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를 열기 전, 잠시 망설였습니다.
기다림을 더 붙들까. 아니면 당장 열어버릴까.
지금 읽으면 잠이 확 달아나겠지.
결국 참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편지를 읽고, 긴 생각에 잠긴 동안 어느새 남쪽 창으로 짙푸른 새벽빛이 스며들었습니다.
‘처음엔 혼란스러웠고, 그다음에는 아주 유쾌했다.’
그 소감이 반가웠습니다.
시어머니의 죽음과 애도, 영적 체험, 정치와 종교의 메커니즘까지. 첫 편지에 담기엔 과감한 내용이었지만, 예쁘장한 인사보다 돌진하는 글을 원했습니다.
저는 이 왕복 편지가 하나의 실험 무대가 되길 바랐습니다.
같은 춤을 추지만 서로 다른 스텝으로 춤추기.
당신이 손을 잡고 이 무대로 올라온 순간, 기뻤습니다.
혼란이 시작되었다는 뜻이니까요.
당신의 편지를 읽으며, 김현 시인이 연결해준 첫 만남, 한국 작가들의 우정 어린 환대와 갤러리에서 보았던 김석희 선생의 아름다운 그림까지 한꺼번에 떠올랐습니다. 그 시간이 당신에게 큰 힘이 되었군요. 당신이 그때부터 다른 문장을 준비하고 있었다면, 지금의 편지가 더욱 깊다고 느껴집니다. 다음달에 만날 때는 이번 편지에서 못다 한 304낭독회와 답시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편지 끝에 당신은 원숭이가 나오는 시를 언급했지요.
이 편지의 번역자인 시미즈 치사코 선생이 도쿄의 한 낭독회에서 시를 낭독했다고 메시지를 보낸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 앞에 나서길 쑥스러워하는 시미즈 선생이 오픈 마이크 앞에 섰다니, 그 귀한 장면을 직접 보지 못해 아쉬웠습니다.
꼬리를 물음표처럼 들고
새빨간 원숭이가 물었다 왜?
(…)
원숭이가 가지런히 빗은 문장을 흩뜨려놓았다
단어를 쏙 뽑아냈다 수수깡처럼 부러뜨렸다.
― 「정원과 붉은 원숭이 1」 일부
저도 원숭이처럼 문장을 흩뜨리고 싶었습니다.
사유를 뒤집고, 틈을 보고, 흔들고 싶었습니다.
호시노 상의 사유는 정교한 설계도 같았고 그 안을 피가 도는 몸의 언어로 채우고 싶었어요. 그리고 당신은 그 흔들림마저 품어 새로운 질서를 세웠습니다.
며칠 뒤, 당신의 편지를 재독했습니다. 거기서 당신은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가 있었습니다. 육십 년 동안 ‘자신의 바깥으로 걸어 나간 사람’이 이제 자기 안으로 거꾸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역방향 에스컬레이터를 오르는 것 같았습니다. 내려가는 힘을 거슬러 힘겹게 위로 나아가면서 동시에 과거를 다시 밟고 있는 듯했습니다. 호시노 상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자기 노출의 피로, 해방감, 죄책감이 교차하는 그 얼굴은 어쩌면 오래전부터 당신 안에 있었을지 모릅니다.
당신이 ‘논바이너리’라는 단어를 얼마나 오래 매만졌을지, 그 말이 나오기까지 몇 번의 붉은 저녁을 지나왔을지 감히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생각의 끝에 서늘한 두려움이 스며들었습니다. 우리는 어디까지 자신을 열어 보일 수 있을까요. 거짓 없이, 스스로에게 가장 냉철한 검열자이자 진실한 변호인으로 남을 수 있을까요. 그 문장들이 우리를 견인해줄까요. ‘섹슈얼 아이덴티티는 없다’는 방식을 인정하려면, 당신은 결국 자기 안으로 걸어가 서사를 해체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런 글은 이미 ‘몸’이었고, 그만큼 아름다웠습니다. 다만 저는 그 예리한 문장이 당신을 너무 깊이 찌르지 않기를 바랐어요.
