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나는 그네에 앉아 있다. 어렸을 때 그네를 타고 논 기억이 많진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그네는 아주 좋아 보인다고 생각하면서. 앉는 부분은 빨간 플라스틱으로 되어 있고 그네 줄은 고무로 꼼꼼히 감싸여 있다. 물론 좋은 것은 그네뿐만이 아니다. 알록달록한 색칠된 미끄럼틀과 구름사다리에 이어, 이곳을 빙 둘러 감싸고 있는 나무들까지도 하나같이 아름답게 전정이 되어 있다. 나는 우레탄 바닥을 운동화 신은 발로 툭툭 걷어찬다. 여기 사는 아이들은 이런 곳에서 이런 것들을 가지고 노는구나. 그러나 놀이터에서 놀 나이는 진작에 지났다. 이것들은 이제 내게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그네 줄을 양손으로 잡고 발을 한번 구른다. 몸이 가볍게 솟구친다. 모든 것이 조금 작아졌다가 순식간에 다시 쑤욱 커진다.
나는 엄마를 찾는 중이다.
엄마와 연락이 끊긴 지 일주일이 지난 참이다. 정확히는 할아버지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리려 전화를 건 그날부터. 계속 전화를 받지 않기에 아기를 재우고 있나보다 싶어 문자를 남겼는데 답장이 없었다. 저녁에 다시 한번 전화했을 때도, 그다음날 아침에도 그랬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동생이 걱정스럽게 말했을 때 나와 아빠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서로의 눈을 쳐다보거나 걱정스런 말을 주고받지도 않았다. 우리 둘 다 이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걸 아니까. 더 생각할 것도 없다. 일어난 것이다. 우리가 언젠가 일어날 거라고 생각했던 그 일이.
그러나 예상했다면, 멍청하게 두 손 놓고 앉아 부루퉁한 얼굴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대비를 했어야 했다. 정보를 수집하고 대책을 세워뒀다가 일이 터진 즉시 실행했어야 옳았다.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이곳에서 바보같이 그네나 타고 있는 것이다. 엄마가 일하는 집 주인의 연락처는커녕 그가 어디서 뭘 하는 누구인지도 모른다. 그 집이 몇 동 몇 호인지, 엄마가 돌보는 아기의 이름은 뭐고 주로 언제 어디로 외출하는지도. 다만 언젠가 무슨 이야기 끝에 □□아파트라는 단어가 나왔던 것을 겨우 기억해내 무작정 여기로 찾아왔지만 아파트 단지라는 것의 내부가 내 생각보다 훨씬 크고 넓다는 것을 미처 몰랐다. 일단 들어오는 것부터 쉽지 않았다. 문이란 문에는 죄다 전자 도어 록이 달려 있고 넘을 만한 야트막한 담장도 없었다. 기웃거리다 운 좋게 카드 키를 찍고 들어가는 누군가의 뒤에 붙어 어찌어찌 들어오긴 했지만, 다 똑같이 생긴 건물이 미로 같이 늘어선 길을 끊임없이 헤매다가 결국 들어온 입구조차 잊어버리고 말았다. 이 광활한 안쪽을 빙빙 돌면서 나는 여기서 우연히 엄마를 마주칠 확률은 제로에 가깝다는 것을 깨달았다. 온몸이 땀에 젖었고 어쩐지 피로가, 극심한 피로가 몰려온다. 이제 다 필요 없으니 그냥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러나 나는 돌아가는 길조차 모른다. 아침부터 텅 비어 있는 뱃속에서 요란한 소리가 난다.
그때 기다렸다는 듯, 어딘가에서 맛있는 냄새가 풍겨온다.
나는 냄새가 나는 쪽을 건너다본다. 그네 옆 미끄럼틀 꼭대기에 남자아이 하나가 앉아 있다. 팝콘 치킨이 든 길쭉한 종이컵을 쥔 채로. 그애는 내가 그쪽을 보기 전부터 나를 쳐다보고 있었던 듯하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아이가 기다렸다는 듯 말한다.
여기 사는 사람 아니면 들어오면 안 되는데.
