구와 무언가를 숙덕거리던 원은 나를 보고 눈썹을 으쓱해 보인다. 그때 앉아 있던 행렬 한가운데에서 누군가 큰 소리로 묻는다.

저기요, 우리 아무것도 안 해요?

나는 힘없이 그쪽을 쳐다본다. 더위에 얼굴이 벌겋게 익은 여자가 마찬가지로 얼굴이 벌겋게 익은 아기를 안고 있다. 나는 저들을 안다. 영애와 영애의 엄마다. 대답할 말이 없어 머뭇거리는데 영애 엄마가 다시 말한다.

계속할 거면, 애기가 너무 더워해서 그런데 그늘로라도 가면 안 될까요?

……밖으로 나가면 안 된다고 해서……

그럼 저는 그만 여기서 빠질게요. 애기 때문에 안 되겠어요.

영애 엄마가 이것 보라는 듯, 열꽃이 핀 영애의 얼굴을 공중으로 들이민다. 가까이 있는 것도 아니건만 나는 뒷걸음질친다. 그것을 신호로 사람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던지기 시작한다.

어차피 말해봐야 여기선 들리지도 않겠구만.

오늘 너무 더운데 꼭 오늘 했어야 했나?

좀 알아보고 하지, 이건 뭐 허공에 대고 외치는 거나 다름없네.

이렇게 다 막아놨는데 뭘 할 수가 있어?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아빠를 한 번 보았다가, 행렬 앞쯤에 선 뒷집 아저씨를 한 번 보았다가를 반복한다. 둘 다 침통한 표정으로 땅바닥만 내려다보고 있다. 아무런 대답도 내놓지 못하자 원성은 점점 커진다.

여기 오려고 일도 빠지고 왔단 말이에요.

에이 제길, 내가 뭐 먹을 거 있다고 여길 왔는지 원.

쪽은 쪽대로 팔고.

찌푸려진 얼굴들이 중얼대는 말이 가래침처럼 내 얼굴로 내뱉어진다. 순간 욱하고 가슴속에서 뭔가 치받치는 것을 느낀다. 어떻게 이렇게들, 이렇게들 못되고 악할 수가 있을까. 누구 하나만 배부르자고 하는 일도 아닌데, 다 함께 잘살자는 건데. 무너져내릴 걱정 없는 곳에서 편안하게 살아보자는 거였는데. 고작 이 정도의 인간들과 그런 것을 공모했다는 사실이 치가 떨리도록 분하고 억울하다. 나는 빈 주먹을 꽉 쥔다. 누군가의 멱살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돌아선 경찰들은 여전히 미동도 없다. 하지만 듣고 있을 것이다. 그 사실이 나를 더 미치게 한다. 속으로 비웃고 있겠지. 처음부터 오합지졸들 같더라니 이럴 줄 알았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저들끼리도 뭉치지 못하는 족속들이 어딜 기어오르느냐고, 얌전히 찌그러져 살지 자기들이 뭐라도 되는 줄 아는 게 아주 우습다고.

그때 원이 벌떡 일어나더니 벼락같이 외친다.

아 씨발, 다들 입 좀 닥쳐요!

사람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해진다. 나는 똑바로 선 원과 눈을 마주친다. 땀에 젖은 원의 얼굴은 잔뜩 찌푸려져 있다. 그 순간, 나는 이전부터 수백 번 해온 상상을 다시 하기 시작한다. 원이 저벅저벅 걸어와 내 손을 잡는다면. 잡은 손을 그대로 끌고 달려 이곳을 빠져나간다면. 누구도 우리를 찾지 못하는 곳으로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저 상상을 한 것뿐인데 그것만으로도 나는 기뻐서 몸서리를 친다. 그래, 지금 내게 필요한 건 단지 그것뿐이다. 제발, 나를 데리고 떠나줘. 나를 여기서 꺼내줘. 이 모욕과 악의에서 나를 구해줘.

