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째 편지가 도착하기 직전에, 서울에서 신미나씨를 만났죠. 여러 가지로 고마웠습니다. 왕복 편지를 주고받는 도중에 얼굴을 마주한다는 것이 어쩐지 신기했습니다. 소설을 쓰고 있는 도중에 소설 속의 인물과 만난 것 같달까요?
신미나씨가 얼마나 마음을 써주는지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시인 신미나씨, 이소연씨, 이동욱씨, 화가 김석희씨와 걸었던 초저녁의 한강은 시간과 공간의 에어포켓이었습니다. 시공간 밖을 산책하는 그 다섯 사람은 지금도 계속 초저녁인 한강에서 맛깔나게 수다를 떨고 있겠죠.
함께 컵라면도 먹고 싶었지만(한강의 밤은 컵라면을 먹는 것으로 완성된다죠?), 공교롭게도 나는 인생 최대의 볼륨으로 울리는 이명 때문에, 눈물을 머금고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강의 라면은 다음을 위해 남겨두겠습니다.
두번째 편지를 보낸 뒤 얼마지 않아, 왼쪽 귀에 돌발성 난청이란 녀석이 찾아왔습니다. 17년 전에도 왼쪽 귀는 같은 병을 앓았고, 돌발성 난청은 경도 난청이 되어 내 왼쪽 귀에 셋방살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난청이라는 녀석을 위해 보청기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 오래된 경도 난청이 어느새 다른 곳으로 이사를 했고, 비어 있던 왼쪽 귀에 이번에는 중도 난청이 입주했습니다. 새로 이사온 중도 난청 씨는 언제나 위세당당한 매미 소리를 내고, 앰프와 스피커까지 끌고 들어와서는 성대한 집들이를 계속합니다. 처음 보는 이웃들과 빨리 친해지고 싶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내 왼쪽 귀 주변은 연일 아침부터 밤까지 엄청나게 소란스러웠고, 난청씨의 이웃에 해당하는 내 몸은 푸념을 늘어놓았습니다.
새로운 난청을 잠재우기 위해 난청의 연회에는 아무도 참가하지 않도록 하고, 난청이 혼자서 떠들다 지치기를 기다리는 방법도 있지만(17년 전의 나는 그렇게 했습니다) 이번에는 나도 야단법석 소동에 동참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니까 한국에 가서 미나씨와 친구들을 만나는 일정을 취소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덕분에 나는 광주와 서울에서 매일 많은 친구와 재회하고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어 신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고, 나의 왼쪽 귀에서는 난청 씨가 나의 즐거운 나날에 자극받아 한층 더 극성스럽게 소리를 내며 연회를 거듭했습니다.
등이 두 조각으로 쩍 갈라진 매미 껍질을 보면, 왼쪽 귀는 극심한 향수에 휩싸입니다. 되돌아갈 수 없는 흙속. 등이 갈라진 틈의 허공에서 의미를 품지 않은 울음소리가 울려옵니다. 나는 이미 귓속의 매미니까요.
나는 내가 모르는 무수한 나의 집합체입니다. ‘나’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떨어져나갑니다. ‘나’들을 통제할 수 없게 되고, 제멋대로 떠들기를 멈추지 못합니다. ‘나’들은 샤워하는 소리를 냅니다. ‘나’들은 매미처럼 대합창을 합니다. ‘나’들은 폭포가 되어 흐릅니다. ‘나’들은 연기의 입자처럼 흩어져 공기에 녹아듭니다. ‘나’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나’들의 모습은 들리지 않습니다. ‘나’들은 여기에 있습니다. ‘나’들은 여기에 있습니다.
다 같이 한강을 향해 걷고 있을 때, 시미즈 치사코 씨로부터 미나씨의 두번째 편지의 번역이 도착했습니다. 미나씨는 “나중에 읽어주세요”라고 말했고, 나는 귀국하고 컨디션을 회복한 다음에야 편지를 읽었습니다.
아직도 나의 마음은 의식 밖을 떠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동요하는 것이 아니라 떠돌 것을 촉구받으면서 떠도는 기분이었습니다. 떠도는 것은 마음 설레는 불안이었습니다.
“그 고통이 더이상 나만의 비명이 아니라, 언어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을 경험하고 싶습니다”라는 말이 빛났습니다.
