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국 일층 카페는 한적하다. 드문드문 오가는 사람들 대부분이 방송국 로고가 찍힌 명찰을 지니고 있다. 내 앞에 앉은 김노을의 목에도 같은 것이 걸려 있다. 다큐3팀 김노을. 명찰 속, 지금보다 훨씬 앳된 얼굴의 증명사진을 나는 티나지 않게 눈여겨본다. 한쪽 눈에 하트 모양 스티커가 붙어 있다.
김노을이 말한다.
잘 지내는 것 같네요.
나는 웃으며 대답한다.
네, 덕분에요.
사실이다. 정말로 덕분에 잘 지내고 있으니까. 김노을은 후후 웃고는 입을 쭉 내밀어 커피를 마신다. 저 커피, 그리고 우리 둘 사이에 놓인 모카 초콜릿 케이크는 내가 산 것이다. 만나자고 한 쪽이 계산하는 게 당연하니까. 계산대 옆에, 방송국 직원은 명함을 제시하면 십 퍼센트 할인을 해준다는 안내판이 있었는데도 김노을은 자기 명함을 내놓지 않았다. 마치 이 정도 금액쯤이야 낼 수 있지 않느냐는 듯이. 그 사실이 왠지 나를 기쁘게 한다. 꼭 무슨 증명이라도 얻어낸 것만 같은 기분이다.
멀리까지 오라고 해서 미안해요. 요즘 방송국이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는 시즌이거든요.
아니에요. 덕분에 이렇게 방송국 구경도 해보고 좋죠 뭐.
이왕이면 하늘씨 새로 얻은 집에도 한번 가보고 싶었는데, 도저히 짬이 안 나더라고요. 이렇게 내려와서 커피 마시고 있는 것도 우리 팀원들이 보면 배신자라고 난리 칠 거예요.
김노을이 너스레 떨며 과장된 동작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척한다. 나도 과장되게 웃는다. 주책맞은 건 그대로구나. 말마따나 김노을의 얼굴은 격무에 시달려 피곤해 보인다. 바쁘다는 말을 자꾸 하는 건 어서 용건을 말하라는 재촉일 것이다.
저기 다른 게 아니라,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뭔데요? 뭐든지 물어봐요.
그…… 방송 말인데요. 혹시 제가 원하면 영상을 내릴 수 있나요?
김노을의 표정이 변하기 전에 나는 빠르게 말을 잇는다.
방송국 홈페이지 들어가면 다시 보기 메뉴에서 볼 수 있잖아요. 유튜브에도 올라가 있고. 그거 언제까지 공개돼 있는 건가 궁금해서요. 좋은…… 영상도 아니고 해서.
말을 맺은 뒤, 구차해 보이지 않도록 가슴을 활짝 편다. 그러나 사실은 어젯밤부터 계속 상상했다. 이렇게 말하면 김노을이 뭐라고 대답할지를. 어머 간사한 것 좀 봐, 화장실 들어갈 때 나올 때 마음 다르다더니, 그거 찍어서 팔자 고친 주제에 이젠 쪽팔리다 이거죠? 상상 속 김노을이 나를 마구 비난했으므로 거기에 대한 대답도 준비해놓았다. 제 얼굴이잖아요.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거잖아요. 당신 같으면 좋겠어요? 내가 거지였고 내 동생도 거지라서 죽었다는 게 어딘가에 영영 박제되어 있는데, 당신 같으면 좋겠냐고요. 하지만 예상과 달리 김노을은 흔쾌히 대답한다.
아, 내려줄게요.
……그럴 수 있어요?
그럼요. 원래 정해진 게시 기한이 있긴 한데, 다큐멘터리 같은 경우엔 본인이 원치 않으면 영상을 내려주기도 해요. 그렇게 해달라는 사람들도 많고요. 워낙 민감하고 개인적인 얘기들이니까. 아무튼 이따 올라가서 담당 부서에 얘기 전해둘게요.
나는 대답 대신 케이크를 한 조각 잘라 입에 넣는다. 쌉싸름한 단맛이 입안에 핑 돈다. 내 얼굴에서 안도감이 느껴졌는지, 김노을이 나를 보며 웃는다.
아이구, 그거 물어보려고 이 먼 길을 왔어요? 그냥 전화나 문자하지.
아 그냥…… 얼굴도 뵐 겸 해서요. 감사하다는 인사도 제대로 못 드렸고.