나는 당황한다. 내가 여기 안 산다는 사실을 어떻게 한눈에 알아차렸는지는 둘째 치고 그 말에서 느껴지는 악의, 순수하리만치 느껴지는 적대감이 나를 놀라게 한다. 나는 그냥 여기 앉아서 그네를 타고 있었을 뿐이다. 아무것도 부수지도 해를 끼치지도 않았고 끼칠 생각도 없다. 그러나 내가 여기에 몰래 스며들어온 것은 사실이다. 카드 키도 없고 비밀번호도 모르는 곳에. 출입 권한이 없는 곳에.
경비 아저씨 부르면 바로 오는데.
아이가 계속 중얼거린다. 나는 그네에 앉은 채 아이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본다. 하얀 얼굴에 안경을 쓴 아이는 동생과 비슷한 또래로 보인다. 발치에는 무슨 학원의 상호명이 적힌 가방이 놓여 있다. 나는 그 학원 가방을 바라보며 말한다.
불러.
아이는 의외의 대답에 놀라는 기색을 애써 숨긴다. 당장이라도 달려갈 듯 아이의 다리가 씰룩거린다. 빤하고 작은 마음. 경비에게 외부인이 침입했음을 일러바치고 싶은 마음과 그래도 뒤탈이 없을 것인지를 재어보는 마음이 아이의 내부에서 부딪치고 있다. 나는 발을 굴러 그네를 띄운다. 아무렇지 않은 척 무심한 얼굴로.
부르라고.
한 번 더 재촉하자 아이는 결심한다. 나를 한 번 노려보더니, 손에 든 컵을 내려놓고는 쿵쿵 소리 내며 미끄럼틀을 뛰어내려간다. 그러고는 어딘가로 달려간다. 나는 뭔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뛰는 아이의 뒷모습을 미소 지으며 바라본다. 좋겠다, 단지 뛰어가기만 하면 문제를 해결해줄 누군가를 불러올 수 있어서. 아이가 코너를 돌아 사라지자마자 나는 그네에서 일어선다. 미끄럼틀 계단을 한달음에 올라가 아이의 가방 옆에 놓인 팝콘 치킨 컵을 챙긴다. 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뛴다. 어디로든 상관없다. 어차피 나는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니까. 건물을 빙 돌아 나와 수풀 사이로 난 좁은 길을 아무렇게나 가로지른다.
이윽고 아까와 거의 똑같이 생긴 놀이터를 발견하고, 나는 다시 그네에 앉는다. 반쯤 남은 팝콘 치킨은 차갑게 식어 있다. 아이가 쓰던 가느다란 꼬챙이로 그것을 찍어 입에 넣고 천천히 씹는다. 짜고 단 양념이 입안에 퍼진다. 나는 쩝쩝 소리를 내면서 눈으로는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계획은 간단하다. 경비가 나타나면 튄다, 엄마가 나타나면 달려가서 잡는다, 그전까지는 이 그네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삶을 전체로 보는 것은 불행의 지름길이다. 단지 지금 당장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만 중점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게 현명하다. 눈썹 한 올이라도 까딱할 것 같으냐, 고작 이 정도 일로. 나는 그네 줄을 힘껏 검잡는다. 발을 구르자 다시 한번 사방이 작아졌다 커진다. 모든 것이 잘 정돈되어 있는 모습이 아름답다. 그네가 허공의 가장 높은 지점에 가닿은 순간, 나는 빈 팝콘 치킨 컵을 구겨서 등뒤로 던진다. 떨어지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24
이대로 포기할 거예요?
경찰에 신고를 하든지, 사람을 고용해서 샅샅이 뒤지든지 해야 될 거 아니에요.
아빠가 안 하면 저라도 해요.
아빠는 아무 말 없이 담배만 피운다. 고개를 푹 숙이고 어깨를 움츠린 채, 들어 마땅한 꾸지람을 감내하고 있는 어린이 같은 자세로. 나는 아빠의 정수리를 본다. 부쩍 듬성듬성해진 것 같기도 하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쉰다.
온 동네에 소문이 자자해요. 우리 엄마 도망갔다고.
