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회

​​​​​​​우리의 번호는 아주 늦게 불린다

우리의 번호는 아주 늦게 불린다.

할아버지를 둥근 의자에 앉히면서 나는 갈색 인조가죽이 씌워진 그 회전의자가 초코파이 같다는, 매번 하는 생각을 다시 한다. 의사가 할아버지 가슴에 청진기를 대고 숨소리를 듣는다.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쌔액쌔액 하는 소리가 들리는데 뭐 하러 청진기까지 쓰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의사는 청진기를 귀에서 빼고는 지난번과 똑같은 말을 한다. 여전히 안 좋으시네요. 약은 잘 드시죠? 예 예 그럼요, 하는 모기만한 대답. 단지 묻는 말에 답을 하는 것뿐인데 할아버지는 왜 이렇게 비굴할 정도로 허리를 숙이는 걸까. 나는 몸을 곧게 편다. 척추에 가느다란 철골을 박았다고 상상하면서. 절대로 이것을 구부러뜨리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이 작은 방 안에서는.

어이없을 만큼 짧은 진료가 끝난다.

진료실을 나가는 우리의 등에 대고 의사가 덧붙인다. 몸을 따뜻하게 하세요. 따뜻한 물 많이 드시고.

우리 중 누구도 그게 무슨 소용이냐고 되묻지 않는다. 진료비를 수납하고 약을 받은 뒤엔 다시 택시를 탄다. 아빠와 나는 둘 다 지칠 대로 지쳐 있다. 주말 내내 고깃집에서 뛰어다니며 홀에 가득찬 손님들을 상대했을 때도, 시멘트 포대를 네다섯 개씩 지고 하루 온종일 계단을 오르내렸을 때도 이보다 힘들진 않았다고 택시 좌석에 찌그러진 채로 우리는 각자 말없이 생각한다. 도대체 이 일이 왜 이렇게 힘든 걸까. 나는 답을 알고 있다.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할아버지의 삶을 연장하는 이 행위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할아버지가 지금 당장 죽는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이다.

택시는 조용히 달린다. 어느새 창밖으로 날이 저물고 있다. 무의미한 하루가 끝나간다. 가끔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터져나오는, 끝날 듯 끝나지 않는 할아버지의 기침 소리. 나는 숨을 참는다.

 

 

20

 

이번주 수요일 오후 두 시, 시장이 구름을 방문한다고 한다.

누가 누구에게 어떻게 전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다만 모두가 그렇게 알고 있다. 시장이 온다, 이 구름 위에. 그 사실에 사람들은 바짝 긴장한다. 웅성거리던 사람들은 결국 화요일 밤, 약속이라도 한 듯 다시 공터에 모인다.

와서 그럴듯한 사진을 찍으려는 거지.

보여주기식이야. 우릴 제 선전에 이용하려는 게 틀림없어.

정치인 놈들은 다 그렇지.

아니, 땅 사람들은 다 그래.

나는 아빠 옆에 웅크리고 앉아 그 목소리들에 귀를 기울인다. 돌아보지 않고도 분간할 수 있는 목소리들이다. 그 소리들은 하나같이 모두 낮고 분노에 차 있다. 아마 원도 분명 이곳에 있을 테지만 나는 일부러 원을 찾아보지 않는다.

누가 대표로 나서야 해. 우리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누군가 그렇게 말하자 곧 모두 조용해진다. 입을 다문 사람들은 어둠 속에서 눈만 굴리고 있다. 갑자기 침묵이라는 두꺼운 이불이 모두의 위로 덮어씌워진 것만 같고, 그 이불을 찢는 것은 매우 불경스럽고 커다란 죄가 될 것만 같다. 누가 그 죄를 지을 것인가.

다들 괜찮다면, 내가 하지.

나는 고개를 홱 돌려 벌떡 일어선 아빠의 얼굴을 올려다본다. 그 순간 나는 일이 이렇게 될 것을 내가 알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저녁을 먹은 뒤 아빠를 따라 어슬렁어슬렁 공터로 걸어올 때부터. 아니 그전에 시장이 온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전에…… 올려다본 아빠의 턱은 단단하고 입은 꾹 다물려 있다. 나는 눈을 내리깐다. 어쩐지 아빠를 쳐다볼 수가 없다.

형님이라면 믿을 수 있지.