감사는 무슨? 내가 하늘씨한테 고맙죠. 그 다큐 잘 빠졌다고 윗선에서도 되게 좋아했어요. 시청자들 반응도 좋았고.
잘 빠졌다는 건 그러니까 내가 얼마나 가난하고 불쌍한지가 잘 드러났다는 거겠지. 누구나 절로 동정심이 들 만큼. 그러나 나는 그런 말을 하는 대신 케이크를 한 입 더 먹는다. 이 케이크도 그 동정심 덕분에 살 수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전혀 계획하지 않았던 말을 내뱉는다.
있잖아요. 그…… 장례식 하고 나서, 어땠어요?
응? 무슨 장례식?
노을씨 어머니 돌아가셨을 때요.
김노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빤히 바라본다. 나는 완전히 당황해서 테이블 아래로 양손을 쥐어짠다. 미쳤나봐, 왜 이런 말을 한 거지. 그러나 김노을은 이내 엷은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힘들었죠. 엄청. 근데 시간 지나니까 괜찮아졌어요.
……괜찮아져요?
그럼요. 그 당시엔 죽을 것 같아도, 봐요. 안 죽었잖아요. 세상에 안 괜찮아지는 일은 없어요. 모든 게 다 괜찮아져요.
……네.
너무 곱씹지 말고, 그렇다고 너무 곱씹지 않으려고 애쓰지도 말고. 시간아 얼른 가라, 얼른 가라 하면서 버티면 어느 순간 괜찮아져 있어요. 이건 진짜 내가 장담해. 나아질 거예요.
나는 그저 웃어 보인다. 깊은 위로를 받은 사람처럼 보이려고 애쓰면서. 시간이 지나면 나아진다는 건 나도 경험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나아질 뿐이지 아예 사라지지는 않는다. 흐릿하다가도 순간순간 되살아나 생생해지는 고통, 고통들. 나는 그것에 대해 묻고 싶었다. 김노을도 그런지. 당신의 상실도 내 상실과 같은지.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더 하지 못한다.
힘내요.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고.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거면 뭐든지 도와줄게요.
……감사합니다.
감사하긴 뭘.
김노을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자기 몫의 커피를 쪽 빨아먹고는, 얼음만 남은 컵을 내려놓는다. 그것을 신호로 나는 남은 케이크 조각을 한 번에 푹 찍어 입에 욱여넣는다.
바쁘신데 올라가서 일하세요. 저도 이제 가볼게요.
그럴래요? 그래요 그럼. 영상은 내려가는 데 시간 좀 걸릴 거예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트레이에 빈 케이크 접시와 포크, 컵을 챙겨 일어선다. 김노을도 부산스럽게 일어나 의자에 걸쳐두었던 겉옷을 입는다. 그러고는 갑자기 내 한쪽 어깨를 꼭 잡더니,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며 중얼거린다.
아이고, 아직 너무 애긴데.
내가 깔깔깔,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린 건 김노을과 헤어지고, 방송국 건물을 나와 한참을 걷고 난 뒤의 일이다. 갑작스런 폭소에 지나가던 행인들이 깜짝 놀라지만 아랑곳없다. 나는 거리 한가운데 멈춰 서서 허리를 꼬부리고 웃는다. 웃겨 정말, 누가 누구보고 애기래. 지가 더 애기처럼 생겼으면서. 아하하, 아하하하. 배가 아플 때까지 실컷 웃고 난 뒤에야 나는 허리를 편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다시 걷기 시작한다.