그건 사실이다. 어젯밤, 부루퉁한 얼굴로 다가온 동생이 말했다. 누나, 우리 엄마 도망갔어? 나는 입을 다무는 게 좋을 거라는 뜻으로 동생을 노려보았지만 동생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애들이 나 놀려. 엄마 도망간 새끼라고. 동생을 때리려고 주먹을 들어올리다 멈칫한다. 동생의 한쪽 볼은 이미 퉁퉁 부어 있다. 이마께에는 손톱자국 같은 것도 죽죽 그어져 있다. 하긴 그렇다, 엄마 도망간 새끼라는 말을 듣고 가만히 있었을 녀석이 아니니까. 나는 때리려고 들어올렸던 손으로 동생의 어깨를 잡아 옆에 앉힌다.
야, 들어봐. 엄마가 말하지 말랬는데.
동생이 뚱한 얼굴로 올려다본다. 전구 불빛에 번들거리는 작고 약삭빠른 눈동자. 나는 그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한다.
엄마 해외여행 갔어. 엄마 일하는 집 주인이 엄마한테 고맙다고 특별히 보내줬대.
어디로?
어…… 일본. 일본 갔대. 우리집 형편 뻔히들 아는데 해외 나갔다고 하면 뒤에서 욕할까봐 비밀로 하고 간 거야.
언제 오는데?
한 달 뒤에 온대. 아무튼 너도 비밀 지켜라. 괜히 엄마 욕 먹이지 말고.
동생은 말없이 다른 곳을 본다. 방구석의 아주 어두운 곳을. 그러다가 조용히 대꾸한다.
누나, 누나는 내가 아직도 애새끼라고 생각해?
할말이 없어진 나는 동생이 훌쩍 일어나 집에서 나가는 뒷모습을 그저 바라본다. 그러다가 헛웃음을 터뜨린다. 언제 저렇게 컸지, 하는 의미의 기특한 웃음이 아니다. 자기가 다 큰 줄 아는 게 우스워서다. 진짜로 다 컸다면 내 거짓말을 간파하고도 모르는 척했을 거다. 할 수 있는 거라곤 고작 이런 뻔한 거짓말이 전부인 누나를 안쓰러워하면서. 나머지 의혹은 마음속 창고에다 쑤셔넣고 혼자 누운 밤에나 몰래 꺼내보며 곱씹겠지. 불쌍한 내 동생은 아직 거기까지 되지 못했다. 앞으로 더 커야 할 것이다. 더 괴로워야 할 것이다. 아무도 몰라주는 종류의 고통을 끊임없이 견뎌야 할 것이다. 나는 계속 피식피식 웃으며 동생이 나간 문을 바라본다.
하지만 엄마를 찾아내야 하는 것은 덜 자란 동생 때문이 아니다.
엄마는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저질렀다.
혼자 도망치다니. 이 구질구질한 것들을 다 내팽개치고 자기만 살겠다고 떠나다니. 그것만은 절대로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 도망칠 기회는 내게도 있었다. 월급이 든 봉투를 품에 안고 돌아오는 매달 십오 일마다, 한밤중에 이불 아래 파인 구멍에 들어 있는 돈뭉치를 상상하던 밤마다 그 기회는 내 머릿속에서 다양하고도 자세한 모양으로 펼쳐지곤 했다. 이대로 이걸 갖고 몰래 떠난다면 어떨까. 행선지 없이 버스를 잡아타고 아무도 나를 찾지 못할 곳으로 간다면. 당장 잘 곳도 먹을 것도 없을 테지만 마음만은 가뜬할 것이다. 세상천지 책임질 거라곤 오직 내 입 하나뿐인 삶이라니. 그게 얼마나 좋은지는 살아보지 않아도 안다. 아주 쉽게 그것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것도. 그걸 다 알면서 터벅터벅 구름 위 작은 집으로 돌아오고 먹여 살릴 가족들 옆에 몸을 누이는 거다. 이 좆같고 거지같은 굴레에서 혼자 도망치다니. 나머지 사람들에게 짐을 모두 떠넘기고 자기만 훨훨 자유로이? 안 되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 잡아올 것이다. 지구 끝까지라도 따라가서 멱살이든 머리채든 휘어잡고 집으로 끌고 올 것이다. 다시 이 진창에 처넣은 뒤 도망가면 어떻게 되는지 본보기를 보여줘야 한다.