불쑥 말한 것은 뒷집 아저씨다. 그것을 시작으로 사람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찬성의 말을 중얼거린다. 이윽고 정말 끔찍한 일이 일어난다. 누군가 박수를 치기 시작한 것이다. 맥없이 시작된 박수 소리는 이내 주변으로 빠르게 번지며 커진다. 짝짝짝짝. 짝짝짝짝. 사람이 손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소리임에 틀림없는 그 소리 한가운데에, 아빠는 서 있다. 여전히 힘주어 입을 다문 채, 어디에도 시선을 주지 않고서. 나는 더이상 참을 수 없어 양손으로 귀를 꽉 틀어막고 무릎 사이에 머리를 박는다. 그래도 박수 소리는 계속 들린다. 목덜미의 새까맣게 탄 자국처럼, 끊임없이 벗겨지는 양손의 허물처럼 평생 영원할 기세로.

나는 고개를 들지 않고도 원이 일어나서 자리를 뜨는 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혼자 구름을 내려갔다 돌아온 아빠는 딴사람이 되어 있다. 몸에서는 비누 냄새가 나고 덥수룩하게 길었던 머리도 오랜만에 짧게 깎았다. 나는 잠자코 아빠에게 깨끗한 옷을 꺼내준다. 아빠가 머쓱하게 웃으며 묻는다.

아빠 괜찮아 보이냐.

어어.

우리는 아침도 점심도 먹지 않고 기다린다. 두 시쯤이 되자 발판 앞에 사람들이 모여든다. 햇빛이 사람들의 정수리를 찔러댄다. 춘 여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발판의 기둥만을 바라본다. 춘 여사의 휴대폰은 모두가 볼 수 있는 자리에 놓여 있다. 왜 저것은 울리지 않는가. 누군가가 두시 삼십분이 되었다고 소곤거린다. 이런 씨발. 나는 조용히 중얼거린다. 세시. 이미 집으로 돌아간 사람들이 있다. 새로 꺼내 입은 아빠의 옷은 이미 가슴팍이 땀으로 다 젖었다.

아빠한테 돌아가자고 말할까.

그런 생각을 하는 찰나, 춘 여사의 휴대폰이 울린다. 사람들은 엉덩이를 찔린 토끼들처럼 화들짝 놀란다. 모두의 얼굴을 한 번씩 둘러본 뒤 춘 여사가 전화를 받는다. 그러면서 손으로는 발판을 내려보내는 스위치를 누른다.

모두가 발판이 올라오는 것을 숨죽여 바라본다.

이윽고 나타난 것은 양복을 입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젊은 남자다. 멀끔해 보이긴 하지만 누가 봐도 시장은 아닌 것 같다. 그는 숨을 헐떡거리며 발판에서 구르듯 뛰어내린다. 사람들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는 듯하다. 자리에 그대로 웅크린 남자가 이내 웩웩거리며 속을 잔뜩 게워내기 시작한다.

왜 저러는 거야?

군중 속에서 누군가 걱정스럽게 말한다. 아무도 다가갈 생각은 않는다. 남자는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토사물을 한참 내려다보더니 이윽고 비틀거리며 일어난다.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고는 큰 소리로 말한다.

올라오지 마세요. 이거 탈 게 못 됩니다. 너무 위험해요. 아무 안전장치도 없어요. 절대, 절대 오지 마세요. 떨어지면 죽어요.

남자의 경악하는 표정과 말투를 보고 우리는 서서히 납득한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를. 남자는 전화를 끊고 그제야 모여든 사람들을 둘러본다. 그리고 묻는다.

저어, 이거 외에는 내려갈 다른 방법이 없습니까?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다. 적의에 가득찬 시선을 견디지 못한 남자는 입술을 깨물며 자기가 타고 올라온 발판을 돌아본다. 춘 여사가 묻는다.

뭐, 내려줘요?

발판이 움직이는 소리와 함께, 남자가 내려가면서 지르는 비명이 아득히 멀어진다.

이게 끝인가? 사람들은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눈빛으로 묻는다. 하지만 이미 모두가 알고 있다. 시장이 저 발판을 타고 올라오는 일은 없을 것임을. 발판 앞에는 남자가 남긴 토사물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빨갛다. 저 사람은 점심으로 뭘 먹었을까. 나는 우리가 점심은커녕 아침도 먹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해낸다.

가장 먼저 돌아선 것은 아빠다. 아빠는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성큼성큼 집을 향해 걸어간다. 나는 잰걸음으로 아빠를 따라간다.

