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회

요괴의 분기점

안녕하세요, 외계인 호시노상. 당신의 편지를 받고 저는 소파에서, 또 책상에서 편지를 읽었습니다. 당신의 문장은 제가 자세를 바꿀 때마다 다른 각도에서 다가왔습니다. 이렇게 무더운 여름 한복판에, 당신의 문장이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조금은 숨통이 트였습니다.

호시노상은 축구를 좋아한다고 했죠. 요즘도 운동장을 누비십니까? 아니면 난초 잎에 쌓인 먼지를 살살 털고 계실까요? 그 모습을 상상하며, 저는 ‘별명 제조기’ 본능을 다시 깨웠습니다. 당신이 기꺼이 얄궂은 별명을 받아들여 현란하게 변신해준 덕에, 외계인과 요괴가 탄생했지요.

요괴는 경계에 깃드는 존재라고 합니다. 인간과 동물, 삶과 죽음, 낮과 밤, 과거와 현재의 틈에 머무는 자. 저 역시 그 경계 어딘가에서 시를 쓰고, 인간을 관찰합니다. 그러니 ‘요괴’와 ‘외계인’이라는 호칭은 우리를 가장 정확하게 설명하는 별명일지도 모릅니다. 개구리 발가락 모양 신발을 신고 건널목을 폴짝 건너는 외계인의 모습이 떠오르지만, 새 별명은 다음 만남을 위해 아껴두겠습니다.

도쿄에서 돌아온 뒤, 저는 스핀이 걸린 탁구공처럼 허공에 떠 있었습니다. 강의하고 글을 쓰며 분주했지만, 무게중심을 잃은 채 공허했습니다. 몸은 도쿄에도, 서울에도 있었지만 동시에 어디에도 없는 듯했습니다. 살아 있으면서도 삶의 경계 밖에 선 기분, 바로 요괴의 궤도에 선 기분이었습니다.

 

후지산을 함께 보러 가기 며칠 전, 저는 시어머니의 부고를 받았습니다. 도쿄에 남은 일정을 뒤로 하고 급히 한국행 비행기표를 구했습니다. 공항에 도착하고 나서야, 허둥지둥 나오느라 원피스 허리띠를 제대로 매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장례를 치른 지 사흘 만에 다시 도쿄로 돌아와 그날 저녁 산겐자야에서 북토크를 했고, 부음은 시미즈 선생께만 조용히 알렸습니다. 열한 살의 호시노상이 아버지의 부재를 온전히 느끼지 못했던 것처럼, 저 역시 그날의 감정을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비존재가 된 듯했습니다.

 

한국에 돌아온 뒤, 시어머니의 봉안당을 찾았습니다. 한낮의 추모공원은 그림자조차 고요했고, 햇볕은 살을 델만큼 강했습니다. 양산을 쓴 여자가 드넓은 묘역에 홀로 앉아 있었습니다. 곁에 들꽃을 꽂은 음료수병과 작은 축구공이 있었습니다. 생몰 연도를 보니, 열 살도 안 된 아이의 묘비였습니다. 그 한 달은 인간의 의지로는 선택할 수 없는 시간을 애도하며 보냈습니다.

 

호시노상을 만났을 때 마음 한쪽은 여전히 애도 속에 있었고, 다른 한쪽은 예정된 후지산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후지산에 가기 전, 저는 신비롭고 영험한 존재를 상상했습니다. 거대한 흰 문어가 분화구를 틀어막아 산의 열기를 삼키고, 세상의 재앙을 막는 모습이었지요. 그러나 버스에서 내려 처음 본 후지산은 제 상상을 부드럽게 밀어내듯이 말했습니다.

‘나는 그런 상징이 아니야.’

후지산의 상쾌한 공기를 마시는 순간, 안치실의 서늘한 공기가 피부를 스쳐 지나가는 듯했습니다. 애도의 반사작용이었을까요? 시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어요. 솜으로 막은 입, 화장로로 향하는 얼굴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친구들과 웃고 떠들 때도, 제 영혼은 가느다란 휘파람처럼 빠져나갔다가 돌아오는 듯했습니다.

 

호시노상은 편지에 썼지요. 자주 만나지 않아도, 그 사람이 있다고 상상하면 실제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고요. 그 말이 위안이 되었습니다. 시어머니는 그날 이후, 투명한 그림자처럼 제 곁에 머물렀습니다.

