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어느 저녁, 엄마가 나와 동생을 부른다.
아빠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다. 분명히 아까까지는 집에 있었는데, 아마 구름을 내려간 넌 아닐 테고 어딘가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을 것이다. 좋지 않은 신호다. 나는 불길함을 느끼고 동생을 힐끗 쳐다본다. 동생도 불안한 표정으로 나를 마주본다. 엄마는 부엌 쪽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그 앞에 앉는다.
왜 불렀어요.
너희들에게 할말이 있다.
불길한 예감은 더욱 강해진다. 나는 손톱을 물어뜯는 동생의 손을 툭 쳐서 멈추게 한다.
새 직장을 구했어. 훨씬 더 좋은 곳이야.
좋은 일이네요.
그런데 그게 말이지, 참.
엄마가 과장된 한숨을 폭 내쉰다. 저건 말이 길어질 거라는 뜻이다. 과연, 숨을 들이쉰 엄마는 쉬지 않고 말하기 시작한다.
원래 일하던 땅 사람 집 있잖니, 개 키운다는 집. 그 집 여자가 소개해준 집인데, 자기 친구가 이혼을 한다지 뭐니. 하여튼 땅 사람들은 끈기가 없어. 뻑 하면 갈라서네 마네. 그렇게 나약해서야 원. 갓난쟁이까지 있다는데 서로 뭐가 수틀린 건지 얼마나 꼴도 보기 싫었으면 여자가 아예 지방으로 내려가버렸다는 거야. 생각해봐, 애엄마가 애를 놔두고 도망갈 정도면 남자가 얼마나 개차반이었다는 거겠니. 아무튼 그래서 남자가 졸지에 애를 데리고 덩그러니 혼자 남게 된 거지. 근데 그 남자가 또 아주 웃겨. 혼자서는 양말 한 짝도 빨아 신을 줄 모르는 반푼이 같은 인간인데 무슨 제약회사에 다닌다나, 돈은 꽤 버는 모양이더라고. 그런데……
엄마는 여기서 살짝 말을 쉬며 우리의 눈치를 본다. 이제야 본론이 나올 차례인 것이다. 나는 상체를 꼿꼿이 세우고 엄마의 얼굴을 똑바로 본다. 무슨 말이 나올지 대강 눈치챘기 때문이다.
마누라가 나갔으니 방이 남잖니. 내가 거기 살면서 하루종일 애를 돌보고 자기 집 살림을 맡아 봐줬으면 하는 모양이야. 상주 가정부가 돼줬으면 하는 거지.
엄마와 나의 눈이 마주친다. 엄마는 열심히 내 표정을 읽고 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미 알고 있다는 얼굴이다. 나는 속에서 약간의 욕지기가 치미는 것을 느낀다. 아무것도 모르는 동생이 끼어든다.
거기서 일하면 딴 사람들 집에선 일 못 하잖아요.
얘 좀 봐. 엄마가 바본 줄 아니? 다른 집에서 일하는 거 다 합친 것보다도 훨씬 많이 준다니까 가는 거지. 엄마도 그 정도 셈은 할 줄 안단다.
얼마 주는데요?
동생이 불쑥 묻는다. 엄마는 잠자코 손가락을 펴 자기 몸 아래로 쑥 들이민다. 나와 동생은 그 개수를 눈으로 헤아린다. 동생의 눈이 커진다. 제대로 센 게 맞는다면 상당히 큰돈이다.
와, 진짜 그 돈을……
그럼 집에서 나가겠다는 얘기예요?
나는 눈이 동그래진 동생의 말을 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그렇게 되겠지만 주말 하루는 집에 올 거야. 나도 쉬어야지. 너희도 돌보고.
우리는 돌볼 필요 없어요. 다 컸고 혼자서도 잘 살 수 있어요.
동생이 동의를 구하듯이 나를 보는 게 느껴진다. 나는 동생을 쳐다보지 않는다.
아빠는 뭐라고 했어요?
좋다고 했어.