하지만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뭐라고 욕설을 내뱉은 원은 이내 고개를 돌리더니, 경찰들 사이를 비집고 나가버린다. 어어, 하고 원의 친구들이 소리치며 뒤따른다. 야, 담배 피우게? 아니, 집에 가게. 좆같아서 못 있겠다. 하여간 구질구질한 인간들. 존나 병신 같아. 말소리가 멀어진다. 나는 어깨를 늘어뜨리고 서서 원이 빠져나간 자리를 바라본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마음이 귀퉁이부터 서서히 슬픔으로 젖어든다.

나는 그 슬픔을 똑바로 노려보려고 애쓰면서 마음속으로 중얼거린다. 나를 슬프게 하는 건 내게 거지새끼라고 삿대질하는 노인도 아니고 애써 준비한 데모를 헛수고로 만들어버린 경찰도 아니다. 내게 원망의 말을 쏟아내는 저 사람들도, 그걸 나서서 수습할 마음이 전혀 없어 보이는 아빠도 아니다. 내가 슬픈 이유는 원이 나를 두고 가버렸기 때문, 오직 그것 때문이다.

우리 그래서 계속해요, 말아요?

영애 엄마가 한풀 꺾인 목소리로 묻는다. 그는 내가 만들어준 피켓으로 영애의 얼굴에다 부지런히 부채질을 하는 중이다. ‘결사반대’라는 네 글자가 팔랑팔랑거리며 무더운 바람을 실어 나른다. 그 투쟁의 바람 아래 죽은듯이 잠들어 있는, 아니 어쩌면 오래전에 죽었는지도 모를 영애의 감은 눈꺼풀. 태양이 우리 모두의 머리 위로 내리쬔다. 경찰들의 어깨에 장식된 금속이 번쩍거린다. 눈부시다. 눈부셔 죽겠다. 나는 눈을 감아버린다.

자, 이제 그리고 눈을 뜨면 짜잔, 아무것도 달라져 있지 않다.

 

 

32

 

누나, 데모 어땠어?

뭐가 어때, 데모가 데모지.

경찰 많았어? 군인도 막 왔어?

어. 경찰도 오고 군인도 오고 탱크도 오고 대포도 왔어.

에이, 구라.

좆만한 게 속고만 살았냐? 진짜야.

사람이 탱크를 어떻게 이겨?

야, 누나 싸움 짱이잖아.

이히히, 누나가 무슨 싸움 짱이냐.

아빠도 있고 원이 형도 있고 다른 사람들도 있고, 아무튼 다 이겼어 새꺄.

어떻게 이겼는데? 응? 어떻게?

몰라. 야, 귀찮게 굴지 말고 저리 가서 핸드폰이나 봐.

아 좀 얘기해줘. 군인들이 총 쐈어? 경찰들이 막 때렸어?

아 존나 귀찮게 구네. 저리 가라고.

아 누나 제발.

어휴, 그래. 총알 샥샥 피하면서 다가가서 발차기로 대가리 후려서 죽였어. 경찰들이 방패로 막길래 방패도 다 부숴버리고 땅바닥에 메다꽂으니까 머리가 펑펑 터지더라. 탱크도 그냥 기어올라가서 안에 탄 새끼 끄집어내다가 확 목에 칼 그어버렸고. 됐냐?

와, 미친. 진짜야? 진짜 누나랑 형들이랑 아빠랑 그랬어?

어. 땅 새끼들 다 제발 살려달라고 무릎 꿇고 빌었어.

그럼 우리 이제 땅에 가서 살아?

……

누나?

야, 꺼져.

아 누나.

너 진짜 개같이 처맞기 전에 꺼지라고.

아니 누나, 이것만 알려줘. 우리 땅에 가서 살아? 언제부터 가?

니가 그걸 알아서 어쩌게.

어…… 비밀인데, 사실 나…… 아니다. 아니야.

맞을래? 뭔데.