호시노 상.
이번에는 당신이 저를 흔들었습니다.
당신은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성별을 잃었습니다. 아니, 이 어법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섹슈얼 아이덴티티를 잃었다고 해야 옳겠지요.” 잃는다는 것은, 무엇을 새로 시작하기 위해서일까요. 그 질문이 가라앉을 때까지 오래 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밑바닥에 묻어둔 이야기를 천천히 꺼낼 수 있었습니다. 저는 여전히 헤테로 시스 여성이지만, 이제는 ‘다시 태어난 인간’입니다.
몇 해 전, 가슴에 생긴 종양을 잘라냈습니다. 산소마스크를 쓰자마자 잠들었고, 깨어나보니 가슴에 촘촘한 실밥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육 개월 만에 종양이 재발해서, 다시 가슴을 열어야 했습니다. 그때 저는 ‘작은 죽음’을 통과했습니다. 가슴에는 세 개의 활 모양 흉터가 남았습니다. 그것은 몸이 한 번 끊어졌다가, 이어진 흔적입니다.
이 이야기를 쓰다가 글쓰기를 잠시 멈췄습니다. 첫 산문집에서 이미 한 번 쓴 이야기였으니까요. 산문집을 내고 나서, 다시는 이렇게 글을 쓰지 않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 고통을 다시 묘사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독자들에게 너무 생생한 고통을 강요한 게 아닌지 후회스러웠습니다. 제 비명이 커서, 다른 목소리들을 삼켜버린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 번 죽었다고 생각했고, 이미 끝난 이야기로 묻어두었습니다. 흉터를 또다시 벌리면 그 고통이 구경거리가 될까봐 겁이 나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 흉터에 비극이나 극복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싶지 않습니다. 그 어떤 서사의 장식으로도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이 걸어둔 ‘픽션의 잠금장치’는 지금도 유지되고 있나요? 아니면 이미 풀려있습니까. 이미 아문 상처를 열어 보이는 일, 그것은 제 몸을 다시 시험대에 올리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 문장을 쓰는 순간에도 손이 떨려옵니다. 그러나 호시노 상의 문장 덕분에 용기 내어 한 걸음 더 나아가보기로 했습니다. 그 고통이 더이상 나만의 비명이 아니라, 언어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을 경험하고 싶습니다. 빛의 방향이 달라지면 그림자도 달라지듯, 같은 상처도 비추는 빛에 따라 다른 모양을 띱니다. 그 변화를 기록해야겠다고 느꼈습니다. 저의 침묵이 불성실한 선택이라고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제 이야기를 꺼내기로 했습니다.
제 몸은 여전히 사회적 시선과 통제 속에 있습니다. 흉터를 응시하는 일은 그 맥락 속에서 내가 선 자리를 묻는 일이었고, 그 물음은 저를 다시 쓰게 만들었습니다. ‘여성성’은 저의 선택이 아니라 사회가 결정한 통념이었고, 흉터는 그 통념에서 잠시 벗어난 흔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의미에만 머물면 내 몸이 겪은 고유한 시간이 지워질까 두려웠습니다. 저는 다시 흉터를 더듬어보았습니다. 이 흉터를 여성성 상실이나, 정체성의 혼란으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나는 이것을 다가올 전체주의에 대한 면역력을 강화하기 위한 훈련이라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라는 대목에서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집단적 열광과 그 매혹을 끝까지 체험해보고, 그 힘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저항력을 키우려는 시도. 그 생각을 제 몸에도 대입해보았습니다. 이제는 그 고통이 예전처럼 저를 무력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저를 시험대에 세우는 고통이 아니라, 다시는 같은 폭력에 무력하지 않으려는 저항이자, 저를 단련하게 만드는 두번째 피부가 될지도 모릅니다. 이 문장은 처음 쓰는 고백입니다. 흉터를 다시 벌리는 일은 고통을 새로 불러오지만 그 고통이 이제는 저를 삼키지 못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마음먹고 나니, 흉터를 열었던 빈자리에 이렇게 당신의 이야기가 들어왔습니다. 그러니 당신의 고통도 언젠가는, 당신에게 되돌아올 언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시든, 아니면 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무엇이든. 결손은 제 몸을 비워두는 일이 아니라, 다른 존재를 힘겹게 껴안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저는 그 빈 공간을 다른 존재로 채우길 주저하며 살아왔습니다. 이제는 조금씩 그 자리를 열어보려 합니다.