엄마가 간단히 대답한다. 나는 어딘가에서 줄담배를 피우고 있을 아빠를 생각한다. 그러자 다시 속이 메슥거린다.
별일 아니야. 그냥 집에 일주일에 한 번 오게 됐다고 생각하면 돼.
그럼 나머지 육 일은 그 집에서 자요?
그 남자랑, 이라는 말을 굳이 덧붙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그 함의를 읽어내지 못한 건 멍청하고 어린 동생뿐이라는 걸 나는 안다.
아니, 그럼 새벽에 아기를 혼자 두니? 너희도 이제 다 컸고 할아버지도 계시고 하니까 수락한 거다. 엄마가 없는 동안 너희끼리 잘 지낼 수 있지?
언제 그렇게 우릴 돌봤다고 그래요.
나는 일부러 불퉁하게 말한다. 평소 같았으면 발끈해서 따지고 들었을 엄마가 이번에는 말없이 내 눈을 피한다. 잘못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뭔가 켕기는 것이 있는 사람의 표정이다.
그만 가봐라.
엄마가 손을 휘휘 내젓는다. 나는 동생을 끌고 집을 빠져나온다. 무작정 집 반대 방향으로 걷기 시작한다. 동생이 끌려가다 말고 내 손을 뿌리친다.
왜 그래? 잘된 거잖아. 돈 많이 번다는데.
너는 병신이냐 진짜?
왜?
엄마가 일주일에 육 일을 그 땅 사람 집 남자 새끼랑 단둘이 한 집에서 보낸다는데 그게 괜찮아 넌? 그 집 마누라처럼 살림하고 애 돌본다는데 그게 괜찮냐고? 그 새끼가 우리 엄마 어떻게 하면 어쩔 건데?
아.
동생은 그제야 깨달았다는 얼굴을 한다. 멍청한 새끼. 나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주저앉는다. 바람이 세게 불어와 우리 둘의 머리카락을 날린다. 달빛에 비친 동생의 긴 그림자가 내 것과 겹쳐 있다. 동생이 내 얼굴을 들여다본다. 그리고 말한다.
근데 우리 엄마, 못생겼잖아.
나는 귀를 의심한다. 이윽고 아주 천천히, 내가 들은 말이 문장이 되어 머릿속으로 퍼진다. 동생은 뭐가 웃긴지 샐샐 웃고 있다. 문득 나는 그것이 무섭다고 생각한다. 이 새끼가 진짜 미쳤나. 뭐가 웃기지. 뭐가 웃긴 거야 대체 뭐가. 나는 벌떡 일어난다. 동생을 등뒤에 남겨두고 걷기 시작한다. 뭘 어째야겠다는 생각조차 없다. 그저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다는, 이 새끼와 최대한 멀리 떨어지고 싶다는 마음만이 존재한다. 그 밖에는 지금 여기에 아무것도 없다. 나도 없고 동생도 없고 엄마도 아빠도 없고 다만 이 마음만이 있다.
누나, 어디 가?
등뒤에서 동생이 소리쳐 묻는다.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둥근 달이 내 어깨 너머, 아주 가까이서 나를 지켜보고 있다. 이제 어쩔래? 하고 묻는 것처럼. 나는 터벅터벅 구름 위로 발을 구르며 걷는다.
저 멀리 달빛에 비친 아빠의 실루엣이 보인다.
아빠는 한쪽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서 있다가 나를 보고 반대 방향으로 몸을 돌린다. 그러나 움직이지는 않는다. 도망가려다가 도망갈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체념한 커다란 짐승 같다. 원래 그럴 작정이었던 것처럼,
왜 좋다고 했어요?
뭐가.
말 돌리지 마세요. 진짜 괜찮아서 좋다고 한 거예요?
뭘 어쩌겠냐. 지가 하겠다는데.
아빠는,
병신이에요? 라고 덧붙이려던 걸 꾹 삼킨다. 왠지 그래선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기 때문이다. 맞을까봐 두려워서, 혹은 아빠가 상처받을까봐 걱정돼서는 아니다. 근본적으로 병신이 아닌 것에게 병신같다고 말하는 건 농담이 되지만, 진짜 병신한테 병신이라고 하는 건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누가 정한 건 아니지만 그냥 그러면 안 된다, 그건 나쁜 짓이다. 하면 안 되는 짓이다.