아니 있잖아 나, 사실 어디다 몰래 돈 숨겨놨거든. 근데 갑자기 이사가게 되면 그거 못 찾고 갈 수도 있으니까.

돈? 니가 돈이 어디서 나서?

아 있어. 비밀이야. 아무튼 언제 가는지 알려주면 안 돼? 제발. 제발.

너 지금 안 꺼지면 진짜 맞는다.

알았어 갈게 갈게. 그래도 누나, 가기 전엔 꼭 알려줘야 돼?

……

누나!

알았어. 알았으니까 이제 좀 꺼져.

으응.

 

 

33

 

달 없는 밤, 원과 나는 쓰레기장에서 만난다. 이곳은 그야말로 칠흑같이 어둡다. 우리는 쪼그려앉은 채 휴대폰 플래시를 켜서 서로의 머리 위를 비춘다. 허공에 둥둥 뜬 원의 시허연 얼굴은 꼭 귀신 같다. 이윽고 귀신이 묻는다.

저녁은 먹었냐.

어어.

뭐 먹었냐.

컵라면에 밥 말아 먹었다 왜.

괜히 불퉁한 목소리로 대꾸한다. 원은 대답 대신 크흠, 하고 목을 가다듬는다. 사방이 고요하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킨다. 왠지 모르겠지만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이 어둠 속에, 저 쓰레기 더미 안에 뭔가가 도사리고 있는 것만 같다. 나를 어제의 나와는 완전히 다른 무언가로 바꾸어놓을 어떤 것이.

괜찮냐.

뭐가?

그냥 다.

데모 얘기라면 관둬라.

데모 얘기 안 할게.

갑자기 뭔가가 내 손을 더듬더니 꽉 움켜쥔다. 나는 깜짝 놀라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른다. 그건 물론 원의 손이다. 차가운 거미 같은 손가락들을 피하지 않고, 원의 손을 강하게 마주잡는다. 손바닥 안에서 배어나와 고이는 땀이 내 것인지, 원의 것인지 알 수 없다. 어색하게 웃으며 이 땀에 대해 말하려는 찰나, 원의 얼굴이 가까이로 다가온다. 동시에 다른 쪽 손이 내 목덜미를 그러쥔다. 그렇게 세게 쥐지 않아도 도망가지 않아. 나는 이제 더이상 아무것도 무섭지 않거든. 그런 의미로 나는 다가온 원의 입술을 살짝 물어준다. 이 작은 화답에 원은 미친듯이 흥분하여 달려든다. 두꺼운 혀가 입천장이며 볼 안쪽을 부지런히 왔다갔다한다. 마치 이빨 달린 문어에게 얼굴을 통째로 잡아먹히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다. 나는 숨을 참고 차분히 코로 호흡하려고 노력하지만, 원의 윗입술이 자꾸만 콧구멍을 막는다. 침 냄새와 담배 냄새. 문득 더럽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다음에 벌어질 일에 비하면 이건 더러운 축에도 못 낀다. 정말로 그렇다.

잠시 후 원이 숨을 헉헉 몰아쉬며 얼굴을 떼어내자마자, 나는 고개를 돌리고 옷소매로 입을 문질러 닦는다.

너 처음 맞아?

내가 이런 걸 누구랑 또 해.

왠지 처음 하는 거 아닌 것 같은데.

진짜 존나게 처음 처음 거리네. 너야말로 처음 맞냐.