50
눈을 뜨니 이미 해가 중천이다. 누운 채 암막 커튼을 걷으니 햇빛이 왈칵 쏟아져 들어온다. 늘어지게 기지개를 한 번 켠 뒤, 부스스 일어나 식탁으로 향한다. 며칠 전 새로 산 커피 머신에 캡슐을 집어넣고 커피를 한 잔 내린다. 금세 고소한 커피 냄새가 집안을 가득 채운다. 냉동실에서 얼음을 한 주먹 꺼내 커피잔에 그득 채워넣고 홀짝홀짝 들이킨다. 뱃속에 차가운 것이 들어가니 잠이 싹 깨는 느낌이긴 하지만 별 맛은 없다. 하지만 아침엔 으레 다들 커피를 마시니까. 커피잔을 들고 식탁에 앉아 방 안을 한번 둘러본다. 어디 더 필요한 것이 없는지, 사야 한다고 생각하고 잊어버린 것은 없는지. 없는 것 같다. 아니, 오히려 물건이 너무 많아서 좀 어수선하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다. 당장 식탁 위만 봐도 그렇다. 조그만 이인용 식탁 위에 커피 머신과 캡슐 거치대를 비롯해 티슈 케이스, 꽃병, 그림 액자, 시리얼 디스펜서 같은 것들이 다닥다닥 놓여 있어 정작 밥그릇 하나 놓기가 어려울 지경이다. 하나하나 떼어놓고 보면 다 예쁜 물건들인데 이렇게 한데 뭉쳐놓으니 왠지 지저분하고 정신없어 보이는 것 같다. 나는 그림 액자를 집어 이리저리 위치를 바꿔본다. 이름은 모르지만 무슨 유명한 화가의 그림이라고 해서 산 것인데, 어디에 놓아도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 결국 포기하고 있던 자리에 그냥 두기로 한다. 뭐, 상관없다. 오후의 햇살에 방 안은 온통 밝고 고요하고, 이 안에 놓인 모든 게 그런 대로 만족스러우니까. 나는 커피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얼음이 달그락달그락 부딪는 소리를 듣는다. 공중에 떠도는 먼지가 빛줄기 속에서 반짝거린다.
자, 이제 뭘 할까.
뭘 할 수 있을까.
은행 어플을 켠다. 계좌를 만들러 갔을 때 은행 직원에게 앱 사용법을 배운 이후 하루에 대여섯 번씩은 하는 짓이다. 얼마인지 뻔히 알고 있지만 그래도 매번 일십백천만, 하면서 손가락으로 화면을 짚으며 숫자를 세어본다. 아직 칠천만원 정도가 남아 있다. 칠천만원 어치의 무언가를 해볼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그래, 여행을 떠날 수도 있다. 비행기를 타보기는커녕 다른 도시로 가본 적도 없지만, 이만한 돈이면 지구 어디든 가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일하던 고깃집 벽에 붙어 있던 소주 광고 포스터를 떠올린다. 비키니를 입은 예쁜 여자가 허리를 숙이고 서 있던, 야자수가 늘어선 에메랄드빛 해변. 그런 곳에 가보면 어떨까.
아니면 공부를 할 수도 있다. 난 머리가 좋은 편은 아니지만 꼭 책상 앞에 앉아 하는 공부만 공부인 건 아니니까. 기술을 배워놓으면 유용할지도 모른다. 커피 만드는 일을 배워보면 어떨까. 하는 김에 제과제빵도 같이. 나중에 작은 카페를 열 수도 있겠다. 아니면 아주 비싼 물건, 컴퓨터나 자동차 같은 것을 살 수도 있다. 성형 수술을 해서 얼굴을 뜯어고칠 수도 있다. 평생 먹어보고 싶었던 모든 음식을 한꺼번에 차려놓고 먹어볼 수도 있다. 나는 머릿속에서 그 모든 가능성을 하나씩 구체화하며 음미한다. 제각기 다른 맛으로 달콤하고 화려하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물론 재미있지만 단지 상상에 그칠 뿐이라면 이토록 즐겁진 않을 것이다. 진짜 즐거움은 이것들이 정말로 가능하며, 모두 마음만 먹으면 당장 실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에서 온다.
그때, 휴대폰이 한 번 짧게 울리는 바람에 내 상상은 단번에 뚝 끊어진다.
확인하기도 전에 느낄 수 있다. 누구든 간에 반가운 연락은 아닐 거라는 예감을. 한눈에 다 들어오지도 않는 길이의 메시지가 와 있다. 읽기 전에 보낸 이의 이름부터 확인한다. 김연수다. 순식간에 얼굴 근육이 딱딱하게 굳어진다.
