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회

대학 졸업까지 등록금을 대주겠다는 땅 사람이 두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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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졸업까지 등록금을 대주겠다는 땅 사람이 두 명,

공짜로 방을 빌려주겠다는 땅 사람이 네 명,

일자리를 제공해주겠다는 땅 사람이 열세 명,

각종 생필품을 보내주겠다는 땅 사람은 셀 수 없음,

그리고 이억 칠천오백삼십일만 오천십오원.

하루 만에 내 후원금 계좌에 모인 돈이다.

방송이 나가자마자, 김노을이 전화로 몇 가지 주의 사항을 일러주었다. 인터넷은 아예 찾아보지 말 것, 돈 자랑은 어디에든 절대 금물, 특히 브랜드 로고가 크게 박힌 물건이나 사치품은 되도록 가지고 다니지 말 것. 누군가 알아보거나 말을 걸어온다면 예의 바르게 응하고 되도록 빨리 자리를 피할 것. 나는 그 하나하나를 귀 기울여 듣고 나서 물었다. 그거면 되나요? 수화기 너머의 김노을은 잠시 고민하다가 웃으며 덧붙였다.

아무튼 적당히 잘 살면 돼요. 행복하게. 남들 눈에 띌 정도로는 말고.

그건 완벽하게 내가 바라던 거였다.

밤이 되어 나는 아빠가 쓰던 낡은 배낭에 당장 필요한 것들을 닥치는 대로 쑤셔넣고 도망치듯 집을 나선다. 그럴 생각은 없었지만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아서다. 구름에 텔레비전은 없지만, 휴대폰은 모두 가지고 있으니 누군가는 이미 방송을 봤을지도 모른다. 뭐라고 생각할까. 불쌍해할까, 끔찍해할까. 둘 다일지도 모른다. 뭐든 상관없다. 알고 싶지 않다. 영원히. 발판 앞에서 나는 배낭을 앞으로 고쳐매고 품에 안은 동생의 유골함을 감춘다. 춘 여사가 묻는다.

이 야밤에 아가씨가 어딜 가니?

평소와 같은 다정한 목소리. 춘 여사는 아직 모르는 모양이다. 하긴 휴대폰을 잘 다루는 편은 아니니까. 그러나 춘 여사는 구름에서 가장 소문에 훤한 사람 중 하나다. 구름을 드나들기 위해선 춘 여사를 거치지 않을 수 없으니까. 어쩌면 누군가 이미 말해주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저 목소리에는 다정을 가장한 동정이나 비난이 섞여 있을 수도 있다. 나는 앞으로 그것을 구분해야만 한다. 구분할 수 없다면 구분해내려고 노력해야겠지. 발판을 타고 반쯤 내려왔을 때에야 나는 입속에서 맴돌던 대답을 웅얼거린다.

그러게요, 어디로 가야 할까요.

결국 내 발걸음이 향한 곳은 번화가 뒤쪽의 좁은 골목이다. 거기에 모텔이며 여관이 많이 있다는 것은 지나다니며 봐서 알고 있었지만 평생 한 번도 가본 일은 없다. 나는 휘황찬란한 색으로 빛나는 간판들을 천천히 읽으며 골목 끝까지 걸어갔다 되돌아온다. 바이올린, , 애플, 프린스. 그중 가장 허름하고 촌스러운 곳을 고르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나를 보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건만 무슨 죄라도 짓는 것마냥 가슴이 두근거린다. 나는 유골함을 안고서 반대쪽 손으로 가슴을 툭툭 친다.

, 쫄지 마. 이 정도 일에 쫄아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

프런트 직원은 나를 힐끗 쳐다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나는 숙박비로 칠만원을 치르고 카드키를 받는다. 단지 잠을 자는 것뿐인데 그만한 돈을 내야 한다니, 솔직히 입이 떡 벌어졌지만 막상 방에 들어와보니 이해가 된다. 엄청나게 큰 침대와 벽걸이형 텔레비전에 화장실에는 욕조까지 있다. 침구 각이 딱 잡혀 있어 흐트러뜨리기도 미안한 침대에 앉아 빵빵한 베개를 잠시 쓸어보다, 이윽고 드러눕는다. 그리고 다음 순간, 깜짝 놀라 나도 모르게 입에서 비명이 터진다. 천장의 웬 시꺼먼 얼굴의 여자와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다.