삐딱하게 말했지만 사실 크게 관심은 없다. 원과 다른 누군가가 이런 짓을 하는 모습을 상상하면 그저 우스꽝스러울 뿐이다. 잠깐, 이거 이상한 건가. 질투가 나야 맞는 거 같은데. 어둠 속에서 딸그랑딸그랑, 바지 벨트 푸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원이 뒹구는 장면을 골똘히 떠올린다. 벌거벗은 원이 마찬가지로 벌거벗은 웬 여자 위에 올라타 있는 모습. 너무나 쉽게 그려낼 수 있지만, 그야말로 아무런 감정이 생기지 않는다. 아니,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 그러니까 이쪽 말고 그쪽이 진짜였으면……

원의 손이 부드럽게 내 몸을 누른다. 나는 헝겊 인형처럼 누르는 대로 눌린다. 바닥에 등을 대고 눕자마자 브래지어 속으로 거리낌없이 밀고 들어오는 손가락. 이윽고 윗옷이 벗겨지자 등이며 배가 서늘하다. 훤히 드러난 가슴에 원이 얼굴을 비비며 중얼거린다.

오하늘.

왜.

나 너 좋아해…… 존나…… 좋아해……

갑자기 뭔 소리야.

난 오하늘이 좋고…… 좋은데 아 존나 씨발…… 불쌍하고……

나는 원의 머리를 양손으로 끌어당겨 입맞춘다. 키스가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입을 닥치게 만들고 싶어서다. 이와 이가 표면을 긁으며 서로 부딪힌다. 원의 머리는 뜨끈하게 열이 올라 있다. 커다란 손이 이리저리 움직이며 내 바지 버클을 풀더니 팬티까지 한꺼번에 쑥 잡아 내린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감지 않으려 노력한다. 내 얼굴을 누르는 원의 얼굴 너머로 별이 총총한 밤하늘이 보인다. 정말로 많기도 많구나. 아름답구나. 저 별들을 어떻게 이으면 무슨 그림이 될 것도 같은데. 문득 나는 동생이 아기였던 때를 생각해낸다. 밤새 잠투정으로 칭얼거리는 그애를 업고 집 앞을 왔다갔다하며 별자리에 대해 말해주었던 일. 봐봐, 이렇게 이렇게 이으면 국자 모양 북두칠성. 야 신기하지 그치. 이런 건 누가 만들었냐. 신기하지 응.

원이 내 위에서 움직이는 동안, 나는 눈으로 별을 따라간다. 윙크하듯 깜빡이는 별들. 새까만 어둠 속에서 바람이 불자 별빛이 흔들린다. 이제 날이 밝으면 저 별들은 다 어디로 갈까. 아 피곤하다, 저들끼리 중얼거리며 집으로 돌아갈까. 정말 그럴까. 그러면 좋겠다. 포근한 집에서 평화롭게, 평화롭게. 저중 어느 별도 나처럼 차가운 바닥에 등을 깔고 누워 있지 않았으면.

곧이어 원의 몸이 딱딱하게 경직된다. 누구에게도 배운 적 없지만 직감으로 알 수 있다. 뭔가가 끝났다는 것을. 내 얼굴 위로 거친 숨을 내뱉던 원이 이윽고 몸을 반 바퀴 돌려 떨어져나간다. 그리고는 숨을 채 고르기도 전에 묻는다.

좋았어?

어어.

어둠 속에서도 원이 씨익 웃는 것이 느껴진다. 왠지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한 말일 뿐인데. 나는 윗몸을 일으키고 바닥을 더듬거려,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바지를 찾아내고 주머니에서 휴지 뭉치를 꺼낸다. 집에서 나오면서 챙겨 온 것이다. 그것을 다리 사이에 대고 꾹 누른다. 그리고는 손아귀에서 꾹꾹 뭉쳐 멀리 던져버린다. 닦여 나온 것이 무엇이든, 절대로 보고 싶지 않다.

……야.

왜.

나 이제 집에 가도 되지.

간다고?

누워 있던 원이 담뱃불을 붙이려다 말고 급하게 되묻는다. 나는 아직 알몸인 원을 바라본다. 키는 훤칠하지만 팔뚝은 앙상하고 벗은 가슴은 깡말랐다. 옷을 벗겨놓아서 그런가, 아니면 방금까지 나를 타고 올라 헉헉거리던 우스꽝스런 모습을 봤기 때문인가. 사람들 앞에 버티고 서서 쌍욕을 내뱉던 당당한 모습은 오간 데 없다. 나는 서둘러 옷을 입는 척하며 눈을 돌린다.