‘여성성’이라는 말을 다시 생각해봅니다. 거리에서, 책 속에서, 다양한 사람들에게서 들려오는 목소리들. 그곳에서 조금씩, 당신이 첫 편지에 썼던 ‘자유 의지’를 찾아보려 합니다. 이 시간을 제 삶의 또다른 분기점으로 기록해둡니다.
당신의 소설 안에 드러나는 ‘거세 모티브’의 감각을 저는 끝내 알 수 없겠지만, 그 표면이라도 점자를 손끝으로 더듬듯 짚어보려 합니다. 그곳에서 당신의 고백과 저의 결손이 멀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당신이 소설에서 도망치고 싶다고 했을 때, 그 마음을 조금 이해했습니다. 저 역시 몸의 변화를 겪고 산문집을 쓰면서, 타인을 약자로 상정하고 연민하는 글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납득과 인과로 매끄럽게 맞물리는 서사는 윤리적으로 자신을 우월한 위치에 두거나 현실을 얇게 밀어버리곤 했으니까요.
그런데 이번에 당신의 고백을 읽으며, 어쩌면 제 발이 닿지 않는 곳까지 조금 더 깊이 내려가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겁이 났습니다.
당신은 이렇게 썼습니다.
무엇을 거부하고 있는지 묻는다면 ‘인간’을 거부하는 것인데, 여기서 ‘인간’이란 소설을 구조적으로 지탱하는 ‘이야기’라는 사실을 알아챘습니다.
그 대목에서 숨을 골랐습니다. 저는 그저 ‘싱글 스토리’에서 멀어지고 싶었던 것뿐인데, 당신은 이야기를 떠받치고 있는 토대를 부수려 하고 있었으니까요. 평생 썼던 언어를 전부 꺼내 내려놓고 싶은 마음, 그것이 얼마나 깊은 절망인지 저는 아직 닿지 못했습니다. 제가 닿지 못하는 자리에서 당신이 ‘이야기를 쓰는 자신’조차 해체하려 했다는 사실이 아팠습니다.
요쓰모토 야스히로 시인의 말을 떠올렸습니다. 혼자 쓰면 끝내 불합격 통보만 내릴 문장도 함께 쓰면 다른 사람이 대신 통과시켜 준다고 했지요. 언젠가 우리도 그런 식으로 한 줄씩 이어나가보면 어떨까, 당신의 문장 옆에 제 문장이 나란히 놓이는 모습을 그려봅니다. 당신이 “시라면 이야기를 대신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썼을 때 그 말을 당신이 이미 시의 문턱에 서 있다는 신호로 받아들였습니다.
지금은 어디쯤 서 있나요?
요쓰모토 야스히로 시인이 쓴 “석가모니의 라우터가 보낸 우주의 와이파이”라는 구절처럼, 미약하지만 신호가 잡히는 곳에서 당신을 부르고 싶습니다.
호시노 상, 시로 오세요.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떨림과 흔들림을 붙잡고.
시는 이해보다 먼저 몸으로 오는 것이니.
흔들리세요.
시는 납득할 수 없는 언어가 삶을 흔드는 자리에도 있으니.
시는 다시 살아가고자 하는 이에게 들리는 작은 ‘부름’과도 같으니.