하늘아 안녕? 나 연수야... 그날 카페에서 만나고 오랜만에 연락하네 뭐라고 얘기를 꺼내야 할지 아니 내가 이 얘기를 하는 게 맞는지도 모르겠어서 꽤 오랫동안 문자를 쓰고 지우다가 이제야 보내 음... 방송 봤어 솔직히 말하면 네가 그렇게 힘들게 지내는지 난 전혀 몰랐어 동생 얘기도 듣긴 했는데 그게 네 동생일 줄은 꿈에도 몰랐고... 방송 보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 그날 카페에서의 내 행동이 너무 후회되더라 네가 화낸 것도 이해해 네 사정도 모르고 내가 철없는 소리 했지 음... 어떻게 생각할진 모르겠지만 후원 계좌에 내 한 달치 용돈 넣었어 마침 방송 본 날이 용돈 받는 날이었어서... 적은 금액이고 네게 잘 전해질지도 모르겠지만 그날 내 실수에 대한 사과라고 생각해줘 다시 한번 정말 미안해. 다신 나 안 보고 싶대도 이해해 답장도 안 해도 돼 건강하게 잘 지내길 바랄게 진심을 다해서 말해 하늘아 잘 지내
첫 문장으로 되돌아간다. 하늘아 안녕? 안녕? 안녕?…… 순식간에 대여섯 번을 반복해서 읽은 뒤에야 머리에 뜨끈하게 열이 오르는 것이 느껴진다. 나는 별안간 악 소리지르며 휴대폰을 침대에 집어던진다. 물론 그런다고 분이 풀릴 리 없다. 이거 진짜 미친년 아닌가. 어떻게 이렇게 끝까지 개념 없고 자기밖에 모를 수가 있지. 생각할수록 화가 나 돌아버릴 것만 같다. 한 달 치 용돈? 나는 씩씩거리며 벌떡 일어나 방 안을 빙글빙글 돈다. 이불과 커튼과 오후의 햇살이 나를 따라서 돈다. 방금까지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것들이건만, 거기 김연수의 돈이 섞여 있다고 생각하니 이젠 전부 똥물을 덮어쓴 듯 더럽고 끔찍하기만 하다. 도저히 참을 수 없다. 전부 부숴서, 형체를 알아볼 수도 없도록 박박 갈아서 없애버리고 싶다. 나는 분노에 사로잡혀 식탁 위 그림 액자를 확 낚아챈다. 그리고 그것을 바닥에 내리치려다 멈칫한다. 다음 순간, 산산조각나 바닥에 흩뿌려지는 액자를 떠올리자마자 이 액자의 가격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정확히 얼마였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무슨 코딱지만한 게 이렇게 비싸냐고 중얼거리며 값을 치렀던 기억이 난다. 그때를 생각하자 이상하게도 순식간에 머리가 차갑게 식으며 호흡이 가라앉는다.
돈은 그저 돈일 뿐이다.
누구에게서 어떻게 나왔든, 내 손에 들어온 이상 내 것이다.
나는 천장까지 뻗었던 손을 천천히 내려놓는다. 그러고 나니 액자를 깨려고 했던 내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진다. 이게 얼마짜린데. 돈이 무슨 잘못을 했다고. 잘못은 김연수에게 있는데 그것을 이 액자가 대신 감당할 이유는 없다.
나는 침대로 걸어가 털썩 주저앉는다. 긴 한숨을 내쉬고 나서는 아예 푹 드러누워버린다. 천장을 가만히 바라보며 여러 가지 감정이 한데 섞여 마음속에 소용돌이치도록 내버려둔다. 분노, 모멸감, 억울함, 창피함. 이윽고 그 소용돌이가 일으킨 흙먼지가 조금씩 잦아들자, 천천히 다시 드러나는 마음의 밑바닥에는 하나의 생각이 가라앉아 있다.
얼마를 가졌다고 해도, 나는 김연수처럼 누군가에게 사과하기 위해 돈을 내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오래전 가까웠던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듯 그 생각을 들여다본다. 그러다 김연수를 떠올린다. 김연수의 손목에 걸려 있던 가느다란 금팔찌와 가죽 샌들, 노트북에 붙어 있던 토끼 스티커를. 그래, 나도 노트북을 하나 살까. 필요한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하나 갖고 있으면 좋을 테니까. 갑자기 기분이 좋아진 나는 훌쩍 몸을 일으킨다. 그러자 방 안의 모든 것은 어느새 다시 평화롭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돌아와 있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나는 옷장을 열고 새 옷을 꺼내 입는다. 이것들을 모두 버리려고 하다니, 정말 멍청한 짓을 할 뻔했다고 생각하면서.
51
인공 강우제가 뿌려지기 전날 밤, 나는 구름 아래로 향한다.