아니 왜 벌써 가게.

그럼 여기 누워서 뭐 해.

몰라. 담배라도 피우든가.

그렇게 말해 놓고, 내가 진짜로 손을 내밀자 원은 놀란 얼굴을 한다. 나는 잽싸게 원의 입에 물린 담배를 빼앗아 내 입에 문다. 그리고는 말릴 새도 없이 숨을 깊게 들이쉰다. 가시가 돋친 듯 날카롭고 매운 연기가 입속을 가득 메웠다가 코로 쿡 치받는다. 목과 가슴에 힘을 꽉 주고 기침을 참자 눈물이 핑 돈다.

야, 야. 왜 그래. 미쳤냐.

놔둬.

한 번 더 깊게 빨아들이자, 처음보다 괜찮아진 것 같다. 나는 내 입에서 나온 연기가 주변으로 퍼지며 하늘을 향해 나부끼는 것을 본다. 입안이 텁텁하고 까끌거린다. 이래서 그렇게들 침을 뱉는구나. 입에 있는 침을 전부 긁어모아 퉤, 소리 내며 내뱉자 원이 낄낄 웃는다.

잘 피네.

웃기냐.

원이 새 담배를 붙이며 계속 웃는다. 뭐가 웃기지. 아무것도 웃긴 일은 없지만 그러나 나도 어느새 웃고 있다. 아하하하, 히히히히. 아무도 오지 않을 것을 알지만 우리는 소리를 죽여 웃는다. 지은 죄가 있으니까.

하지만 이게 정말 죄일까?

웃을 만큼 웃은 뒤, 나는 담배 한 개비를 마저 끝까지 피운다. 다 피운 뒤엔 제법 그럴싸한 동작으로 꽁초를 구름 바닥에 비벼 끄기까지 해본다. 좋다. 이제 나는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되었다. 아주 쉽고 자연스럽다.

존나 별거 아니네.

나는 어둠 속을 향해 말한다. 그러자 그 말에 화답이라도 하듯, 다리 사이에서 뭉근하게 무언가 흘러나오는 것이 느껴진다. 팬티가 축축하게 젖어드는 기분이 썩 좋지 않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아주 나쁘다. 니미 개 씨발 좆같이 나쁘다. 하지만 괜찮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나는 방금 배웠으니까.

야, 한 대 더 줘봐.

나는 원을 향해 빈 손바닥을 내민다.

 

 

34

 

주방 이모가 나를 손짓해 부른 건 한창 손님이 몰려드는 저녁 시간이 끝나고 조금 한가해졌을 무렵이다. 가게 구석의 빈 테이블에 앉은 이모는 나도 앉으라는 듯 앞자리를 눈짓한다. 무슨 얘기를 하려고 이러지. 나는 조금 긴장하며 앉는다. 이모가 묻는다.

하늘이 너, 고등학교는 나왔니?

네? 갑자기요? 나왔죠. 왜요?

수능은?

치긴 쳤죠. 성적은 끔찍하지만. 왜요?

아니, 갑자기 문득 생각해보니까 너는 대학 안 가나 해서.

대학이요? 뭔 대학?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되묻는다. 나를 놀리는 건가 싶어서다. 그다지 가까운 사이는 아니지만, 주방 이모와는 몇 년을 한 가게에서 일한 사이다. 내가 구름 사람이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에도 수업이 끝나자마자 바로 아르바이트를 뛰었는데 대학은 무슨 놈의 대학. 그런데 주방 이모는 내 표정을 보더니 손사래를 친다.

아니 아니, 돈 없어도 대학 갈 수 있어.

돈이 없는데 어떻게 가요?

요즘 세상이 좋아졌잖아. 장학금 받든가, 학자금 대출이나 국가 지원을 받든가, 아무튼 방법이 다 있다구. 찾아보면 많아. 찾아는 봤어?