다시 보니 천장은 온통 거울이다.

뭐야 미쳤나, 저기에 왜 거울을 붙여놨어. 머쓱해져서 중얼거리지만 정말로 모르는 건 아니다. 안 그래도 이곳에 들어오기로 마음먹은 순간부터 그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땅 사람들이 이곳에 오는 이유에 대해서. 뭐 개중에는 나처럼 단순히 며칠 묵을 곳이 필요한 사람도 있겠지만 숙박 업소가 정말 숙박만을 위한 곳이라고 믿을 만큼 순진하지는 않다. 그들은 여기 섹스를 하려고 온다. 단지 그걸 위해서 이 깨끗한 방을 구매하는 거다. 나는 거울 속에 누운 여자를 빤히 바라본다. 나처럼 이 거울 속에 담겼을 많은 땅 사람 여자들을 생각하면서. 그러자 귀 옆으로 쏟아지던 원의 뜨끈한 숨결이며 앙상한 팔이 갑자기 기억 속에서 튀어나온다. 순식간에 생생해진다. 꼭 지금 여기 있는 것처럼. 물론 안다. 원은 이곳에 들어올 수 없다. 이 고요하고 깨끗한 방에, 일박에 칠만원이나 하는 방에. 나는 거울을 빤히 바라본다. 그 속에 어색하게 누운 여자가 돌연 비굴한 미소를 짓는다.

나는 벌떡 일어난다.

벽에 붙은 여러 개의 버튼을 아무거나 눌러대자 삑 소리와 함께 방은 순식간에 빛 한 점 없이 캄캄해진다. 이렇게까지 어두워질 줄은 몰랐다. 더듬거리며 돌아오다 무언가에 정강이를 세게 부딪혔지만 어쨌든 침대를 찾아 도로 드러눕는다. 이제야 좀 살 것 같다. 정말로 고요하다. 잠자리에 누우면 으레 들렸던 바람 소리며 창문 흔들리는 소리가 여기엔 없구나. 그러니 아주 깊은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다. 원한다면 영원히. 나는 눈을 감는다.

그러나 지금, 거울 속 나도 눈을 감고 있을까?

아니.

나는 무엇에 찔린 사람처럼 눈을 번쩍 뜬다. 천장을 노려본다. 그러자 거울에서 도로 튕겨나와 내 온몸으로 쏟아지는 것들을 느낄 수 있다. 적의, 혐오, 두려움, 그리고 그 너머에 희미하지만 선명하게 도사린 저것은 기쁨. 어쩔 수 없는 기쁨이다. 어제의 거기가 아닌 오늘의 여기에 있기 때문에. 더는 돌아가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그 모든 것들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나는 문득 생각난 듯 중얼거린다.

너는 이제 뭐가 될 테냐.

그리고 거울과 나 사이의 어두운 공간이 내 목소리를 쑤욱 흡수하는 순간, 나는 그 질문의 답을 내가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뭐든지. 나는 뭐든지 될 수 있고 할 수 있다. 그럴 만한 돈이 있으니까. 이 돈은 오롯이 내 것이다. 누구에게도 주지 않아도 되는 돈이다. 돈이 생기면 주고 싶었던 이들은 이제 모두 나를 떠났으니까.