다시 읽자, 이번에는 “그러나 그런 의미에만 머물면 내 몸이 겪은 고유의 시간이 지워질까 두려웠습니다” 라는 문장이 빛을 뿜었습니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결손은 제 몸을 비워두는 일이 아니라, 다른 존재를 힘겹게 껴안는 일인지도 모릅니다”가 내 안에서 몇 번이나 깜빡였습니다.
의미를 자신에게 설명하려고 하면, 인과관계로 이루어진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은 언어로 고유의 순간을 응시합니다. 설명이 아닌 말은, 다른 존재로부터 찾아옵니다.
이 편지에서 미나씨는 이야기가 아닌 말로, 상처가 “다시 태어나는 순간”을 “두번째 피부” 그러니까 시로 쓴다는 실천을, 나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는 그렇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이 경우의 ‘다른 존재’란, “언젠가 우리도 그런 식으로 한 줄씩 이어나가보면 어떨까, 당신의 문장 옆에 제 문장이 나란히 놓이는 모습을 그려봅니다”라고 한 것처럼 언어를 통해 눈앞에 있는, 이 왕복 편지를 주고받는 상대입니다.
심지어, 아주 오래전에 썼다는 「꼬리」라는 시가 ‘다른 존재’인 예전의 미나씨 자신으로부터 온 언어로서 다시 나타나는 순간을 기록해주었습니다. 지금까지 두 번의 왕복 편지를 마치 예언한 듯한 시를.
나의 시간 감각은 이상해졌습니다. 시간 감각이 이상해진다는 것은 원인과 결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일이었습니다.
귓속 매미의 정체는, 내 머릿속에서 세상 모든 것을 설명해대는 나의 목소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비유도 농담도 아니고, 내 머릿속에서는 잠든 시간을 제외하면 쉴 새 없이 나의 언어가 모든 것을 설명하려고 합니다. 그것을 받아 적으면 그대로 문장이 되는 논리정연한 말이며, 과함도 부족함도 없이 정치한 해설입니다.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문필을 직업으로 삼은 이후 항상 뭔가를 문장화하려는 습관이 그 기저에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한 습성을 지니면서 내 머리는 세계를 끊임없이 자동 설명하는 말로 바꾸는 기계처럼 된 것입니다.
이 설명을 ‘오프’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고, 유일하게 멈추는 시간은 풋살을 할 때입니다. 그래서 나에게는 일주일에 한 번 하는 풋살이 필요한 것입니다.
내가 거부하는 이야기도, 이 벗어날 수 없는 ‘설명하는 나’일지도 모른다고, 이번 편지를 읽으면서 생각했습니다. 소설을 쓰는 일은 그 ‘설명하는 나’에게 저항하는 수단이었지만, 언제부터인가 소설의 언어도 나의 설명에 종속되었고, 그것을 알아챈 뒤에 나는 소설에도 절망한 것이 아닐까?
……라는, 이 고찰 자체가 너무나도 나다운 ‘설명’이네요. 이런 형태로, 항상 앞질러 가거나, 혹은 메타화되어 설명으로 굳어지는 것입니다.
이론으로 무장한다는 말도 있지만, 그야말로 무장입니다. 나는 자신의 무장을 해제하고 싶고, 계속 무장한 채 멈추지 못하는 것을 그만두고 싶습니다. 그 소리 없는 나의 아우성을 제압하기라도 하려는 듯 귓속의 매미는 요란함을 더해가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신미나씨가 시의 실천으로 자신의 상흔에 대한 편지를 쓴 것은, 헤엄치는 것밖에 모르는 펭귄에게, 수영도 비행도 할 줄 아는 괭이갈매기가 “사실은 날 수 있어”라며 날갯짓을 보여주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분명히 나도 날 수 있다고 펭귄이 점프합니다. 뛰어오르는 것인지 날고 있는 것인지, 스스로는 모릅니다. 주변은 새빨갛게 물들었군. 아침노을 속에 춤추고 있기 때문이겠지. 헤엄치는 것도 날아다니는 것도 요령은 같다고 각성하면, 하늘을 뛰어다니는 물고기를 낚으며 지내지. 세계를 둘러보면, 공포가 되살아나지. 그래서 세상으로부터 눈을 돌렸지. 등을 돌렸지. 아르마딜로처럼 몸을 말고 세상을 시야에 담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달아난 그 끝에서 세계는 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세계는 내 뱃속에 있다. 시야를 덮는 나의 배꼽이, 세계.