나는 입을 다물기로 한다.
고개를 돌려 아빠의 시선이 향한 곳을 본다. 아빠는 달을 보고 있다. 달이 손에 잡힐 것처럼 가깝다. 나는 손을 뻗어본다. 빈 손아귀에 싯누런 달빛이 한 움큼 잡혔다가 사르르 빠져나간다.
12
떠나기 전날 저녁, 엄마는 삼겹살을 굽는다. 고소한 고기 냄새가 온 구름 위에 퍼져나간다. 우리는 밥상 앞에 둘러앉는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쌀밥이 한 사람 앞에 한 그릇씩 돌아간다. 이 빠진 바구니에는 상추와 깻잎이 가득 담겨 있고 고깃기름에 구운 김치가 전등불 밑에서 반들반들 윤이 난다.
후식으로 사과도 있어.
엄마가 삼겹살을 숭덩숭덩 자르며 말한다.
아이구, 오늘 무슨 날이야?
아무것도 모르는 할아버지가 신이 나서 묻는다. 누구도 대답하지 않는다.
먹자.
아빠가 숟가락을 들고 밥을 한 숟갈 크게 퍼넣는 것을 시작으로 동생이 고기에 달려든다. 양볼이 미어터지도록 고기를 씹으며 연신 음, 음 소리를 낸다. 할아버지도 쭙쭙거리며 고기를 빨고 있다. 나는 잠자코 접시 가장자리에 고인 기름을 내려다본다. 역겹다.
나는 젓가락을 조용히 내려놓는다.
집을 나서는 나를 아무도 붙잡지 않는다. 나는 느릿느릿 걷다가 이윽고 빠르게 걷는다.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 싶은 것인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똑바로 걷다가 골목에서 꺾어 벽돌을 대충 쌓아 만든 허름한 집들을 지나친다. 이 길의 끝에 있는 집을 향해서다. 불이 환히 켜져 있다. 나무토막에 두꺼운 비닐을 쳐놓은 문을 두드린다.
누구야?
안에서 춘 여사가 묻는다.
저예요.
나는 문을 밀고 들어서며 말한다. 바닥에 길게 누워 있던 원이 나를 보고 상체를 일으킨다.
이 시간에 어쩐 일이니?
원이 보러 왔어요.
문간에 선 채로 말한다. 원은 반쯤 누운 채로 내 얼굴을 빤히 올려다본다. 나는 그 시선을 피해 방구석으로 눈을 돌린다. 저녁 밥상을 막 물린 참인 듯, 빈 그릇이 어지럽게 흩어진 밥상이 방구석에 놓여 있다. 우리집 것과 같은 흐린 주광색 전구 아래 있는 모든 물건이 낡고 더럽다. 그 가운데 누운 원도 그렇다.
여기서 얘기하렴. 밤도 늦었는데.
아니에요. 나가서 얘기하자.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나는 돌아선다. 담벼락에 등을 기대고 서서 말을 고른다. 원이 슬리퍼를 죽죽 끌며 나올 때까지. 슬리퍼 소리가 가까워지자 나는 묵묵히 걷는다. 등뒤에서 원이 담뱃불을 붙이며 따라오는 소리가 들린다. 구름 가장자리, 쓰레기장에 이르러서야 나는 뒤돌아본다.
무슨 일인데.
쓰레기 더미를 등지고 삐딱하게 선 원이 묻는다. 나는 원을 새삼스럽게 위아래로 뜯어본다. 어둠 속 보이는 큰 키의 실루엣. 덥수룩한 머리와 추리닝 바지 밑으로 드러난 앙상한 발목. 나는 불쑥 말한다.
키스하고 싶어.
뭐? 지금?
그래, 지금.
뭔데? 이거 무슨 상황인데?