돌아눕는다. 어둠 속 저편에 동생의 유골함이 희고 둥근 실루엣으로 떠올라 있다. 그것을 잠깐 바라보다, 나는 다시 눈을 감는다. 먼 곳에서부터 기다렸다는 듯 미끄러져 다가오는 무언가를 감각하면서, 나는 그것이 내 미래라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그 얼굴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분간하기도 전에 그만 깊이깊이 잠들어버리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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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 중개인은 시종일관 공손한 태도로 나를 대한다. 나는 그가 내어준 아이스커피를 마시며 자동차 조수석에 앉아 몇 개의 매물을 구경하러 돌아다니고, 그중 가장 커다란 창문이 있는 집을 골라 계약한다. 번화가에서 두어 블록 떨어진 주상 복합 오피스텔 건물의 십사층이다. 원룸이지만 크지요, 게다가 햇빛이 잘 드는 집이라 정말 마음에 드실 거예요. 중개인은 마치 자기가 그 집을 만들기라도 한 것처럼 자랑스레 얘기한다. 정말로 그렇다. 창문을 활짝 열면 기다렸다는 듯 쏟아져 들어오는 빛. 뒷덜미를 태우지 않는 적당한 따사로움.

그 집에 필요한 가구와 생활 집기를 마련하는 데까지는 생각보다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이미 갖춰져 있는 세탁기와 냉장고, 에어컨을 제외한 나머지 물건들을 전부 새것으로 구입했기 때문이다. 나는 모든 부분을 꼼꼼히 따져가며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제외시킨다. 꼭 그런 것들을 몇 번이고 구입해본 사람처럼. 밝은 원목으로 된 침대 프레임에 라텍스 매트리스를 깔고 점원의 추천으로 구입한 얇은 토퍼를 그 위에 얹는다. 부드러운 순면 재질의 연보라색 침구는 물론 베개 커버와 한 세트다. 침대 옆에는 낮은 협탁, 협탁 위에는 조화를 꽂은 유리병. 그런 식으로 빈 공간을 차근차근 채워나간다. 이런 것을 사는 데 쓸 거라곤 평생 생각하지 않았던 것들에 돈을 쓰면서.

그 과정에서 나는 많은 것들을 새로이 배운다. 암막 커튼을 치면 낮에도 불을 켜야 할 만큼 방 안을 어둡게 만들 수 있다는 것, 벽걸이 에어컨은 일 년에 한 번씩 청소를 해주는 것이 좋으며 오만원 정도를 내면 출장 청소를 받을 수 있다는 것, 관리비라는 것을 매달 내야 하는데 그것은 수도 전기 가스와는 별개라는 것 등등. 나는 갓 태어난 아기처럼 그 모든 사실들을 온몸으로 흡수한다. 이런 것을 모르고 살았던 나 자신과 이런 것들을 전부 알고 살아온 사람들을 모두 신기하게 여기면서.

살림살이가 얼추 갖추어진 어느 날 아침, 나는 전기밥솥을 사러 가기 위해 집을 나선다. 목적지는 집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대형 전자마트다. 이미 전자레인지와 청소기를 구입한 적이 있는 곳이다. 허리를 숙이며 인사한 점원이 금세 나를 주방 가전 코너로 안내해준다. 나는 다양한 색깔과 크기와 기능을 갖춘 밥솥들 앞에서 원하는 바를 정확히 이야기한다. 혼자 사는데요. 그래도 밥은 자주 해 먹을 거예요. 백미밥보다는 잡곡밥 위주로. 이왕이면 찜이나 죽도 되는 거였으면 좋겠어요. 점원은 정확히 내 요구에 맞는 물건을 보여준다. 작지만 깔끔하고 심플한 디자인이라 주방 미관을 해치지 않고, 다기능인데다 대기업 제품이라 A/S까지 꼼꼼하다는 밥솥. 나는 그것의 뚜껑을 여닫아보고 사용 설명서에 나와 있는 다양한 기능들을 읽어본 뒤 구매를 결정한다. 박스에 든 밥솥을 품에 안고 전자마트를 나서는데, 아무래도 이걸 들고 집까지 걸어가기는 힘들 것 같다. 마침맞게도 다가오는 빈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돌아온다. 도착해서 밥솥을 상자에서 꺼내 싱크대 옆 상판에 올려놓는다. 전원을 꽂자 금세 정상 작동을 알리는 초록빛 불이 들어온다. 나는 그 불빛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내가 산 것들에 대해서.

물론, 그것은 밥솥뿐만이 아니다.