시어머니를 좋아했습니다.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어 자주 뵙지 못했지만, 그래서 오히려 다정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었던 듯합니다. 가끔 “너 같은 딸이 있으면 좋겠다”라고 하시면, 저는 단호하게 “무리!”라고 대답했고, 그러면 어머니는 크게 웃으셨죠.

레지던시 프로그램으로 일본에 간다고 했을 때, 병상에 누워 있던 어머니는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어디 가서도 사랑받을 거야.”

그후,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두 번 왔지만, 마감중이라 받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 통화가 되었습니다.

 

시미즈 선생은 더 아름다운 후지를 보여주지 못해 아쉽다고 하셨지만, 그 산은 있는 그대로의 얼굴을 보여주었습니다. 산비탈에 우유 한 방울이 번진 듯 남아 있던 잔설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후지는 제가 덧씌우려 했던 신비를 부드럽게 밀어내며, 기다란 팔을 뻗듯 다가왔습니다. 그 부드러운 밀려남에 장례식장에서 제가 꼭 쥐고 있던 질문을 슬며시 놓아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틈으로, 오래전 기억이 스며들었습니다.

 

그런 생각에 잠긴 채 후지산 기념관으로 향했습니다. 때마침 다나바타 행사가 한창이었고, 우리는 색종이에 소원을 적었습니다. 호시노상은 “詩をたくさん書けますように(시를 많이 쓸 수 있기를)”이라고 적었고, 저는 “안녕히 가세요, 어머니”라고 썼습니다. 그 한 줄로는 부족해, 슬며시 시어머니의 이름을 적어 후지산이 잘 보이는 쪽에 걸었습니다.
그때 김승복 선생이 씩씩하게 다가와 물었습니다.

“뭐라고 적었어요?”

순간 설명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비밀이에요”라고 말하며 자리를 피했습니다. 말끝에 슬며시 웃음이 났습니다. 삶은 예상 밖의 장면을 끼워넣습니다. 상실이 반드시 비탄만은 아니라는 걸 알려주듯이.

호시노상이 썼지요. 인간은 식물처럼 환경에 따라 구부러지는 존재라고. 시어머니는 오래 투병했습니다. 처음엔 상황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무릎에 힘이 빠지고 근육이 줄면서 결국 생장을 멈췄습니다. 그리고 ‘멈춤’에 대한 자각마저 천천히 시들어갔습니다.

 

바로 전에 펴낸 산문집 『다시 살아주세요』에 이런 문장을 썼습니다. 모든 생물은 이미 만들어진 세계에 ‘내던져져’ 있다고 주장한 하이데거의 관점을 긍정한다고요. 그때의 저는 능동적인 선택만을 찬양하며, 수동적인 삶을 부정하는 말에 반기를 들고 싶었습니다. 이미 내던져진 인간에게 신은 너무 멀고 높게만 느껴졌으니까요.

하지만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삶이 무의미하다는 생각만은 부정하고 싶었습니다. 그 끝이 허무가 아니라는 증거를 찾으려 애썼지요. 그럼에도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야 한다는 진실은 원망스러웠습니다. 별빛, 윤슬, 무지개 같은 순간의 아름다움도 때로는 잔인한 기만처럼 느껴졌습니다. 손에 쥘 수도 없지만, 위험할 만큼 눈부신 것들. 그러나 그것마저 사라진다면 음악 없는 무대, 새 없는 숲, 파도 없는 바다처럼 세상은 황폐할 것입니다.

어쩌면 문학은 결락과 부재 위에 다리를 놓는 일일지 모릅니다. 그 틈을 ‘나’라는 이야기로 메우는 것이 호시노상이 언급한 ‘자유의사’일 수도 있습니다. 그 욕망은 기이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욕망이, 때때로 삶을 계속하게 하는 힘이 된다고 믿습니다.

 

저도 ‘식물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뿌리는 이미 땅속에 박혔고, 선택의 자유는 제한되었으며, 세상은 환경에 의해 미리 결정된 것 같았습니다. 나만의 길을 가고 싶었지만, 종종 타인의 기대나 사회적 규범에 맞춰 적당히 흉내’ 내고 ‘의존’하며 살았습니다.