아빠.

아빠.

아빠.

왜.

대답이 돌아오고 나서야 그러게, 왜 불렀지,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궁금하지 않은 것을 묻는다.

그 사람들, 다신 안 올까요?

안 오겠지.

그럼 어떻게 되는 건데요?

뭐가 어떻게 돼.

이대로 인공 강우제 뿌려버리면 어떡해요?

아빠는 나를 빤히 바라본다. 정말 그 질문의 답을 모르겠느냐는 듯이.

밥이나 먹자.

아빠가 땀에 젖은 윗옷을 벗어던지며 말한다.

 

 

21

 

문득, 나는 엄마를 보았다고 생각한다.

고깃집에 한창 사람이 붐비는 저녁 시간, 나는 쟁반으로 밑반찬을 나르다 말고 그 자리에 멈춰 선다. 길에 면한 가게의 한쪽 벽은 전부 유리창으로 되어 있는데, 그 너머로 분명히 보았다. 뒤집어진 ‘이베리코 숙성 돼지고기’라는 글자 위로 엄마의 머리가 지나가는 것을. 나는 밑반찬 접시들을 테이블에 빠르게 내려놓은 뒤, 빈 쟁반을 그대로 들고 거리로 뛰어나간다. 엄마는 벌써 저 멀리 걸어가고 있다. 종종걸음 치며 엄마! 하고 부른다.

멈춰 선 엄마가 돌아본다. 아기를 안고서.

엄마의 당혹스런 얼굴을 보자마자 나는 깨닫는다. 엄마는 나를 마주치길 원하지 않았으며, 그럼에도 내가 일하는 고깃집 앞을 굳이 지나간 것은 단지 내가 여기서 일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라는 걸. 아주 잠시 동안, 나는 마치 모르는 아줌마를 쳐다보듯이 엄마를 본다. 엄마의 양쪽 어깨에 누빔으로 된 두꺼운 아기 띠가 둘러져 있다. 그 안에 단단히 감싸인 아기의 옆얼굴이 보인다. 뽀얗고 포동포동하고 머리카락이 보송한 건강한 아기. 그에 비해 엄마의 얼굴은 늙고 잔뜩 지쳐 있다. 누군가 보면 손주를 돌보느라 피곤한 할머니쯤으로 생각할 것이다.

……갑자기.

엄마가 중얼거린다.

갑자기 아기 분유가 똑…… 떨어져서.

아기가 울 것처럼 칭얼대며 꼼지락거리자 엄마가 손바닥으로 아기의 엉덩이를 토닥거린다. 아기는 금세 잠잠해진다. 착한 아기구나. 단지 쳐다만 봤을 뿐인데 엄마는 상체를 약간 돌려 내 시야에서 보이지 않도록 아기를 가려버린다.

쟁반을 쥔 채 고깃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엄마가 왜 거짓말을 했을까 생각한다. 분유라는 물건을 어디서 파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이 근처는 온통 유흥가다. 큰 마트나 슈퍼 따위는 없는 것이다. 엄마는 아기를 안고 어디로 가고 있었던 걸까. 뻔히 들킬 거짓말을 지어내면서까지 숨겨야 할 일이 뭐였을까. 나는 그것을 묻고 싶지만, 동시에 묻고 싶지 않다.

그때 누군가 내 옷자락을 확 잡아당긴다. 깜짝 놀라 돌아보자, 잔뜩 화가 난 얼굴을 한 젊은 남자가 앉은 채 나를 노려보고 있다.

저기요. 몇 번을 불렀는데 왜 못 들은 척하세요?

제가요?

그럼 여기 또 누구 있어요?

나는 당황해서 입술을 깨문다. 가게의 모든 손님들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 남자와 같은 테이블에 앉은 여자가 날카롭게 뜬 눈을 흘기며 말한다.

여기서 아까부터 계속 불렀는데 쳐다도 안 보셨잖아요. 사람 말이 말 같지 않아요?

그게, 그게 아니라.

아니, 진짜 다섯 번을 넘게 불렀는데 바로 코앞에서 왜 씹냐고요. 손님이 손님 같지 않아요?

남자의 입에서 술냄새가 훅훅 풍긴다. 여자의 얼굴도 이미 불콰하다. 나는 카운터 쪽을 흘긋 본다. 이럴 때 사장이 있으면 나중에 한 소리를 듣더라도 일단은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운 나쁘게도 사장은 자리에 없다.