세계로부터 도망칠 수는 없다. 자기 자신이 세계이기에?
어디에도 안쪽은 없다. 안쪽을 잘라낼 수는 없다. 안쪽을 배반하는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둥글게 만 등줄기를 펴서 크게 뒤로 젖힌다. 안쪽이 끊어지고, 등이 갈라진다. 하얀 속살이 드러난다. 드러난 매미가 깊은숨을 토해내자, 요란한 소리가 울린다. 세계는 귓속, 목소리로 넘쳐나 목소리는 내용을 털어내고 소리가 된다.
나는 그저 편지에 쓰인 미나씨의 말이 되어보려고 노력했습니다. 미나씨의 몸이 되어 체험을 따라 할 수는 없으니, 그 쓰여 있는 언어에 닿을 듯 몸을 기울여, 쓰인 것을 내 것처럼 가까이 느끼는 것입니다.
최초의 “작은 죽음”의 시작과 끝. 그것을 에세이로 쓰고 봉인하기까지의 과정. 그리고 이제, 다시 언어화하여 제2의 피부를 확인하기까지.
몇 번이나 읽고, 언어에 몸을 맡겼습니다. 상상 가는 대로 떠돌았습니다. 감정은 오로라처럼 어지럽게 변하고, 해는 저물어갔습니다.
그것은 미나씨가 말했듯이, 내가 내가 아니게 되고, 그 공백에 ‘다른 존재’가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의미를 이해하는, 해석하는 일로부터 멀어져가는 일이었습니다.
이런 형태로 언어를 발하는 일에 아직 익숙하지 않은 나는, 여차하면 입을 다물어버리기 쉽습니다. 그러니 시에는 침묵이 필요한 것이구나, 실감합니다.
조용히 침묵한다 듣는 것만으로도 바쁘니 언어의 메뚜기는 소리를 먹어치우니
먹을 수 없는 것은 없다 밭도 숲도 사막도 의미도 언어의 메뚜기는 먹어치운다
먹지 못할 것은 없지 밭도 숲도 사막도 의미도 언어의 메뚜기는 먹어치운다
뼈만 남기고 사람 아닌 것으로 다시 태어나다
구별짓는 말은 이제 찾아볼 수 없다
‘다른 존재’는 삼삼오오, 머뭇머뭇 들어왔습니다. ‘작은 죽음’을 경험한 친구들의 말이 잇달아 되살아납니다. 그것은 연상될 뿐으로, 각각이 그 사람 개별의, 그 사람만의 체험과 언어였습니다. 설령 공통되는 부분이 있다고 한들 묶어서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나의 공백은, 포화할 듯합니다.
그렇게 공백이 포화하여, 나는 말을 잃은 적이 있습니다. ‘잃은 적’이라는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잃은 채입니다.
9월 30일에 서울의 카페 ‘핀드’에서 열린 ‘304 낭독회’에서 나는 시인 김현씨의 초대로 시를 읽었습니다. 세월호 사건이 일어났을 때 나는 한국에 있지 않았지만, 혹독한 마음의 상처를 입었습니다. 연일 관련 기사에서 눈을 뗄 수 없었고, 동시에 이미 일어난 사건에 대해 알아보는 것을 몸이 거부하는 것 같았습니다.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이 견딜 수 없게 싫었습니다.
낭독회에서도 조금 이야기했지만, 희생된 304명은 ‘희생자’라는 하나의 덩어리는 아닙니다. 학교나 배 안에서 같은 시간을 보냈다고 해도 그들 각자가 자신의 고유한 인생의 시간을 가진 개개인의 인간입니다. 그 한 사람의 인생을 알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그것은 내 인생 전체분과 같죠. 그런 무게가 304인분이고, 그 모두를 추도하려고 하면 나는 304회의 인생을 다시 살아야 할 필요가 있고, 그 터무니없음에 아연했고, 말이 사라졌고, 시간도 사라졌던 것입니다.