필요한 것을 사기 위해 고민하는 데 드는 시간. 남들이 일을 하는 한낮에 밥솥을 사러 가는 여유. 올바른 구매자가 되기까지 필요한 실패 경험, 거기에 드는 돈과 시간. 점원의 인사와 친절한 안내. 내가 원하는 조건에 맞는 밥솥을 가져다주고 얌전히 서서 기다린 점원의 시간. 가격보다는 기능과 디자인에 중점을 두는 선택. 내가 이 밥솥 정도는 살 수 있는 사람임을 나타내기 위해 갖춘 옷차림과 말투와 행동. 그 모든 것들이 내가 돈으로 산 것들이다. 돈이 없으면 무엇도 그냥 얻을 수 없다. 무엇도 공짜로 생겨나지 않는다. 그 무엇도.

나는 밥솥 안에서 쇠로 된 내솥을 꺼낸다. 쌀을 두 컵 붓고 물로 문질러 씻은 뒤 밥물을 잡고, 도로 집어넣어 취사 버튼을 누른다. 쿠쿠가 맛있는 취사를 시작합니다! 밥솥이 경쾌한 소리로 외친다. 나는 물 묻은 손을 옷 앞섶에 문질러 닦으며 밥솥을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본다. 밥이 잘될까. 밥솥마다 물 양이 다르다고들 하던데. 하지만 잘되지 않으면 또 어떤가. 진밥이든 된밥이든, 아니 도저히 먹지 못할 것이 나오더라도 상관없다. 버리고 다시 지으면 되니까. 실패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이깟 밥 한 솥쯤이야. 나는 밥솥 앞에 짝다리를 짚고 서서 기다린다. 내가 구입해야 할 또다른 무언가가 떠오르기를.

밥솥이 조금씩 칙칙거리는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언제까지라도 기다릴 수 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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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며칠 뒤, 나는 원을 집으로 초대한다.

원은 청소 일을 마치고 새벽에 들르기로 했건만 나는 아침부터 괜히 부산을 떤다. 현관이 심심해 보이는 것 같아 보송보송한 깔개를 사다 깔고, 충분히 깨끗한 변기에 세정제를 듬뿍 뿌려 박박 닦아낸다. 너무 멋을 부렸나 싶어 손님용 슬리퍼는 신발장 구석에 보이지 않게 숨겨둔다. 그러고는 일층에 있는 마트에 내려가 한참을 돌아다니다, 과일 코너 앞에서 고민에 빠진다. 사과는 예쁘게 깎을 자신이 없고 바나나는 너무 신경 안 쓴 것 같은데 그렇다고 체리나 망고는 왠지 허세를 부리는 것처럼 느껴진다. 한참 망설인 끝에 딸기 한 팩을 장바구니에 담는다. , 그러고 보니 과일용 포크가 없구나. 포크를 사는 김에 예쁜 무늬의 접시도 몇 장 산다. 그리고 뭐가 더 필요할까. 슈퍼를 빙빙 돌다가 주류 코너를 지나며 그 앞에 서 있는 한 여자를 본다. 반바지에 슬리퍼를 신고 머리를 질끈 묶은 내 또래의 그 여자는 휴대폰을 한쪽 어깨와 볼 사이에 끼운 채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다. 맥주도 사? 뭘로? 카스 아님 테라? 흑맥주도 있네. , . 모자르면 이따 내려와서 더 사지 뭐. 그러면서 여자는 길쭉한 맥주 캔을 몇 개 집어 자신의 장바구니에 넣고 돌아선다. 그 모습에서 나는 빠르게 학습한다. 친구가 놀러 올 때는 맥주를 사는 것이 일반적이며 한 번에 보통 네 캔 정도를 사간다는 것을. 여자가 떠난 뒤, 나는 여자가 고른 것과 똑같은 맥주 네 캔을 내 장바구니에 넣는다. 원이 술을 마시는 건 본 적이 없지만 혹시 마시고 싶어할지도 모르니까.

집으로 돌아와 사온 것들을 정리해 냉장고에 넣어둔다. 이 정도면.

그리고 새벽 두시쯤, 드디어 초인종이 울린다.