나는 대꾸 없이 기다린다. 원이 어이없다는 듯 웃고는 머리를 긁적거린다.
싫어?
아니, 해달라니까 하긴 하겠는데.
하겠는데?
아니 참, 이게 참.
싫으면 말아.
싫다곤 안 했는데.
원이 괜히 아무도 없는 주변을 둘러보는 척한다. 나는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한다. 가슴 앞으로 팔짱을 끼고 서 있자 원이 쭈뼛거리며 다가온다. 나보다 머리 하나가 큰 그림자가 내 그림자와 겹친다. 우리가 이렇게 가까이 선 적이 있었던가. 원의 얼굴이 천천히, 내 얼굴 가까이 다가와 숙여진다. 담배 냄새와 땀 냄새, 집에서 입는 옷의 눅눅한 냄새가 난다. 어차피 어두워서 잘 보이지도 않지만 나는 눈을 감는다. 머리가 터질 것처럼 두근거린다. 심장이 양쪽 관자놀이까지 올라온 것만 같다. 아니 머리 전체가 심장이 된 것 같다. 눈알 뒤에서 뜨거운 것이 펄떡펄떡 뛴다. 입술 바로 앞까지 다가온 원은 잠시 멈춘다. 원의 입술이 달싹거리며 속삭인다.
……너한테 삼겹살 냄새 난다.
별안간, 나는 양손을 뻗어 원을 세게 밀쳐낸다.
갑작스런 공격에 원은 비틀거리며 몇 발짝 물러나 주저앉는다. 원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나는 돌아선다. 반대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한다. 쓰레기 더미와 쓰레기 더미 앞에 주저앉아 있는 원이 빠르게 멀어진다. 뭐라고 외치는 것 같지만 들리지 않는다. 나는 뛰고 뛰고 또 뛴다. 심장은 아직도 머리 꼭대기에 붙어 있다. 나는 이를 악문다. 스스로에게 중얼거린다. 뭘 기대한 거야. 뭘 바랐던 거야. 죽어. 죽어버려.
하지만 나는 내가 죽지 않을 것을 안다. 이대로 땀투성이가 되어 뛰다가 구름의 반대편 끄트머리에 다다르면 거기에 멈춰 설 것을 알고, 아래를 조금 내려다보다 돌아설 것을 안다.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가 더러운 이불을 덮고 가족들 사이에 몸을 누일 것을 안다. 왜 우는지도 모른 채 미지근한 눈물을 흘려보낼 것을 안다. 나는 나의 남은 삶을 다 알 것 같다.
13
퇴근하려는데 고깃집 앞 가로등 밑에 원이 서 있다.
나를 보자마자 씩 웃더니 등뒤에 숨긴 것을 불쑥 내민다. 깜짝 놀라 엉겁결에 받아들고서야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린다. 꽃이다. 번쩍거리는 투명한 비닐에 싸인 새빨간 장미 한 아름이 낯선 동물처럼 어색하게 내 품에 안겨 있다.
이게 뭐야?
뭐긴 뭐야, 꽃이지.
왜 주는 건데?
그냥 주면 안 되냐.
줄지어 가게를 나서던 주방 이모들이 꽃을 안고 서 있는 나를 보고 어머, 어머를 연발한다. 꽃 받았네? 오늘 무슨 날이야? 우리는 서로 눈을 피하다가 쑥스럽게 웃는다. 아이구, 좋을 때다아아. 이모들이 깔깔거리며 멀어진다. 좋은가. 좋을 때인가. 그렇다면 좋아보자. 그렇지 않아도 입꼬리가 슬슬 올라가는 것을 막을 길이 없던 참이다. 우리는 고깃집을 등지고 걷기 시작한다. 꽃다발이 품에서 바스락바스락 소리를 낸다. 나는 걸으면서 꽃잎에 코를 묻어본다. 꽃을 받은 사람들이 으레 하듯이. 생각만큼 향이 진하진 않지만 그럭저럭 향긋한 냄새가 콧속을 파고든다. 꽃이라는 것을 받아본 일은 평생을 통틀어 처음이다. 이제 알 것 같다. 이래서 축하할 일이 있는 사람에게, 좋아하는 사람에게 꽃을 주는 거구나. 먹을 수도 돈으로 바꿀 수도 없지만 단지 이 기분과 향기를 전하기 위해서. 옆에서 걷는 원이 내 표정을 힐끔힐끔 살피다 말한다.