죄송합니다. 제가…… 잠깐 딴생각을 해서.

일하는데 왜 딴생각을 해요? 네? 일하기 싫으면 때려치우든가 해야지.

죄송합니다.

기분좋게 고기 먹으러 와서 다 잡쳤잖아요 씨발.

씨발? 나는 귀를 의심한다. 지금 이 사람이 나한테 욕을 한 건가. 문득 머릿속에 새하얀 점이 하나 생긴다. 아주 작았던 그 점은 빠르게 넓어지며 금세 시야를 가득 채운다. 이것은 비유가 아니다. 나는 눈을 힘껏 감았다가 뜬다. 아직도 하얗다. 모든 것이.

지금 욕하셨어요?

뭐요?

지금 저한테 욕하셨냐고요.

그제서야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감지한 주방 이모들이 빠르게 다가온다. 하지만 아랑곳없다. 이상한 고양감이 이미 내 몸을 감싸고 있다. 지금 이 순간 나는 누구와 어떻게 싸워도 이길 수 있을 것만 같다.

뭐야? 이년이 미쳤나? 야, 너 죽고 싶어?

남자와 여자가 벌떡 일어선다. 일어선 두 사람의 키가 생각보다 작다. 그 사실이 왠지 용기를 준다. 좆만한 것들이. 나는 나에게 욕을 한 남자의 얼굴을 똑바로 내려다본다. 양쪽 관자놀이가 심장이 달린 것처럼 두근두근 뛴다.

다시 해봐. 다시 욕해보라고.

말하면서 나는 한 발짝 앞으로 다가간다. 기세에 놀란 남자가 저도 모르게 몸을 약간 움츠린다. 그 동작을 보는 순간 황홀경에 가까운 쾌감이 머릿속에 쫙 퍼진다. 이겼다.

어? 다시 씨불여보라고. 왜 말을 못 해? 쫄았어? 쫄았네?

나는 아무렇게나 주워섬긴다. 그때 가게 문이 열리고 사장이 들어오는 것이 곁눈으로 보인다. 마침 딱 적당한 타이밍이다. 사태를 파악한 사장이 허둥지둥 달려오는 것을 보며 나는 운 좋은 줄 알아, 하는 표정을 띄우고 남자를 깔아 본다. 무슨 일이야? 왜 이래? 사장이 외치며 다급히 나와 남자 사이에 끼어들 때 나는 쌩하니 바람 소리 나게 가게를 나가버린다.

더할 나위 없이 기분이 좋다.

숯불 화로 옆에 쪼그려앉아 나는 낄낄 웃는다. 머릿속에서 남자가 몸을 움츠리던 장면을 계속 재생하면서. 나는 싸웠고 보기 좋게 이겼다. 상대는 어른, 게다가 둘이었고 나는 어린 여자애인데. 나는 하고 싶은 말을 전부 또박또박 했고 상대방은 꼼짝도 하지 못했다. 가게에 가득찬 손님들 앞에서.

나는 몸을 웅크린 채로 계속 웃는다. 키가 한 뼘은 자란 것 같은 느낌, 혼자서 모든 것을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다. 그렇다, 혼자서 못할 건 없다. 앞으로도 이렇게만 하면 되는 거다. 나는 스스로를 칭찬한다. 아주 오랫동안. 엄마의 거짓말은 더이상 상관없다. 마음껏 거짓말하라지.

 

 

22

 

어느 날 잠에서 깨자마자 나는 뭔가 잘못됐음을 감지한다.

마치 거미가 멀리서도 제 거미줄에 생기는 일들을 그냥 알아차릴 수 있는 것처럼, 내 피부에 돋은 땀구멍 하나하나로 나는 이 잘못됨을 감각할 수 있다. 무엇일까. 오늘은 또 어떤 불행이 나를 노리고 있을까. 나는 몸을 일으키는 대신 돌아눕는다. 아직 불운을 대면할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면서.

그러다가 나는 별안간 벼락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벌떡 일어난다.

할아버지의 가르랑거리는 가래 끓는 숨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아아. 내 입에서 저절로 신음 소리가 흘러나온다. 집에는 아무도 없다. 맞은편 벽을 향해 등을 보이고 엎드려 있는 할아버지를 제외하고는. 무섭도록 조용하다. 할아버지의 저 등, 저곳에 모든 소리가 빨려들어가 꾹꾹 뭉치는 것만 같다. 도망쳐. 머릿속에서 누군가 말한다. 아니, 나는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보낸다. 도망쳐. 확인하지 마. 너일 필요는 없어. 이 끔찍함을 최초로 맞닥뜨리는 사람은.