혹시 아는 사람이라도 마주칠까 싶어 일부러 조금 떨어진 곳에 택시를 세웠으나 그럴 필요 없는 일이었다. 거리는 텅 비어 있었으니까. 가게들은 모두 문을 닫은 지 오래된 듯하고 불이 켜진 집도 없다. 나는 챙 넓은 모자와 마스크를 쓴 채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생전 처음 오는 곳에 지금 막 도착한 사람처럼. 가장 가까운 가로등에 커다란 대자보가 붙어 있다. 나는 그것을 천천히, 골똘하게 읽는다. 위험, 추락물 주의. □월 □일 오전 9시부터 ○○동 구름 철거를 위해 인공 강우제가 살포될 예정입니다. 주민 여러분들은 안내된 장소로 대피를 부탁드리며 주차된 차량은 지하 또는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주시길 당부드립니다. 아래에는 대피소들의 위치가 표시된 약도가 그려져 있다.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대피소는 마침 내가 졸업한 중학교다. 그것을 보니 실감이 좀 나는 것 같다. 정말로 하는구나. 그러고 보니 건물 꼭대기마다 넓은 강철 그물망이 이어져 있다. 마치 거인이 쳐둔 그물 같다. 내일이면 분홍색 빗방울과 함께 온갖 것들이 떨어져내릴 텐데, 저런 그물 따위로 그걸 다 막을 수 있을까.
길고양이 한 마리가 내 앞을 쏜살같이 가로질러 달려간다.
소리없이 걷는다. 이윽고 익숙한 골목에 접어든다. 예전에 일하던 고깃집이 있는 골목이다. 역시 문이 닫혀 있다. 손차양을 만들어 유리창에 대고 안을 들여다본다. 음료 냉장고의 흰 불빛만으로 가늠하는 가게 안은 기억 속 그대로인데 어딘가 좀 낯설어 보인다. 실제로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건만, 여기서 일했던 것이 아득한 옛날 일 같다.
계속 걷는다. 언젠가 네일 아트를 받았던 네일 숍을 지나고 김연수와 만났던 카페를 지난다. 그리고 조금 더 걸어가자 마침내 발판이 나타난다.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습관적으로 주변을 둘러본다. 영애 엄마가 여기서 내게 베이비파우더 통을 던졌었지. 그날은 아주 더웠고 나는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간다. 발판은 내려와 있다. 항상 그랬듯이. 두터운 쇠로 된 발판이 가로등 불빛을 받아 검게 빛난다. 발을 올려놓는 부분이 반들반들하게 닳아 있다. 나는 발판을 향해 손을 뻗는다. 손잡이를 꽉 쥐며 차고 익숙한 쇠의 감촉을 느낀다. 그러다 무심코 위를 올려다본다.
저 높이 새까맣게 보이는 구름이 그저 까마득하다.
수천 번을 오르내렸던 곳인데도.
그제서야 나는 내가 왜 이곳에 왔는지 깨닫는다. 나는 이 발판을 보러 온 것이다. 내가 이제 평생 발을 디딜 일 없는, 그러므로 앞으로 더이상 발판이라고 부르지 않아도 되는 이것을.
어둠 속에서 발판은 조용하게 웅크려 있다. 마치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내가 당장이라도 올라탈 것을 안다는 듯이. 나는 가만히 발판을 쏘아본다. 살아온 날들이 지독하게 길고 재미없는 한 편의 농담 같다고 생각하면서.
그러나 농담에는 분명 끝이 있지만, 삶이란 끝날 때까지 끝이 아니다.
먼 허공에서 바람이 불어온다. 나는 얼굴을 똑바로 들고 바람을 정면으로 맞는다. 구름 위에도 바람이 불고 있을 것이다. 이 바람과 그 바람은 무엇이 같고 다른가. 왜 어떤 바람은 얼굴을 할퀴고 어떤 바람은 그저 상쾌하게 머리를 흩어놓는가. 그 질문의 답을 찾기도 전에 나는 돌아선다. 발판을 뒤로하고 온 길을 되밟아 다시 걷기 시작한다. 나는 정말로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곱씹으면서. 내가 아는 건 단 하나, 나는 앞으로 다시는 이곳에 오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뿐이다.
나는 돌아보지 않고 걷는다.
돌아보지 않아도 등뒤의 모든 풍경을 그려볼 수 있다.