아 진짜 갑자기 무슨 소리예요. 그런 거 관심 없어요.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내 어깨를 이모가 눌러 앉힌다.

얘, 진지하게 말하는 건데, 너 관심 있으면 이모가 방법은 알아봐줄게. 우리 딸이 사회복지사인데 너 같은 애들 땅에도 진짜 많대. 그런 애들도 다 나랏돈 받아서 대학 다닌다더라. 엄청 좋은 대학은 아니더라도 사 년제로 갈 수도 있고. 아무튼, 응? 생각해봐. 우리 딸내미한테 물어봐줄 테니까.

나는 대답 대신 비슬비슬 웃어버린다. 물론 웃겨서 웃는 게 아니라 어이가 없어서다. 주방 이모가 눈을 부라린다.

웃기는 왜 웃어. 언제까지 이런 데서 돼지갈비나 나르면서 살 거야? 대학도 나오고 배울 수 있는 건 배워서 더 좋은 데 가야지. 너도 이런 거 말고 진짜로 하고 싶은 거 있을 거 아냐? 응?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망설이는데 그때 마침 반갑게도 손님 대여섯이 우르르 들어온다. 어서 오세요! 나는 우렁차게 외치며 벌떡 일어난다. 등뒤에서 아이구 저 기집애, 하는 핀잔이 들려온다. 그러거나 말거나 주방으로 뛰어가 물티슈와 기본 찬을 세팅해둔 쟁반을 날라와서 손님들 앞에 반찬을 착착 내려놓으며 생각한다. 하고 싶은 게 없다고 말하지 않아도 되어서 다행이라고.

그렇다, 내겐 하고 싶은 게 없다. 아니, 굳이 따지자면 이런 상황에 하고 싶은 게 있는 쪽이 이상한 거 아닌가. 물론 막연히 돈이 많았으면 좋겠다는 희망이야 있지만 어떻게 해야 돈이 많아질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하면, 어느 시점에 이르러 머릿속이 흐려진다. 더구나 뭔가를 배우고 또 그러기 위해 어딘가에 소속되고 그렇게 착착, 계획과 목표를 세워 움직이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한 일처럼 느껴진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러고 보니 초등학생 때부터 그랬다. 나는 아주 오래전의 미술 시간을 떠올린다. 어른이 되어 장래희망을 이룬 자신의 모습을 그려보라는 선생님의 말에 일제히 뭔가를 그리기 시작한 반 아이들 사이에서, 혼자 멍하니 빈 책상만 내려다보던 나를. 그때 선생님이 나를 혼냈던가, 그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딱히 뭐라고 하진 않았을 것이다. 나는 처음부터 좀 모자란 애 취급을 받고 있었으니까. 숙제도 안 해오고 준비물도 안 가져오는데다 목덜미와 손톱 밑엔 때가 새까맣게 끼어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맞기는 애들한테 많이 맞았다. 또래한테도 맞았고 때로는 나보다 어린 애들한테도 맞았다. 그마저도 내가 구름 사람이라는 걸 알기 전까지였다. 어떻게 알았는진 몰라도 안 뒤로는 때리지도, 내게 말을 걸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나한테 아무도 그걸 물어보지 않았다는 거다.

물어보지 않았으므로 생각한 적도 없다.