벌떡 일어나 무심코 현관으로 달려가려다 아차 하고 돌아선다. 이 건물에 출입하기 위해서는 카드키를 갖고 있거나 공동 현관의 비밀번호를 알고 있어야 하며, 그렇지 않은 경우 방문하려는 집의 호수를 입력해 인터폰 호출을 해야 한다는 사실에 아직도 익숙해지지 못한 탓이다. 벽에 붙은 인터폰 속, 손바닥만한 화면을 통해 원이 보인다. 카메라가 천장에 달려 있어 원의 더벅머리와 이마 꼭대기가 크게 확대되어 있다. 원을 이 각도에서 보는 것은 처음이다. 어릴 때부터 나보다 키가 한 뼘은 더 컸으므로. 일을 마치고 왔으니 당연히 그렇겠지만 피곤해 보인다. 여기저기 여드름이 돋은 푸석한 피부와 왠지 뚱해 보이는 눈초리. 여전하구나. 반가움에 얼른 열림 버튼을 누르려다 말고, 나는 갑자기 멈칫한다.

내가 이것을 누르지 않는다면.

원은 들어올 수 없을 것이다. 잠긴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들어올 수 없는 거야 물론 구름 위에 살 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지금 이 경우는 다르다. 나는 원이 무슨 행동을 하는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집안에서 훤히 지켜볼 수 있다. 원이 화를 낼 수도 있고 문을 걷어찰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내 집 문이 아니다. 십사층 아래 있는, 몇 겹의 문 중 겨우 첫번째 문일 뿐이다. 원은 절대로 그 높이를 극복할 수 없을 것이다. 나의 허락 없이는. 내가 고작 이 작은 버튼 하나를 눌러주지 않는다면.

열림 버튼을 누른 뒤, 원이 공동 현관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나는 끝까지 지켜본다.

잠시 후 초인종이 다시 울린다. 현관문을 여니 지친 모습의 원이 서 있다. 나는 원이 들어올 수 있게 한쪽으로 비켜준다. 원아! 외치고 싶은 마음을 눌러 참으면서. 원은 답지 않게 조금 쭈뼛거리며 현관으로 들어선다. 그러고는 신발을 벗지 않은 채 서서 집안을 휘둘러본다.

집 좋네.

……어어.

나는 왠지 부끄러워져 원의 눈을 피한다. 원은 신발을 아무렇게나 벗어놓고 깔개 위로 올라선다. 자연스럽게, 자연스럽게. 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냉장고 쪽으로 돌아선다.

뭐라도 먹을래? 배고프지 않아?

밥은 됐어. 목말라. 마실 거 없냐.

아 맥주, 냉장고에 맥주 있는데.

너 이젠 술도 마셔?

아무 저의도 없는 질문임을 알면서도 나는 움찔한다. 대답하지 않고 냉장고에서 차게 식힌 맥주 캔과 미리 씻어서 손질해놓은 딸기 접시를 꺼내 식탁 위에 올려놓는다.

먹어.

, 진수성찬이네.

그렇게 말하지만 원은 식탁에 앉을 생각이 없어 보인다. 현관 앞에 선 그대로 신발장 문을 열어본 원은 그 안을 한참 들여다본다. 이크, 저 안에 손님용 슬리퍼를 넣어놨는데. 나는 이유 없이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원이 하는 짓을 지켜본다. 이번엔 현관 옆 싱크대로 눈을 돌린 원은 씻어서 엎어놓은 냄비와 컵을 보더니, 팔을 뻗어 싱크대 위 상부장을 열고는 다시 닫는다. 그다음은 냉장고다. 냉장고를 벌컥 열고는 뭘 하는 것인지 머리를 처박곤, 한참 동안 나오지 않는다.

, 뭐 하냐. 먹으라니까.

잘 해놓고 사네. 존나 부자처럼.

냉장고 문을 닫은 원이 식탁으로 다가와 앉는다. 나는 원의 얼굴을 물끄러미 본다.

화났어?

내가 화가 왜 나.