다음날부터 진행된 인공 강우제 살포는 성공적으로 끝난다. 방역복을 입은 공무원들이 대포처럼 생긴 기계를 가져와 인공 강우제 파우더가 든 캡슐을 쏘아올리는 장면이 뉴스를 탄다. 방진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공무원이 말한다. 구름 위 거주자들이 모두 이주한 것을 확인했으며, 추락시 위험할 만한 물건들은 전부 철거했으니 시민 여러분은 안심하셔도 됩니다. 총 세 번에 걸친 살포가 끝나고 반나절 뒤 드디어 모두가 기다렸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처음엔 새빨간 안개 같던 빗방울은 이내 굵어져 사흘 내내 분홍색 장대처럼 쏟아진다. 아이들은 하늘에서 딸기우유가 내린다고 소리치고, 부모들은 창밖으로 손을 내밀려는 아이들을 호들갑 떨며 제지한다. 어떤 시사 프로그램에선 그 비의 유독성을 실험하기 위해 빗속에 커다란 물풍선과 디지털 시계를 놓아둔다. 다섯 시간 삼십오 분이 지나는 순간, 물풍선이 퍽 소리나며 기어이 터지는 모습에 출연진들이 경악한다.
그리고 마침내 비가 그치자, 구름은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다.
주민들은 아직 대피소에서 귀가하지 못한다. 미리 고지된 대로, 비에 섞여 내린 유독성 물질을 정화하는 데에 열흘 정도가 걸리기 때문이다. 위험 마크를 단 방역차들의 행렬이 동네를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맵싸한 약품 냄새를 풍기고, 도로에 고인 분홍색 빗물 위로 살수차가 맑은 물을 쏟아붓는다. 시에서는 정화 작업이 끝나면 대기와 수질이 모두 인체에 무해한 수준으로 정상화된다고 밝혔지만 대다수의 주민들은 이를 믿지 않는다. 그래봤자 소용없다는 것이다. 돈이 있는 사람들은 이미 진작에 이 동네를 떠난 지 오래니까. 결국 주민들은 웅성거리며 자신들의 집과 가게가 있는 곳으로 돌아오고 만다. 물론 곳곳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소동은 당연하다. 밖에 내놓은 장독 항아리들이 다 상했다며 울상을 짓는 사람부터 세워둔 자전거의 도색이 온통 벗겨졌다는 사람, 삭아버린 가게 간판을 물어내라며 민원을 넣겠다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분통을 터뜨리다가도 마지막에는 시무룩해지며 제풀에 말을 멈춘다. 어쨌든 구름이 철거된 것은 좋은 일이니까. 언젠가는 벌어졌어야 하는 일이니까.
구름에 살던 사람들의 행방을 궁금해하는 주민들도 있다. 그 사람들은 괜찮을까. 애기를 업고 다니는 여자도 있었고 어린애들도 있었던 것 같은데 그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물론 거기에 대해서도 소문이 분분하다. 시에서 두당 얼마씩을 찔러주고 내보냈다더라, 다른 지역에 있는 구름으로 옮겨갔다가 텃세를 당해서 거기서도 쫓겨났다더라 하는 이야기들이 두서없이 떠돈다. 그러나 그 소문은 금세 흐지부지 사라진다. 주민들에게는 당장 토론해야 할 더 중요한 화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 화제란 물론 집값이다. 지금은 유독성 물질이니 뭐니 해서 부동산 가격이 처참하게 떨어진 판이지만 곧 천천히 회복되어 오를 것이다. 지하철이며 버스 정류장이며 없는 게 없는 곳이니 오르지 않을 리가 없다. 곧 이 지저분한 빌라촌이 헐리고 아파트가 들어설 것이다. 깨끗한 상가 건물이 올라가고 공원도 지어질 것이다. 백화점과 대형 마트, 영화관, 고급 레스토랑. 거기엔 젊고 돈 있는 사람들이 온다. 명품 유아차를 밀고 다니며 아이를 키우고 매 끼니 외식을 하며 상권을 먹여살릴 사람들이. 그 모습을 상상만 해도 주민들의 마음이 그득해진다. 이미 호주머니 속에 아파트 열쇠 하나씩을 넣어둔 것만 같은 기분이다.
○○동의 하늘은 이제 푸르다. 베란다마다 바짝 마른 빨래들이 걸리고, 노인들은 집 앞에 의자를 가지고 나와 해바라기를 한다. 옥상에 스티로폼 박스로 작은 텃밭을 만들어 가꾸기 시작한 주민들도 있다. 골목에서 종일 뛰어노는 아이들의 볼이 새빨갛게 익는다.
그리하여 마침내, 모두가 행복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