그러니까 아빠, 엄마를 찾아야 된다고요.
아빠는 여전히 말이 없다. 아무 대꾸도 하지 않기로 작정한 것 같다. 나는 답답해서 발을 쿵쿵 구르지만 아랑곳 않는다. 이럴 때 아빠는 알맹이가 다 빠져나간 콩깍지처럼 보인다.
뭐라고 대답 좀 해봐요 좀.
……나는 안 찾을 거다.
내 등쌀에 못 이겨 한참 만에 입을 연 아빠가 말한다.
아니 왜요? 아빠는 괘씸하지도 않아요?
괘씸하지. 괘씸한데, 나는 안 찾을란다.
아빠가 훌쩍 일어나 엉덩이를 툭툭 턴다. 바지에 붙어 있던 담뱃재 부스러기들이 휘날린다. 더이상 이 얘기는 그만하라는 신호다. 하지만 나는 그만둘 수 없다. 집으로 휘적휘적 걸어가는 아빠의 옷자락을 붙잡는다.
아니 아빠, 그래도……
말을 더 잇지 못한다. 순간 눈앞에 새하얀 불빛이 번쩍 튀었기 때문이다. 나는 얼굴을 부여잡고 바닥에 쓰러진다. 방금 내 왼뺨을 후려갈긴 아빠의 손이 이제는 목과 어깨를 마구잡이로 내리친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나는 안다. 최대한 몸을 웅크려 주먹을 받아내는 동시에 아빠의 다리 한쪽을 붙잡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발로 걷어찰 수도 없는 데다 손을 쓰기도 힘들어진다. 그러나 운 나쁘게도 이번에는 이 방법이 먹히지 않는다. 아빠는 다리를 한 번 휘저어 내 팔을 떼어내고는 나동그라진 나를 발로 힘껏 걷어찬다. 아랫배를 정통으로 걷어차이자 입에서 저절로 끅 하는 소리가 새어 나온다. 나는 몸을 새우처럼 웅크린다. 아빠는 분이 풀릴 때까지 나를 때릴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 누워 있는 것이 동생이 아니라 나라서 다행이다. 동생은 버티지 못했을 테니까. 바보같이 도망치다가 붙잡힌 뒤 그야말로 죽기 직전까지 얻어터졌을 테니까. 나는 생각하며 온몸에 힘을 주고 다음번 타격에 대비한다.
그때 가까운 곳에서 다급히 뛰어오는 발소리가 들린다. 이윽고 귀 옆쪽으로 휙, 누군가 지나가더니 그대로 아빠에게 달려든다.
야, 이 미친 새끼야!
악쓰는 목소리를 듣고서야 나는 그게 원임을 알아차린다. 땅에 한 손을 짚고 일어나보니 원이 아빠의 팔을 잡고 서 있다.
개새끼야, 딸을 개 패듯 팬다고 마누라가 돌아오냐?
원이 아빠의 얼굴에 제 얼굴을 가까이 붙인 채 이기죽거린다. 아빠와 마주선 원은 아빠보다 두 뼘이나 크다. 그 틈을 타 나는 일어서서 얼굴을 만져본다. 코피가 터졌는지 손에 미끈한 피가 척척하게 묻어난다.
이 새끼가 남의 집안 일에 함부로 입을 나불대고. 어디서 배워먹은 버르장머리냐?
야, 너는 버르장머리 잘 배워서 자기 딸을 길거리에서 이렇게 패냐?
두 사람은 서로를 죽일 듯이 노려본다. 말려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누구의 편을 들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린다. 나는 누구 편일까. 아무래도 알 수가 없지만 그렇다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는 것도 이상하다. 그제야 사방을 둘러본다. 이미 이웃들 몇 명이 집밖으로 나와 우리를 보고 있다. 부끄러워 고개가 저절로 수그러든다. 언제부터 봤을까. 모두 알고 있을까, 내가 왜 맞고 있었는지를. 그냥 이곳에서 사라져버리고만 싶다. 그만해. 나는 누구에게랄 것 없이 작게 말한다. 원이 아빠의 팔을 탁 놓아주며 말한다.