당신은 지금까지의 인생이 환상 같고, 심지어 배신당한 기분마저 든다고 했습니다. 그 배신감은 누구에게서 오는 걸까요. 우리 자신인가요, 아니면 과거에 우리가 썼던 문장일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지금 시를 쓰고 싶어합니다. 그렇다면 시는 환상이어도 좋지 않을까요. 어쩌면 배신감도 환상의 일부일지도 모릅니다. 환상이 깨지는 순간은 아프지만, 그 아픔은 우리가 끝내 이 세계에 발붙이고 있다는 증거일 테니까요. 환상은 속임수가 아니라, 우리를 끝까지 삶에 붙들어두는 마지막 장치일지도 모릅니다.
처음에 저는 당신의 편지를 상처로 읽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정체성의 부정이 아니라, 치열한 자기 갱신으로 읽습니다. 저도 제 흉터를 벌리지 않았더라면 이다음에 오는 문장은 쓰지 못했을 것입니다.
저는 여전히 여성으로 살아갑니다. 아시아 여성 작가로, 딸로, 아내로, 암이 지나간 몸으로서. 그래서인지 종종 ‘여성’이라는 범주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느낍니다. 당신의 문장과 닿아 재생된 언어를 쓰고 싶습니다.
호시노 상, 지금 어디에 서 있나요? 거울 앞에서 머리카락이 얼마나 자랐는지 비춰보고 있나요. 당신이 쓴 시 「저녁놀의 씨앗」을 다시 읽으며 노을이 벌어지는 상상을 해봅니다. 그 빈자리로 시가 들어옵니다. 오래전에 쓴 시지만, 마치 이 순간을 위해 돌아온 것 같습니다.
나는 다시 태어났지
물음표로, 느낌표로
나는 도살하는 손으로
식탁의 풍요를 위해 기도하는 자
나는 신의 젖꼭지를 빨면서
은총을 더 달라고 기도하는 자
나는 가축의 살을 굽고 튀기면서
혀로 기름진 입술을 핥는 자
꼬리가 다시 생겼지
지퍼처럼 이어진 등뼈를 타고
꼬리는 묻는다 아름답니?
나팔꽃 넝쿨이
다른 식물의 줄기를 휘감아오르는 것이?
이상하지 않니?
가시와 뼈를 구분해 부르는 게
먹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으로 나뉜 세계가
꼬리는 머리부터 척추까지
살점을 들어내고 싶어하지
뼈만 남기고 죄다 발라내고 싶어하지
어떤 영혼은 잘 닦은 구두를 신고
사랑받는 척하다가
집에 돌아오면
홀로 작은 돌을 만지작거린다
어떤 이는 행렬의 맨 마지막에서
차례를 기다린다
식판을 내밀며 기쁨을 근근이 배급받는다
그의 머릿속에 번개가 금맥을 뻗는데도
나는 다시 태어났지
용기 있게 진실을 말하고 친구를 잃기 위해
약한 새끼를 버리고
날아가는
기러기의 노래가
아름답다고 쓰지 않기 위해
― 「꼬리」
당신이 자신의 서사를 해체하는 중이라면 저는 피부를 봉합하며 다시 살아가는 중입니다. 이 떨림을 끝까지 응시하기로 합니다. 만약에 시가 아니면 닿을 수 없는 세계가 있다면 그 환상에 속는 편에 서겠습니다. 우리가 걸어온 시간이 달라서 서로 다른 방향으로 스친다 해도, 언젠가 목소리가 겹치는 순간이 또 오겠지요. 그때, 우리의 시가 서로를 비추는 합창이 되기를 바랍니다.
가을의 초입, 더운 바람과 시원한 바람이 교차합니다.
맹렬한 여름을 보낸 매미 허물이 나무에 붙어 있습니다.
칼로 그은 듯 등이 반듯하게 갈라져 있습니다.
다시 태어나기를 겁내지 말 것.
매미 허물이 전언처럼 붙어 있습니다.
2025년 9월 21일(日)
서울에서 신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