그렇다. 나일 필요는 없다. 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마찬가지로 떨리는 다른 쪽 손을 붙잡으며 생각한다. 이대로 집을 나가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고깃집으로 출근하기 위해 평소보다 조금 일찍 집을 나섰고 그때만 해도 할아버지는 잠들어 있었다고 말하자. 아빠, 아니 동생이어도 좋으니 누군가 다른 사람이 발견하도록 하자.

하지만 나는 나도 모르게 소리 내어 할아버지를 부른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대답은 없다. 엎드린 할아버지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그저 엎드려 있을 뿐이다. 평생 그렇게 놓여 있었던 정물처럼. 이런 적이 있었나. 할아버지는 원래 귀가 어둡고 잠귀는 더 어둡다. 할아버지를 깨우기 위해서는 어깨를 잡아 힘껏 흔드는 방법밖에 없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하지만 할아버지를 만지라니. 엎드린 저 등에 손을 대라니. 그게 가능하기나 한 일인가. 할 수 없다. 절대로 할 수 없다. 나는 온몸을 덜덜 떨며 주변을 미친듯이 둘러본다. 뭐가 없을까. 뭐라도 좋다. 닥치는 대로 바닥을 짚는 손에 마침 뭔가 잡힌다. 할아버지와 아빠가 번갈아 쓰곤 하던 플라스틱 효자손이다. 나는 효자손을 쥐고 무릎걸음으로 걷는다. 효자손 끝으로 할아버지의 등 어딘가를 찌르려고 하는데 그만 손이 빗나가 어깻죽지를 건드리고 만다.

아아.

아아아.

아으아아으아.

이 소리가 내 입에서 나온 소리라는 것을 나는 안다. 이 방안에 소리를 낼 수 있는 생물은 지금 나 말곤 없다는 것을, 방금의 짧은 접촉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딱딱하고 둔탁한 느낌에 효자손 끝으로 전해진다. 원래 할아버지의 어깨가 그런 감촉이었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산 자의 직감으로 나는 즉시 알아차린다. 이것은 죽었다는 것을.

문득, 나는 숨을 참는다.

언제부터였을까. 할아버지는 언제부터 죽어 있었던 걸까. 알 수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은 사실이지만 어쩔 수 없이 생각한다. 그건 내가 잠들어 있었던 동안의 일이다. 내가 깊게 잠들어 무방비하게 들숨 날숨을 마음껏 내쉬고 있는 동안에 이 방안에서. 죽음이 병균처럼, 곰팡이처럼 가득차 휘돌고 있는 줄도 모르고. 나는 죽음을 실컷 들이마셨다. 폐부에 깊이 박힌 죽음은 이미 검푸른 손가락을 뻗기 시작했을 것이다.

다음 순간 나는 집 문을 박차고 달려나간다. 뱃속을 바람으로 씻어내려는 사람처럼 입을 딱 벌린 채, 목구멍 깊은 곳에서부터 치미는 비명을 내지르면서. 최대한 이곳에서 멀어져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다.

하지만 대체 어떻게 죽음으로부터 도망친단 말인가?

그때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른다.

하늘아, 왜 그러니?

나는 숨을 헐떡이며 소리가 난 방향을 바라본다. 춘 여사가 걱정스런 얼굴을 하고 나를 보고 있다. 어느새 발판까지 달려왔구나. 나는 이마를 타고 얼굴로 쭈르르 흐르는 땀을 소매로훔친다. 뭐라고 말을 하려고 하는데 말이 나오지 않는다.

……할아버지, 돌아가셨니?

춘 여사가 묻는다. 나는 고개를 작게 여러 번 끄덕인다. 춘 여사가 혀를 쯧, 찬다. 항상 앉는 의자에서 내려온 그는 절름거리며 내게로 걸어온다. 그러고는 손을 뻗어 내 등을 쓸어준다.

괜찮다. 괜찮아. 진정해라.