어젠 미안했다.
뭘.
분위기 깨서.
와장창 깨긴 했지.
사실 뭐든지 용서해줄 수 있다, 이런 것을 준다면. 배알도 없이 그런 생각을 하고 나자 괜히 얼굴이 화끈해진다.
이런 건 얼마씩 하냐.
왜 물어봐, 그딴 건.
비쌌을까봐 그러지.
어어, 오늘부터 점심 굶어야 할 듯.
말하고 원이 낄낄 웃는 걸 보고서야 농담이구나, 하고 안심한다. 우리는 발판을 향해 천천히 걷는다. 미지근하고 달콤한 공기, 여름의 밤거리. 사람들이 우리를 스쳐지나간다. 우리와 저들이 뭐가 그렇게 다를까,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걷고 있고 발걸음은 이렇게나 가벼운데. 내 손에는 장미꽃 한 다발이 쥐어져 있는데.
그러나 저 멀리 발판이 보일 때쯤, 갑자기 내 마음에 시커먼 어둠이 드리워진다.
이 꽃을 둘 곳이 없다.
참으로 그렇다, 이것을 어디에 두어야 하나. 물에 꽂지 않으면 금세 시들어버릴 테니 어딘가에 꽂아두긴 해야겠는데, 그야 반 자른 생수병이라도 괜찮겠지만 왠지 그런 것에 이 꽃을 꽂아두기는 싫다. 이왕이면 예쁜 유리로 된 화병이면 좋겠는데, 아니, 화병이라는 것이 있다고 해도 그걸 어디다 두나. 할아버지와 엄마와 아빠와 동생이 먹고 자는 그 방에다? 국물 튄 자국, 냄비 눌은 자국이 선명한 앉은뱅이 밥상 위에다? 상상만 해도 참을 수 없다. 어울리지 않는다. 이런 꽃은 아름다운 곳에 놓여야 한다. 흰 커튼이 걸린 격자무늬 창문이 있는, 부드러운 햇빛이 들어오는 방에. 체크무늬 테이블보가 깔려 있고 과일 바구니가 놓인 둥근 테이블 위에. 꽃은 그런 곳에나 어울린다. 그런 곳에 놓이려고 길러지고 꺾인 것들이다. 그곳이 아닌 다른 곳에 꽃을 두는 것은 범죄나 다름없다. 범죄. 원이 춘 여사에게 발판을 내려보내달라는 전화를 거는 동안 나는 그 단어를 곰곰이 곱씹는다. 그렇다. 범죄다. 꼭 남의 돈을 훔치거나 누구를 다치게 해야만 범죄인 것이 아니다.
이윽고 머리 위 까마득한 곳에서 끼릭끼릭 소리를 내며 발판이 내려오기 시작한다. 우리는 익숙하게 발판에 올라서서 서로 몸을 붙이고 선다.
그리고 절반쯤 올라갔을 무렵, 나는 갑자기 장미꽃을 잡아 뜯기 시작한다.
야, 왜 그래!
원이 소리치지만 아랑곳하지 않는다. 나는 주먹 한가득 장미꽃 대가리를 쥐고 무작스럽게 꽃대에서 뜯어낸다. 한 손 가득 움켜쥔 꽃잎이 손가락 사이에서 빨간 즙처럼 으깨진다. 아래를 내려다보며 손을 편다. 팔랑팔랑, 부드럽고 향긋한 꽃잎들이 점점이 지상으로 떨어진다. 그것을 반복한다. 아까 코를 박고 맡았던 것보다 훨씬 짙은 향기가 바람에 흩어진다. 원은 더이상 소리치지 않는다. 그저 입을 다문 채 장미 꽃잎이 춤추듯 밤하늘을 수놓는 것을 내려다보고 서 있을 뿐이다. 나와 함께. 나는 원이 나를 이해한다는 사실을 안다. 그것이 내가 원을 사랑하는 이유니까. 우리가 딛고 선 발판, 원은 이것이 지금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 그곳에 무엇의 자리가 있고 무엇의 자리가 없는지도.