인생의 분기점이 있었냐는 호시노상의 질문을 곱씹어봅니다. 분명히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사건은 당신이 말한 자유의사에서 벗어난 것이었지요. 이제, 그 시간에 대해 말해야겠습니다.

 

중학교 1학년 여름에, 저는 친구들과 교회에 갔습니다. 서울에서 영성이 깊다는 목사님이 시골까지 내려와 부흥회가 열렸습니다. 그전까지 저는 성탄절이나 부활절에만 가끔 교회에 놀러가곤 했습니다. 그날 예배당은 사람들로 가득 찼습니다. 모두가 다른 존재가 된 것처럼, 하늘을 향해 알 수 없는 말을 외쳤습니다. 울며 바닥을 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처음엔 낯설고 무서웠지만, 곧 웃음이 나와 친구와 몰래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그때 연단에 선 목사님이 외쳤습니다.

“너의 죄를 대신해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

북소리가 울리자, 감정은 더 고조되었습니다. 목사님은 기도하는 사람들의 머리에 손을 얹으며 회개하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손이 점점 가까워지자, 심장이 거세게 뛰었습니다. 손이 머리에 닿는 순간, 저는 그대로 까무러쳤습니다. 눈을 떴을 땐 바닥에 누워 있었고, 친구들이 “귀신 들렸다!”라며 놀렸습니다. 예배가 끝난 뒤, 목사님이 저를 따로 불렀습니다.

“너는 부름 받았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거야.”

‘선택’이라는 말. 저는 그 단어에 전율했습니다.

 

호시노상은 인간의 아주 작은 자유의사’는 그것을 ‘인식’하는 순간 발생한다고 썼지요. 거기서 빛나는 기쁨과 해방감을 느낄 수 있다고요. 저도 공감합니다. 하지만 그날의 영적 체험은 폭력처럼 일방적으로 일어났습니다.

깨달음이 아니었습니다. 깨달을 수 없는 것이 저를 관통했습니다. 호시노상은 저를 요괴라고 불렀지요? 맞습니다. 그 순간 저는 논리 밖으로 튕겨나갔습니다. 그것은 내 몸이 부서지듯 받아들인 사건이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일은 여전히 쑥스럽습니다. 그러나 그날의 경험 없이 지금의 제 문장은 설명되지 않습니다. 당시의 제게는 ‘내던져진 세계’를 뒤흔드는 존재론적 충격이었으니까요. 그 충격은 오래도록 제 안에 남았고, 훗날 시로 쓰게 되었습니다.

 

서울에서 온 목사님은

보이지 않는 것을 믿으라 했다

그것이 믿음이라 했다

 

마지막 나팔이 울리는 날

신도들이 천국으로 올라간다는 말은

아름답고 무서웠다

 

엄마한테 얘기했지만

쪼그려 앉아 마늘만 깠다

물에 불린 마늘 껍질이 쏙 빠졌다

 

우리도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

이곳에서 천국은 얼마나 멉니까

-「안식일」 일부

 

이 고통스러운 세계가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 그게 얼마나 다행인지! 저는 천국을 확신했고, ‘휴거’는 세상의 고통이 끝나는 축제였습니다. 눈부시고 두려운 믿음이었지요. 그러나 이런 복음을 전해도 어머니의 반응은 시큰둥했습니다.

저 역시 인간은 환경 속에 내던져진 대로 살아가는 존재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것은 세계를 정확히 반영하는 씁쓸한 진실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날의 체험은 제 감정이 사람들의 열기와 맞물려 불꽃처럼 점화한 분기점이 되었고, 이후에 저는 종교적 확신과 정치적 확신을 함께 바라보는 눈을 얻었습니다.

 

저는 새벽기도를 열심히 다녔습니다. 아이들을 교회로 데려와 전도했고, 동네 사람들은 저를 ‘예수쟁이’라 불렀습니다. 어머니조차 그 무모함을 부끄러워했지만, 누구도 저를 말릴 수 없었습니다. 제가 경험한 은혜는 진짜였고, 드문 축복이었으니까요.

시간이 흐르자, 신앙은 희미해졌습니다. 부름은 다시 오지 않았고, 그 빈자리에 의심이 자랐습니다.

‘나보다 착한 내 동생은 왜 지옥에 가야 할까.’