손이 닿자 나는 흠칫 놀란다. 하지만 춘 여사는 아랑곳없이 땀에 젖은 내 등을 계속 쓸어내린다. 천천히, 나는 진정한다. 바짝 말라버린 목구멍이 서서히 습기를 되찾는다. 하지만 심장은 여전히 쿵쿵 미친듯이 뛰고 있다. 춘 여사가 휴대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거는 모습을 나는 맥없이 지켜본다. 아주 오랫동안 이어진 연결음 끝에 수화기 너머로 아버지의 목소리 같은 것이 들린다. 춘 여사는 낮은 목소리로 할아버지가 죽었다고 알린 뒤 덧붙인다.

빨리 돌아와야 해. 딸아기가 혼자 있어.

이 와중에도 나는 아기라고 불린 것을 귀담아듣는다. 그래, 죽음을 목도하기에 나는 너무 어리다. 그것을 누군가의 입으로 확인받고 나자 그제야 끔찍한 일을 당했다는 것이 실감 나는 것 같다. 아직 손아귀에는 플라스틱 효자손의 감촉이 남아 있는데.

어떻게 돌아가셨니?

전화를 끊은 춘 여사가 묻는다. 순식간에 어린아이가 된 내가 우물쭈물 대답한다.

모르겠어요…… 자고 일어났는데 그렇게 돼 있었어요.

주무시다 가셨니?

……아마도요.

응, 좋은 일이다.

춘 여사는 짧게 말하고는 잠시 동안 내 얼굴을 바라본다. 정말 그렇지 않느냐는 듯이.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그의 눈을 피한다. 할아버지의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보지 않은 건 아니다. 언젠간 일어날 일인 걸 알고 있었고 사실은 빨리 일어났으면 하고 바란 적도 많다. 하지만 그것을 좋은 일이라고 부르기에는 아직 죽음은 내게 너무 크고 무겁다. 그리고 나는 천천히 깨닫는다. 죽음은 나보다 춘 여사에게 더욱 가까이 있으며 그러므로 나보다는 그가 죽음을 더 명료히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나도 먼 훗날 언젠가는 이 명료함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사실도.

아버지 올 때까지 여기 있어라. 오시면 같이 돌아가렴.

춘 여사가 절름거리며 의자로 돌아가 앉는다. 땅 사람들이 편의점에서 쓰는 등받이 달린 플라스틱 의자다. 깨진 다리 한쪽을 누런 테이프로 둘둘 감아놓은 그 의자 옆에 나는 옹색하게 쪼그려앉는다. 여기 있고 싶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집으로 돌아갈 마음은 추호도 없다. 아니, 나는 평생 그곳으로 다시는 가고 싶지 않다. 더구나 거기서 밥을 먹고 잠을 자야 한다니. 나는 싫다. 그럴 수 없다. 그곳은 이미 죽음이 점령했다. 그곳에 내 것이라고는 하나도 남지 않았다. 춘 여사가 가만히 중얼거린다.

나도 가끔 그런 생각을 하곤 해.

무슨 생각이요?

무슨 생각이겠니.

우리는 잠시 아무 말도 없이 각자 바닥만 본다. 거기에 씌어 있는 징조를 읽으려는 예언자들처럼. 나는 춘 여사가 입을 다물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죽음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듣고 싶지 않다. 나는 부는 바람이 내 머리카락을 제멋대로 헤집도록 내버려둔다.

그래도 하나 좋은 점이 있는데, 뭔지 아니?

나는 고개를 젓는다.

여긴 땅보다 높잖아. 땅 사람들보다 더 빨리 천국에 도착할 수 있어.

말을 마치고 춘 여사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는다. 나는 웃지 않는다. 웃을 기력도 없고 웃기지도 않으니까. 만약 기운이 있었다면 웃는 대신 되물었을 것이다. 여기보다 더 높은 곳으로 간다구요? 죽어서까지요? 정말 그런 걸…… 원하세요? 하지만 나는 그저 입을 일자로 다물고 플라스틱 의자 옆에 쪼그려앉아 있을 뿐이다. 온몸에 힘이 쭉 빠지는 것만 같다. 아빠는 언제 올까. 아빠가 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나는 뭘 해야 할까. 아무것도 알 수 없다. 하긴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원체 별로 없다. 미래에 대해서도, 삶에 대해서도. 이 순간에도 집에선 할아버지의 시체가 굳어가고 있다. 그 사실을 곱씹으며 나는 무릎 사이에 머리를 파묻는다. 바람이 갈퀴처럼 목덜미를 긁고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