발판이 구름에 닿기 직전, 나는 줄기만 남은 꽃다발을 발밑으로 집어던진다. 반짝이는 비닐 포장지가 바람에 날리며 빙글빙글 도는 것이 보인다. 우리는 그것을 한참 내려다보다 발판에서 내려선다. 집을 향해 미련 없이 걸어간다.
14
엄마가 집에 오지 않게 된 다음날, 할아버지가 묻는다.
네 엄마는 어디 갔냐.
늘 있는 그 자리에 누운 채였다. 할아버지가 한참 기침을 하다 가래를 뱉어내는 동안 나는 대답을 생각한다. 이윽고 끈적하고 둔탁한 소리가 난다. 머리맡에 놓여 있는 플라스틱 통에 가래가 떨어지는 소리다. 저 통을 비우는 것도 엄마가 하던 일이었다. 이제는 내가 해야 할 것이다.
엄마 일하러 갔어요.
어제 집에 안 들어왔잖아.
이제 평일엔 안 와요. 주말 하루만 온대요.
할아버지는 못마땅한 표정이 되어 이빨 다 빠진 입을 비죽거린다. 할아버지는 눈치챘을까. 엄마가 무얼 하고 있는지. 아니, 그건 나조차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쩌면 내가 너무 나쁘게만 생각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엄마는 정말 그 집의 살림을 해주는 것뿐이고 그 외에는 어떤 것도 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 그럴 수도 있다.
동생은 휴대폰에 연결한 이어폰을 낀 채로 할아버지 옆에 길게 엎드려 있다. 집에서 소리를 쩌렁쩌렁 틀어놓고 인터넷 방송을 보는 것이 거슬려 이어폰을 하나 사다주었는데 그뒤로는 항상 저 모양이다. 집에서 누구와도 대화하지 않는다. 오로지 이어폰을 끼고 저렇게 누워 휴대폰 속 세상에만 골몰해 있는 것이다. 나는 동생이 보는 것을 들여다본다. 그리고 깜짝 놀란다. 화면 속 남자가 자기 머리에 간장을 붓고 있다.
야 이게 뭐야?
동생이 화들짝 놀라며 한쪽 이어폰을 뺀다.
이 새끼 왜 이래?
그냥 웃기려고 그러는 거야. 보지 마.
동생은 휴대폰을 한쪽으로 틀며 내 눈치를 본다. 이어폰에서 남자의 비명소리와 함께 웃음소리가 새어 나온다. 머쓱하기도 하고 짜증도 나서 나는 몸을 돌려버린다. 이 거지같은 놈의 집구석. 차라리 일이라도 나가면 좋겠는데 오늘은 고깃집도 쉬는 날이다. 나는 훌쩍 일어나 집을 나온다. 터덜터덜 구름 위를 걷기 시작한다. 햇빛이 목덜미로 내리쬔다.
걷다보니 어느새 쓰레기장이다. 나는 원이 준 인형들을 숨겨놓은 곳으로 간다. 폐지 무더기 아래에 놓아둔 상자는 잘 있다. 뚜껑을 여니 인형들이 내가 눕혀놓은 그대로 쪼르륵 누워 있다. 귀여운 것들. 나는 가장 최근에 받은 개구리 인형을 들어올려 얼굴을 파묻는다. 아직 향기로운 냄새가 난다. 인형에 얼굴을 묻은 채로 숨을 깊게 들이쉬자 조금씩 마음이 안정되는 것이 느껴진다. 나는 인형에게 속삭인다.
개구리야, 죽고 싶어.