퇴근 시간이 되자마자, 나는 급한 일이 있는 양 후다닥 앞치마를 벗어던지고 가게를 나온다. 늘 가던 길 말고 다른 골목을 택해 도망치듯 걷는다. 골목 중간쯤 와서야 아무도 따라오지 않는다는 걸 확인하고 걸음을 늦춘다. 발을 질질 끌며 터벅터벅 걷는다. 그제야 내가 좀 싸가지 없었나 싶은 생각이 든다. 어쨌든 생각해서 해준 얘기일 텐데. 아니, 오히려 싸가지 없는 건 이모 쪽이다. 내 사정을 뻔히 알면서 대학은 무슨 얼어죽을 놈의 대학. 내가 고깃집 일을 그만두면 우리 가족의 수입은 당장 반토막이 난다. 게다가 학비가 공짜라고 해도 어쨌든 공부는 돈이 드는 행위다. 책값이며 밥값이며, 교통비는 뭐 땅 파면 나오나. 벌어도 모자랄 판에 오히려 쓰고 다니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런 생각들을 소여물 씹듯 우물거리며 나는 집으로 돌아온다. 아빠는 없고 동생만 방구석에 엎드려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다. 데모 이후로 아빠는 집에 잘 들어오지 않게 되었다. 그전에도 그랬지만 최근엔 더욱 잦아져 이틀, 사흘씩 집을 비우기도 한다. 처음에는 아빠에게 어딜 갔다 왔느냐고 자주 캐물었고 집요하게 전화나 문자를 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는다. 다 소용없는 일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야, 누나가 왔는데 쳐다도 안 보냐.

고기 냄새에 찌든 옷을 벗으며 나는 동생의 엉덩이를 찰싹 때린다. 동생이 그제야 기겁하고 놀라며 귀에서 이어폰을 뺀다.

아 깜짝이야.

넌 하루종일 그거만 보고 있냐. 눈 나빠지게.

눈 안 나쁘거든.

밥 먹었냐?

어.

건성으로 대답하지만 눈은 여전히 휴대폰에 가 있다. 어휴, 저 한심한 새끼. 나는 동생 옆에 벌렁 드러눕는다.

야. 넌 커서 뭐 되고 싶냐.

어? 나?

여기 너 말고 또 누구 있냐.

나는…… 어……

동생은 얼른 말하지 못하고 내 눈치를 본다. 나는 재촉하지 않고 기다린다. 포동포동한 아랫입술을 우물거리던 동생이 조심스럽게 말한다.

방송……

뭐라고? 티비 나오는 거?

아니, 이거……

동생이 가리키는 휴대폰을 흘끗 보자, 재생이 멈춰진 화면에 머리를 빡빡 민 남자가 있다. 민소매를 입은 남자의 양팔에 문신이 화려하다. 그 앞에 초밥이 잔뜩 놓인 길쭉한 접시가 있다. 언뜻 보아도 오십 개는 넘어 보인다.

이게 다 뭐야? 이거 다 이 새끼 혼자서 먹어?

예전 같으면 신이 나서 설명하기 시작했을 동생은 그저 주눅든 채 고개만 끄덕인다. 나는 동생이 왜 그러는지 안다. 예전에도 이 짓거리를 하고 싶다고 했다가 내게 죽도록 두들겨 맞았으니까. 나는 내가 그때 온 힘을 다해 쥐어박았던 동생의 동그란 머리통을 바라본다. 이상하지, 동생을 때렸던 일을 떠올리면 맞고 있던 동생보다는 때리던 내가 더 생생하게 기억난다는 게. 표정은 어땠는지, 몸 어디에 어떻게 힘을 주었는지, 어디를 어느 정도의 힘으로 때렸는지, 나는 그 모든 것을 머릿속에서 또렷하게 재생할 수 있다. 누군가를 때리면 다 이렇게 되는 건가. 그렇다면 나를 때린 사람들도 그럴까. 나는 나도 모르게 쯧, 혀를 차고는 묻는다.

이거 어디서 어떻게 되는 건데?

응?

비제이인지 뭔지 그거, 어디 가야 시켜주는 거냐고.

동생은 말하려다 말고 내 눈치를 슬쩍 본다. 정말 말해도 되는지, 괜히 떠들었다가 호되게 당하는 게 아닌지 살펴보는 것이다. 나는 말해도 된다는 뜻으로 눈썹을 까딱한다. 찌그러져 있던 동생의 미간이 화악 펴지더니, 이내 재잘거리기 시작한다.