열네 살의 일이니 오래된 기억입니다. 지금의 저는 ‘휴거’를 하나의 정치적 은유로 읽습니다. 집단의 언어가 감정의 틈을 파고들면 사람들은 ‘눈사태’처럼 확신에 휩쓸립니다. 그 메커니즘은 종교단체의 집회와 광장의 구호에서도 드러납니다.

 

그 이야기에 닿기 전에, 우리의 첫 만남을 잠시 떠올려봅니다. 평소 일본 정치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본 적이 없던 제게, 호시노상의 편지는 부끄러움과 자극을 주었습니다. 한국의 계엄령을 깊이 염려한 호시노상과 달리, 저는 그 속보가 뜬 날 밤에도 바로 광장으로 나서지 못했습니다. 마음을 다잡느라, 즉시 몸을 던질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가구라자카에서 보낸 두 달 동안, 저는 일본사회의 표면을 스쳤을 뿐이었습니다. 책거리 교류회에서 정치 이야기를 꺼냈을 때,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소감이 궁금했습니다. 그곳에서의 대화는 직설보다는 분위기를 먼저 살피는 쪽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보내주신 편지에서 호시노상이 광장에 나갔던 날의 ‘교차일기’를 언급했을 때, 비로소 우리의 대화가 같은 궤도로 이어질 수 있겠다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 도쿄 도심에서 열린 시위 소식을 들었습니다. 극우 정당을 향한 시민들의 목소리가 모인 자리였지요. 일본에서 ‘시위’라는 단어가 이렇게 생생하게 다가온 건 처음이었습니다. 낯설었지만, 동시에 반가웠습니다. 오래 쌓였던 침묵이 깨지는 듯했고, 저는 멀리서도 그들의 목소리를 응원하고 싶었습니다.

 

우리는 어떤 말에 마음이 움직일까요? 그 말이 내 안의 빈자리를 채워줄 때입니다. 그 확신은 내가 스스로 맥락을 선택한 듯한 착각을 낳습니다. 저는 이런 현상을 저는 한국 정치의 한 장면에서도 보았습니다.

탄핵 정국 때 연이어 보도된 무속 논란이 그 예입니다. 저는 그 일이 개인의 신앙 문제를 넘어선다고 생각했습니다. 무속인이나 종교인이 인사와 정책에 영향을 미쳤다는 보도가 들려올 때, 사람들은 상식적이지 않다 라며 고개를 저었습니다. 하지만 제 귀에는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처럼 들렸습니다.

 

호시노상, 저는 여전히 정치는 차가운 이성 위에 서 있어야 한다고 믿고 싶습니다. 물론 실제의 정치가 언제나 그렇게 움직여온 것은 아니라는 것도 압니다. 그래서 이 말은 단순한 희망이 아니라, 우리가 반복해서 붙들어야 할 요청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불확실한 시대일수록 권력은 이성과 거리를 두고, 오히려 신비와 손을 잡곤 하지요. 열네 살 여름의 부름을 떠올립니다. 그 불가해한 떨림은,사람들을 하나로 모으는 위안이 되기도 했지만, 동시에 권위를 높이는 위험한 힘이 되기도 했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힘은 언제든 동원의 도구로 변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감정이 세계를 인식하는 강력한 관문이라 믿습니다. 집회에서 울려퍼지는 노래 한 소절과 깃발의 무게처럼, 몸에 스며든 감각이 그 관문을 열어젖힙니다. 이성으로는 닿지 않는 틈에 권력은 스며듭니다. 사람들은 그 틈에서 자신의 삶을 설명할 문맥을 찾기도 하지요. 그것이 불확실한 삶을 버티게 하는 확신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확신은 사람들로 하여금, 마치 스스로 형이상학적 권위를 쥔 것처럼 믿게 만듭니다. 이런 확신은 일상의 작은 틈에서도 모습을 드러냅니다.