말하고 나서야 생각한다. 나 죽고 싶은 건가.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정말 아니냐고 묻는다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나는 개구리 인형을 상자에 다시 잘 넣어두고 뚜껑을 닫는다. 폐지 뭉치를 그 위에 올려 상자를 감춘다. 그러고는 하릴없이 주저앉아 하늘을 올려다본다. 하늘에는 아무것도 없다.
엄마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엄마에게 가끔 문자를 보내곤 하지만 답장은 대개 아주 늦게 도착하거나 아예 오지 않는다. 아기를 보느라 정신이 없다는 게 그 이유다. 아기가 까탈스러워 고생이 많다나, 그렇지만 엄마는 사실 행복하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지긋지긋한 집으로 돌아오지 않아도 되니까. 깨끗한 물과 변기가 있는 화장실을 언제든 쓸 수 있고 널따란 침대에서 잠을 잘 수도 있겠지. 모르긴 몰라도 자기만의 방도 생겼을 것이다. 그건 누가 뭐래도 행복한 일이 틀림없다. 그 증거로 엄마는 한 번도 그 집이며 아기의 사진을 보내준 적이 없다. 늘상 그날 있었던 모든 일을 떠들어댔던 수다스런 엄마는 이제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관해 아무 말도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건 엄마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행복하다는 것을, 그리고 그건 우리 가족에 대한 끔찍한 배신이라는 사실을.
나는 쓰레기 더미에 등을 기대고 앉아 생각한다. 나도 그런 배신을 할 수만 있다면.
일어섰다 앉았다 하며, 나는 오로지 배신에 대해서만 생각한다.
15
인공 강우제를 뿌린다는 소식이 또다시 들려오기 시작한다. 이번에는 진짜래. 구름 사람들은 불안한 얼굴로 저마다 들은 것들을 수근거린다. 그사이 시장이 바뀌었는데, 새로 부임한 시장은 구름 철거를 대표 숙원 사업으로 내세웠다고 했다. 비인도적인 방법도 불사하겠다 공언했다는 그 남자를 비록 사진 속에서지만 나도 본 적이 있다. 투실투실 살찐 목을 가진, 사람 좋은 얼굴로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선거 포스터니까 웃고 있는 게 당연하지만. 나는 그 남자에게 투표하기 위해 투표소 앞에 줄지어 서 있었을 땅 사람들을 상상한다.
가만히 앉아서 당하고 있을 순 없잖아.
누군가 말한다. 하루 일을 마친 사람들이 약속이나 한 듯 발판 근처의 빈 공터로 모여든 밤의 일이다. 모두들 험악한 표정을 하고 있다. 아마 나도 그럴 것이다. 그렇다, 앉아서 가만히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무엇인가 해야 하는데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하나. 다들 서로의 눈만 보고 있는데 이 질문에 시원하게 대답을 내놓은 것은 의외로 우리 아빠다.
내려가서 확 불이라도 질러버릴까.
나는 놀란 얼굴로 아빠를 쳐다본다. 아빠의 얼굴에는 아무 표정도 없다. 그것이 오히려 그 말을 더 진심처럼 느껴지게 한다. 지금 아빠는 정말로 어딘가에 불을 지를 수 있을 것만 같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다. 나이든 여자들이 겁먹은 눈초리로 아빠를 힐끔거린다. 그 말을 시작으로 사람들 사이에서 말문이 터진다. 일단 얘기를 해보는 게 먼저 아닐까. 언제 우리 말을 들어준 적이나 있었나. 강경하게 나가지 않으면 물로 본다고. 그래도 먼저 대화를. 나는 공놀이를 구경하는 아이처럼 머리를 휙휙 돌리며 이 사람 저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다가, 맞은편 구석에서 원의 얼굴을 발견한다. 원은 삐딱하게 선 채로 이야기를 듣고 있다. 원의 의견은 어떨까. 원이라면 어떻게 생각할까 궁금하지만 원은 입을 꾹 다문 채로 그저 달빛 아래 서 있을 뿐이다. 구름이 부서져내리면 원도 곤죽이 될까. 되겠지. 나는 원의 몸이 그려낸 기다란 그림자를 바라보며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