어 일단 누가 시켜주는 건 아니고, 아무나 할 수는 있어. 첨에는 당연히 시청자도 없고 관심도 못 받는 게 당연하고, 뭐 유명한 사람하고 친하면 그 사람 방송에 꼽사리 낄 수도 있긴 한데. 그런 거 없으면 그냥 뭐 하고 싶은 콘텐츠 찍어서 무작정 시작하는 거야. 먹방이든 겜방이든 그냥 토크 방송이든.

동생의 말을 전부 이해하진 못했지만, 아니 사실은 거의 이해하지 못했지만 나는 듣고 있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거린다. 동생의 말이 점점 빨라지고 두서없어진다.

그리고 어, 음, 홍보도 열심히 하고, 약속한 요일에 꼬박꼬박 방송하는 건 당연하고. 아니다, 더 중요한 건 뭘 하는지인데. 특이한 거나 신기한 거, 그런 거 하나씩 있어야 사람들이 많이 봐줘.

예를 들면?

어 예를 들면 막 짜장면 열 그릇 한꺼번에 먹기. 콜라 큰 거 열 병 마시기.

그게 가능해?

아니 누나, 그런 건 별것도 아니야. 어떤 애는 막 전구도 깨서 먹고 그래.

구라 치지 마, 전구를 어떻게 먹어.

아냐 누나 내가 진짜 보여줄 수도 있어.

동생이 휴대폰을 들고 설친다. 나는 손사래 치며 동생을 말린다. 보나마나 조작된 가짜 영상이겠지. 그보다 내가 궁금한 건 다른 것이다.

근데 그 비제인지 뭔지 하는 애들 말야, 다 대학 안 나왔지?

대학? 몰라. 나온 애들도 있고 아닌 애들도 있을걸.

대학 안 나와도 할 수 있는 일이야?

그럴걸?

나는 안심하는 동시에 실망한다. 대학을 안 나와도 되는 일이라는 건 개나 소나 할 수 있는 일, 즉 변변찮은 일이라는 뜻이니까.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동생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고 싶은 일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다. 어쨌든 이 녀석이 나보다 낫구나. 나는 뿌듯한 마음으로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너 그거 꼭 돼라.

어어. 나 내년에 초등학교 들어가면 진짜 시작해보려고. 다른 덴 어려서 못 하는데 유튜브는 할 수 있거든.

기분이 잔뜩 좋아진 동생이 눈을 반짝이며 내 턱 밑으로 머리를 들이민다. 감지 않은 머리에서 시큼한 땀냄새가 난다. 아빠가 자꾸 집을 비우는 탓에 동생은 일주일이 넘도록 목욕탕에 가지 못했다.

그래, 그래. 뭔지 모르겠지만 잘 해봐.

있잖아 누나, 실버 버튼 받으면 그거 누나 줄게.

그게 뭔데?

유튜브에서 구독자 많으면 주는 거야. 잘했다고.

그런 걸 왜 날 주냐. 니가 가져야지.

아냐, 누나 줄게. 나 어차피 돈 진짜 많이 벌 거거든.

개 좋네, 나 부자 되겠네.

우리는 동시에 히히 웃는다. 정말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배운 것 없이 나이만 먹었으나 동생은 아직 어리니까 뭐든지 될 수 있다. 그다지 똑똑한 편은 아닌 것 같지만 뭐, 괜찮다. 세상에는 머리가 좋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일이 많으니까.

동생은 다시 이어폰을 낀다. 나는 머리 뒤로 깍지를 끼고는 반듯이 눕는다. 바깥에는 바람이 무섭게 불고 있다. 창문이 덜컹덜컹 소리 내며 흔들린다. 혹시 아빠가 돌아오는 소리일까, 나는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문 쪽을 흘깃 본다. 문은 굳게 닫혀 있다. 영영 열리지 않을 것처럼.

나는 눈을 감는다. 곧 얕은 잠에 빠져들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