포크를 집어든 원이 딸기를 콱 찍고는 과장된 동작으로 입을 움직이며 우적우적 씹는다. 화가 났다는 것을 감추려는 행동이라는 건 알 것 같은데 너무나 어색하다. 그럴 수밖에, 나는 원이 화내는 모습은 여러 번 보았지만 화를 참는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까. 이윽고 원은 두번째 딸기를 포크로 찌른다. 마치 누군가의 배를 찌르듯이. 그 기세에 눌려 나는 절대 하지 않기로 다짐했었던 질문을 해버린다.

방송 봤어?

봤지. 잘 찍었던데 아주.

즉답. 오히려 당황한 것은 내 쪽이다. 나는 괜히 포크를 만지작거리다 딸기 하나를 입에 넣는다. 차갑고 새콤하다.

그래서, 얼마 받았냐?

……그건 왜?

그냥 궁금해서 묻는 건데. 물어보지도 못하냐?

그 말에 돋친 가시를 못 알아차릴 내가 아니라는 것쯤은 원도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가만히 혀끝을 깨문다.

……춘 여사는 잘 지내?

잘 있겠냐, 집이 헐리게 생겼는데.

웃기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 어깨를 으쓱한 원이 마지막 남은 딸기 두 알을 한꺼번에 찍어 입에 넣는다.

할머니는 발판 봐야 돼서 아무데도 못 가. 사람들 다 내려가고 나면 그때 마지막으로 가겠대.

……그렇겠구나.

침묵. 빈 딸기 접시에 분홍빛 물이 조금 고여 있다. 이윽고 원이 의자를 드르륵 끌며 일어선다.

잘 사는 거 봤으니까 됐고. 나 갈게.

간다고? , 왜 벌써 가?

나도 모르게 따라 일어서는데 성큼성큼 걸어간 원은 이미 현관에서 신발을 신고 있다. 정말로 빨리 떠나고 싶은 사람처럼.

, 잠깐만. 조금만 더 있다 가. 밥도 안 먹었잖아.

이 시간에 뭔 밥이야.

그래도 이렇게 잠깐 있다 금방 가는 게 어딨어.

나는 원의 티셔츠 자락을 검잡고 말한다. 본의 아니게 조금 울먹이는 목소리가 나온 것도 같다. 그러자 원은 잠시 내 얼굴을 바라본다. 이윽고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표정이 원의 얼굴에 스쳐지나갔다고 생각한 순간, 원이 씨익 웃으며 말한다.

그럼, 나 여기서 살까?

나는 눈을 크게 뜬다. 원은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다는 듯 몸을 돌려버린다. 짧은 찰나, 그 사실이 무참하게도 안심이 된다. 어차피 그게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건 원 스스로도 알고 있다는 뜻이라서. 내가 그걸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지 않아도 되어서.

잠깐만, 갈 땐 가더라도 잠깐만.

나는 원을 현관에 세워놓은 채 침대로 달려간다. 베개 아래 밀어넣어놓았던 것을 가져와 원에게 쥐어준다. 뭐야, 하며 내려다본 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다.

……

받아. 제발. 받아줘.

이 씨발 사람을 좆으로 봐도 정도가 있지……

많이도 아니야. 후원금 받은 거 함부로 쓰면 문제될 수도 있다고 해서 진짜 많이 안 넣었어. 진짜야.

두꺼운 돈봉투가 바닥에 툭, 떨어지며 무거운 소리를 낸다. 나는 그것을 잽싸게 주워 다시 원의 품에 우격다짐으로 밀어넣는다. 원의 몸에서 시큼한 땀냄새가 난다.

제발 받아. 제발 좀. 앞으로 다신 나 안 봐도 좋으니까.

진심으로 한 말이다. 상상력이 좋은 편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현금 인출기 앞에서 얼마를 인출해야 적당할지 고민하는 내 모습을, 돈을 봉투에 넣으며 이 봉투를 쥐어주는 장면을 상상하고 있는 나를. 원은 앞으로 다시는 나를 보고 싶지 않을 것이다. 주제도 모르는 년, 구걸해서 팔자 고친 주제에 제가 뭐라도 된 줄 알고 사는 년이라고 평생 나를 욕할 것이다. 상관없다. 정말로 상관없다. 이 돈을 받아준다면. 원이 거칠게 몸을 돌린다. 나는 나대로 온몸에 힘을 주어 밀어붙인다.