한 번만 더 얘 때리다가 걸리면, 그땐 마누라뿐만 아니라 딸자식도 못 보게 될 줄 알아.
원은 나를 한 번 쳐다보고는 땅에 침을 뱉는다. 땅 사람들이 만드는 영화 속 전형적인 구름 출신 불량배처럼. 나는 원이 돌아서서 떠나는 모습을 멀거니 바라본다.
집으로 돌아와 대야에 물을 붓는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지르자 비릿한 물이 뚝뚝 떨어진다. 그제야 아픔이 밀려온다. 퉁퉁 부은 얼굴이, 호되게 걷어차인 아랫배가, 바닥에 엎어지고 구르느라 쓸린 어깨와 발목이 전부. 나는 이를 꾹 악물고 아픈 곳을 씻어낸다. 그래도 이 정도로 끝난 것이 다행이다. 원이 아니었다면 이것보다 훨씬 심하게 맞았을 것이다. 내일 일하러 갈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눈을 세모꼴로 뜨고 아빠와 얼굴을 거의 맞대다시피 하며 서 있던 원의 모습을 떠올린다. 누군가 내 편을 들어준 건, 내가 맞고 있을 때 내 앞에 서준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 처음이 원이라는 사실이 나는 기쁘다.
원은 나를 데리고 도망칠 생각을 해본 적이 있을까.
그러자 갑자기, 모든 아픔이 씻은듯이 사라진다.
지금까지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평생 찾아 헤맸던 해답이 갑자기 눈앞에 환한 빛을 발하며 놓여 있는 것 같다. 원과 함께 도망치는 것. 그건 분명 좋을 것이다. 내 손을 잡아끄는 원을 못 이기는 척 따라가며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멀리멀리 떠나는 거다. 두려움도 죄책감도 모두 나를 꼬여낸 원에게 지워버리면 된다. 벌써 내 귀에는 우리 이래도 될까, 하고 겁먹은 듯 웅얼거리는 내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그러면 원은 얼굴을 찌푸리고 당연히 되지, 대답할 것이다. 무슨 그런 걸 묻느냐는 사람처럼. 그거면 됐다. 그 말만 들을 수 있다면 나는 어디라도 가겠다. 정말 그 어디라도. 밥을 굶어도 좋고 길거리에서 잠들어도 좋다.
나는 눈을 희번덕거리며 주변을 둘러본다. 당장이라도 이 집을 뛰쳐나갈 사람처럼. 하지만 동시에, 나는 내가 그러지 못할 것임을 안다.
라면 좀 끓여라.
방구석에서 아빠의 목소리가 들린다. 나는 옷소매를 길게 늘여 얼굴에 묻은 핏물을 닦아낸다. 그러고는 아주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네, 하고 소리 내어 대답하지는 않는다. 이것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반항이라고 생각하면서.
25
나와 아빠는 화장한 할아버지의 유골을 어떻게 해야 할지 의논한다. 그것은 매화 무늬가 그려진 연두색 항아리에 담겨 있다. 만져보면 싸구려임을 알 수 있지만 언뜻 보기엔 금박이 들어간 도자기처럼 보이는 디자인이다. 나는 이 예쁜 항아리가 마음에 든다. 안에 할아버지의 뼛가루가 들어 있다는 사실만 제외하면.
꼭 어디에 뿌려야 해요?
이대로 놔둘 순 없잖아. 집이 납골당도 아니고.
놔둬도 될 것 같은데요. 예쁘잖아요.
이게 예쁘다고?
황당하다는 듯한 너털웃음. 나는 머쓱해져 괜히 항아리를 쓰다듬는다. 항아리 옆면에 할아버지의 이름이 쓰여 있다. 이름자 앞에 붙은 故라는 한자를 제외하면 그것은 꼭 문패처럼 보인다. 어쩌면 이곳은 할아버지의 새집이다. 오롯이 혼자만 머물 수 있는 공간. 모두가 언젠가는 결국 집을 갖게 되는구나. 이 안은 아늑할까. 조용하고 따스할까. 나는 항아리를 눈높이로 들어올려 바라보다가 문득 질문한다.
할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어요?
뭐가 어떤 사람이야?
그냥, 옛날에는요.