 

제가 자주 가는 세탁소 주인 할머니는 항상 라디오를 틀어놓고, 설교를 듣습니다. 목사님이 탄핵 집회를 비판하는 방송을 들으며, 할머니도 ‘말세’라고 혀를 찹니다. 그런 식으로 정치와 종교는 서로의 필요를 채웠습니다. 선거철이면 그 결속은 표가 되고, 표는 다시 권력으로 이어져왔습니다. 평생 신을 의지해 온 사람에게 ‘신의 부정’은 곧 자신의 삶의 맥락을 부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지난겨울 탄핵 반대 집회에서 마주한 얼굴들 속에서도, 저는 그 확신이 빚어낸 결연함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날 광장에는 몹시 찬바람이 불었습니다. <오징어 게임>의 ‘영희’ 인형 아래에서 극우 보수 집회가 열리고 있었죠. 저는 ‘탄핵’이라고 적힌 응원봉을 들고 그 앞을 지나갔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봤습니다. 너무 추워 카페로 들어가 몸을 녹이며 생각했습니다. ‘저 사람들은 누군가의 돈을 받고 나온 걸까.’ 그런 생각이 저를 안전한 쪽에 세운다는 사실이 더 불편했습니다. 동시에, 그들도 저를 그렇게 보고 있으리라 짐작했습니다.

 

창밖으로 한 할아버지가 지나갔습니다. 양쪽 귀는 빨갛게 얼었고, 카키색 군용 점퍼에는 ‘전우회’ 마크가 달려 있었습니다. 어깨에 짊어진 깃발 받침대에는 성조기와 태극기, 그리고 이스라엘 국기가 꽂혀 있었습니다. 그 무거운 깃대는 그의 키보다도 높았습니다. 무엇이 그를 이 길로 나서게 했을까요. 그가 실제 전투를 겪은 사람이라면 ‘종북’이라는 말은 단순한 레토릭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목숨을 걸고 싸웠던 세계의 이름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깃발을 십자가처럼 어깨에 메고 걸었습니다. 그 뒷모습에 열네 살의 나를 포개보았습니다.

 

1990년대 여름, 열네 살의 저는 그 부름을 하늘에서 내려온 절대적 목소리라 믿었습니다. 그때의 영적 사건을 환상이라 부를 수도, 감정의 과부하 때문에 일어난 신경학적 반응이라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신의 목소리였는지, 아니면 내 안의 갈망이 만든 메아리였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그 순간이 내 삶에 어떤 변화를 일으켰는지입니다. 저는 그 경험을 통해 인간답게 인식하려는 윤리적 감각을 되찾았습니다. 믿음은 질문 없는 확신이 아니라, 나를 불편하게 하는 의문으로 자라야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호시노상과 저는 같은 지점을 ‘응시’하고 있는 셈입니다.

호시노상이 쓴 “나는 인간을 흉내내는 비인간이다”라는 문장에, 이렇게 응답하고 싶습니다.

“나는 인간을 다시 살아내기 시작한 요괴다.”

 

호시노상이 우주에서 비인간을 관찰하는 외계인이라면, 저는 저승에서 돌아와 이승을 의심하며 살아가는 요괴입니다. 그리고 요괴인 저는 의심과 떠돎 속에서 설명할 수 없는 부름을 받고, 다시 인간의 감각을 되찾았습니다. 저는 지금도 경계 위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경계는 외계와 지구, 인간과 비인간을 가르는 선이 아닙니다. 두 세계가 스치며 흔들리는 자리입니다.

거기에 호시노상이 말한 ‘인식’의 순간과 제가 말하는 ‘부름’이 겹칩니다. 외부의 힘이 저를 관통했고, 그것을 인식하는 순간 아주 작은 자유가 생겼습니다. 그때 저는 인간으로 회복되었습니다. 부름만 있었다면 타인의 문맥에 갇혔을 것이고, 인식만 있었다면 추상 속에서 메말랐을 것입니다. 인간의 감각을 되찾게 한 건, 이 둘이 동시에 겹친 순간이었습니다.

이 편지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서로의 문맥을 모른 채 엇갈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오래 시를 써주세요. 제가 끝까지, 당신의 문장을 응시할 수 있도록.

 

호시노상, 후지산에 다녀온 뒤 시를 쓰셨나요? 저는 지난달 “호시노 도모유키는 별의 들판에서 친구의 길을 가는 자”로 시작하는 시를 써서 문예지에 발표했습니다. 오랫동안 소설을 써온 당신이, 시를 쓰겠다고 결심한 계기가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저승에서 온 요괴인 저는 더위에 강하지만, 외계인인 당신은 체온 조절에 서툴지도 모르겠습니다. 부디 안녕히. 여름이 지나면, 우리의 이야기 또한 새로운 분기점을 맞이하겠지요.

 

 

2025년 8월 15일(金)

서울에서 신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