제발, 자존심 세우지 마. 받으라고.

씨발 니가 뭔데?

자존심 부릴 때야? 병신아, 니네 할머니랑 동생들 생각해.

거세게 저항하던 원의 몸이 그만 딱딱하게 굳는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나는 원의 팔과 몸 사이에 돈봉투를 끼워 넣는다.

가져가. 가져가서 빨리 방이든 뭐든 구하라고. 고집 부리지 말고.

현관에 켜진 센서 등 불빛 때문에 원의 얼굴은 원래보다 훨씬 더 수척해 보인다. 원은 잠시 나를 내려다보더니 뭐라고 말할 것처럼 입을 벌린다. 나는 잠자코 기다린다. 무슨 말이든 들어줄 준비가 된 채로. 저주든 감사든 뭐든지 좋다. 그러나 한편으로, 나는 원이 결국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을 안다. 과연 원은 벌린 입을 힘없이 다물어버리고 만다. 그러고는 돈봉투를 바지 뒷주머니에 쑤셔넣고 미련 없이 나가버린다. 이윽고 현관문 도어락이 잠기는 소리. 뒤이어 터벅터벅 복도를 걸어가는 발소리가 들린다.

그제서야 나는 현관에 주저앉는다.

온몸이 땀에 푹 젖고 관자놀이가 두근두근 날뛴다. 꼭 무슨 전쟁이라도 한바탕 치른 것 같다. 나는 방금까지 원이 서 있던 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아침에 깨끗하게 닦아놓은 현관 타일에 신발 자국이 까맣게 나 있다. 그 자국에 대고 나는 낮게 중얼거린다.

집이 생겼으니 친구를 초대하는 게 당연하잖아.

센서 등이 툭 꺼진다. 너의 독백에 스포트라이트 따위는 비추고 싶지 않다는 듯이. 상관없다. 나는 어둠 속에서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 말한다.

씨발 그럼 나랑 바꾸든가.

너는 할머니도 동생도 다 있잖아.

존나 씨발 지는 다 있으면서.

훌쩍 일어서자 센서 등이 다시 환히 켜진다. 나는 식탁으로 걸어가 물티슈를 몇 장 뽑아온다. 현관에 엎드려 타일을 깨끗이 닦아낸다. 얼룩은 금세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지저분해진 물티슈를 구겨 쓰레기통에 던져 넣는다. 식탁 위에는 원이 손도 대지 않은 맥주 캔이 겉면에 물기가 맺힌 채 그대로 놓여 있다. 가져가라고 할걸, 무심코 생각했다가 이내 말도 안 되는 생각임을 깨닫고 그만둔다.

맥주 캔을 도로 냉장고에 집어넣으며 나는 원이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상상한다. 심야버스가 다니는 정류장까지 터벅터벅 걸어간 원은 정류장 벤치에 앉아서야 봉투를 열어볼 것이다. 돈을 세어보고 이 돈으로 당장 할 수 있는 것들을 가늠해볼 것이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마음이 그득해질 것이다. 내게 고마워해야 하는지 욕을 해야 하는지 몰라 버스가 올 때까지 휴대폰을 쥔 채 망설일 것이다. 그리고 버스를 타고 구름으로 돌아가겠지. 할머니가 내려 준 발판을 타고, 가족이 기다리는 낡고 좁은 집으로.

그런데 나는 정말 바꾸고 싶은 게 맞나.

침대에 풀썩 드러눕는다. 푹신한 매트리스가 기다렸다는 듯 등을 감싼다. 누구도 나를 이렇게 포근하게 안아준 적은 없었다. 단 한 사람도. 나는 천장을 바라보다 눈을 감는다. 집안은 고요하고 아늑하다. 이제 아무도 이 집에 오지 않을 것이다. 내가 허락하지 않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