허어.
아빠는 잠시 먼 곳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다.
젊었을 때는 땅에 살았다고 했어. 그때는 이런 구름이 없었던 시절이라.
좋았대요?
좋긴 뭘. 돈 없으면 고달픈 건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지. 나 태어나기 전엔 그래도 화물차 운전도 하고 이삿짐센터도 다녔다고 들었어. 늙으면서 이상하게 사람이 쪼그라들어서 그렇지, 젊었을 땐 덩치도 좋았다더라고.
덩치가 좋았다니. 나는 불과 얼마 전 모습도 벌써 가물가물해진 할아버지의 생전을 상상해본다. 대충 얽은 뼈 위에 윤기 없는 가죽을 덮어씌워놓은 것 같았던 할아버지의 몸. 한때는 그 안에 단단하게 뭉쳐 꿈틀대는 근육이 들어차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거지같은 인생이 천운으로 잘 풀릴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낙관을 품고 살아가는 젊은이. 그때의 할아버지는 자신이 이렇게 죽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의 내가 나의 죽음을 상상할 수 없듯이. 그런 걸 생각하면 아득해진다. 먼지만큼 작아지고 무력해지는 기분이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끝이 있다. 나는 이런 마음을 아느냐고 묻는 심정으로 아빠를 바라본다.
사실 예전에 할아버지가 말한 적이 있었어.
뭘요?
자기 죽으면 화장해서 고향 땅에 뿌려달라고.
고향이요? 고향이 어딘데요?
글쎄, 들었는데 잊어버렸어. 하도 오래된 일이라.
아빠가 뒷목을 문지르며 중얼거린다. 어쩔 수 없다, 죽은 사람에게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우리는 망연히 앉아 항아리만 바라본다. 머릿속으로 많은 질문들이 지나간다. 할아버지는 이 예쁜 항아리 속에 있을까, 없을까. 사람은 죽어서 어디로 갈까. 나는 죽어서 어디로 가고 싶을까.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여기는 아니다. 이곳에 남고 싶지는 않다.
구름 위에서 뿌리는 건 어때요?
밑으로 뿌리자고?
그게 낫지 않을까요.
나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일어선다. 항아리를 품에 안고 걷기 시작하자, 아빠가 체념한 듯 뒤따라온다. 우리는 묵묵히 걷는다. 방향을 정할 필요도 없다. 아무 쪽으로나 계속 걸어가면 언젠가는 구름의 끝에 도달하게 되니까. 우리는 골목을 빠져나간다. 드문드문 놓인 고물들을 지나 쓰레기산 쪽으로 접어든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인형들을 숨겨놓은 폐지 더미를 지나친다. 이윽고 예전에 고양이가 뛰어내렸던 그 지점에 다다라서 나는 뒤를 돌아본다. 아빠가 무심한 얼굴로 걸어오고 있다.
이쯤에서 뿌릴까요.
아빠는 마음대로 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항아리 뚜껑에 손을 댄다. 생각보다 꽉 닫혀 있다. 도와줄 법도 한데, 한참을 비틀고 돌리며 낑낑대는 동안 아빠는 옆에 놓인 고물 텔레비전에 관심이 있는 척하며 딴청을 부리고 있다. 나는 짜증을 내며 용을 쓴다. 한참이 지나서야 뻑 소리와 함께 항아리가 열린다. 한숨을 쉬고 안을 들여다본다. 생각보다 내용물은 적다.
뿌릴게요.
나는 항아리를 들고 구름 가장자리로 걸어간다. 최대한 갈 수 있는 만큼 다가간 뒤 구름 바깥을 향해 팔을 쭉 뻗고 항아리를 뒤집는다. 소리 없이, 그다지 곱지 않은 뿌연 가루가 확 쏟아져 바람을 타고 날아간다. 혹시 그것을 들이마실까봐 숨을 참고서 뒤집은 항아리를 툭툭 턴다.
됐어요.
말하며 돌아섰을 때, 아빠는 등을 돌린 채로 버려진 텔레비전 앞에 쪼그려앉아 있다. 툭 튀어나온 더러운 화면에 아빠의 얼굴이 어른어른 비친다. 나는 금세 알아챈다. 아빠는 두려워하고 있다. 두려워서 외면하고 싶은 것이다. 무엇을? 그야 죽음이다. 누구에게나 기어코 찾아오는 끝. 항아리 속에 가루 내어져 들어 있는 죽은 사람의 뼈. 혹은 죽음 그 자체. 나는 아빠의 옆으로 다가가, 텔레비전 옆에 빈 항아리를 내려놓고 아빠의 어깨를 툭툭 친다.
이제 가요.
아빠는 착한 어린애처럼 순순히 일어선다. 우리는 집을 향해 걷는다. 빈 항아리를 그곳에 두고 왔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나중에 그걸 보러 다시 올 것이다. 그 안에 뭔가를 담을 수도 있겠지, 담을 만한 것을 찾아낸다면.
26
손톱이 참 예쁘네요.
무심코 말해놓고 나서 나는 입술을 깨문다. 이런 말을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그러나 이미 내 말을 들은 듯 계산서를 쥔 여자는 이가 다 드러나도록 활짝 웃는다.
그쵸? 어제 받았어요.
여자가 손을 부채처럼 쫙 펼쳐 내 눈앞에 들이민다. 크게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해놓은 말이 있으므로 나는 그의 손톱을 들여다본다. 매끈하고 날렵하게 다듬어진 열 손톱이 투명한 핑크색으로 칠해져 있다. 어릴 적 아껴 먹느라 뱉었다가 다시 입에 넣길 반복했던 딸기맛 사탕 같다. 엄지손톱에는 커다란 보석도 박혀 있다.
진짜 예뻐요.
나는 미소 띤 얼굴로 말해준다. 여자가 웃으며 고맙다고 답하곤 카드를 내민다. 칠만 오천백원 나왔습니다. 서명해주시겠어요? 영수증 드릴까요? 안녕히 가세요. 그것으로 대화는 끝이다. 나는 그날 더이상 손톱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 주 휴일, 나는 네일 숍 앞을 서성거리고 있다.
오랫동안 일한 골목이다보니 여기 네일 숍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한 번도 관심을 가져본 적 없어 늘 심상하게 지나쳤던 곳이다. 내가 왜 이곳을 기웃거리는지도 모르는 채 나는 예쁜 커튼이 쳐진 유리창 안을 들여다본다. 아직 가게를 열지 않은 듯 안에는 아무도 없고 불도 꺼져 있다. 벽에 일렬로 늘어서 있는 색색의 매니큐어들이 제법 예뻐 보인다. 저중 하나를 내 손톱에 바른다면, 어떤 것이 좋을까. 슈퍼에서 과자를 고르는 아이처럼 나는 매니큐어들을 주의깊게 살펴본다. 그러다가 깜짝 놀란다. 그 아래에 적힌 가격을 봤기 때문이다. ‘젤네일/케어 회원가 6만원부터’. 나는 눈을 의심한다. 기껏해야 손톱을 칠하는 것뿐인데 육만원이라고? 뭐, 저 안에 금이라도 들었나? 나는 어이가 없어 코웃음을 픽 치며 돌아선다. 육만원이라니 먹고 죽을래도 없다.
왜 없어 있잖아, 하고 내 안의 내가 속삭인 건 그때다.
돈은 있다. 방바닥에. 지저분한 이불을 몇 겹 들춰내면 나타나는 구멍에. 마침 그저께 월급을 받아온 참이다. 매번 그랬듯이 월급 봉투에서 돈을 끄집어내서 그대로 거기 넣어두었다. 원래 들어 있던 돈뭉치 위에. 아빠가 그걸 세어봤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육만원, 아니 십만원 정도가 빈다고 해도 모를 게 틀림없다. 고작해야 오만원짜리 두 장이니까. 들킨다고 해도 식당에서 무슨 실수를 하는 바람에 메꿔야 했다고 핑계를 대면 된다. 그 정도 거짓말쯤이야 눈 감고도 할 수 있다. 벌써 내 귀에는 그런 말을 하는 내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계산을 잘못해서 돈이 비는 걸 나한테 채워넣으라고 하더라고요.’ 나는 천천히 돌아선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콧노래를 부르며 걷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