그 이전부터 나의 시간은 멈추었고, 말은 사라졌습니다. 2011년 3월에 일어난 동일본 대지진과 직후의 원전 사고 때부터입니다. 도쿄에 있는 우리 집도 심하게 흔들렸지만 피해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때, 이렇게 인생은 끝나는구나, 생각했습니다. 흔들림은 잦아들고 나와 가족이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한 뒤, 사람과 차와 집이 쓰나미에 삼켜지는 모습을 TV로 보면서 내 마음은 무너졌습니다. 왜, 나는 여기에서 TV를 보고 있고, 화면 속의 저 사람들은 물에 휩쓸려가는 것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후, 나는 내가 불시에 소중한 사람을 잃게 되는 상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어쩌면 내가 갑자기 사라져서 나의 소중한 사람이 괴로워하는 상상. 시간은 흐르지 않고, 그 이미지가 시간에 떠내려가서 사라지는 일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한 사람 한 사람의 상실을, 나는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그 사람이 나였을 수도 있는데, 나는 그 사람의 상실을 내 일로 느낄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썼지만, 나는 이 상실 그 자체를 언어화하는 일이 지금도 불가능합니다. 한 사람의 인생을 소설로 쓰려고 하면 그 대하소설은 끝이 나지 않겠지요. 하지만 시라면, 표현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시에는 시간이 없으니까. 시간이 없으므로 끝도 없으니까. 몇 번이나 시를 써도 괜찮으니까.
나는 면식도 없고, 사건이 없었다면 평생 알 수 없었을 304명이 지금도 개별적인 시간 속에 있음을 느끼고 싶습니다. 그래서 「신월」이라는 시를 썼습니다. 나의 멈춰진 시간, 언어가 사라진 허공에, 내가 모르는 304명의 누군가가 들어오기를 기원하며.
背세、魚ル워루、背세、魚ル워루、
背負える세오에루、背負える세오에루、
당신들은 우리를 背負える세오에루、背魚ら세우오라
背魚り세우오리、背魚れ세우오레、背魚る세우오루、背魚ら세우오라
하지만 이제 그 한을 내려놓아도 좋다.
등(背)이, 휘어지니(折れるから), 그 세월의 등짐 그만 져도 괜찮다.
그 세월(背負い)을 끝내고 이름을 되찾으리라
생명이 바다에 녹기 전
탄생으로 시작된 나의 정체를 되찾으리라
당신들이 남긴 영상이 다큐멘터리로 흘러나왔을 때 나는 바로 보지 못하고 녹화를 했습니다
몇 번이나 보려고 했지만, 재생 버튼을 누른 것은 6년이 지난 뒤였습니다
6년이 지나도, 당신들은 거기에 있었습니다
내년에도 10년 후에도 100년 후에도, 바다와 지구가 없어져도, 언어를 사용하는 생물이 사라져도, 당신들은 거기에 있을 테지요
당신들이 체험한 1초를 상상하는 데 나는 11년 이상 걸렸습니다
11년이 걸려도 손 닿을 수 없는 1초
당신들이 그곳에 있는 한
나의 시간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우리의 시간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사람의 시간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새 달은 차지도 기울지도 않습니다
신월(新月)은 보이지 않아도 거기에 있습니다
― 「신월(新月)」
304낭독회는 그 사건 이후 매월, 다수의 뜻있는 사람들이 호스트 역할을 하며 장소를 바꾸어 열리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받아들일 수 없다고 절망했던 터무니없음을, 304낭독회는 긴 시간을 들여 조금씩 계속하는 방식으로 풀어내고 받아들일 수 있을 거라고 가르쳐주었습니다. 304명이 개별적인 존재였던 것처럼 추도에 참가하는 사람에게도 개개의 인생이 있으니, 참가하는 사람에게도 ‘희생자 추도의 이야기’를 강요하지 않고, 각자 자신의 문맥에서 추도에 참가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장에서 쌓이고 쌓여 화석이 되었고, 그래서 나를 압박하던 상실이 조금 누그러졌습니다.
304명과 동세대인 김규열씨의 낭독과 이야기에도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세월호 세대, 이태원 참사의 세대라는 말과 시선 속에 있었고, 거기에서 벗어났고, 하지만 마주하고자 나타난 언어. 규열씨의 공백에 들어온 것은 황정은씨의 말이었죠.
1인 출판사 ‘결’에서 책을 만들고 글을 쓰는 규열씨와는 도쿄, 간다신보초(神田神保町)의 ‘체코리(チェッコリ)’에서 열린 토크 이벤트 ‘한국의 1인 출판사 동향’에서 만났습니다. 신미나 씨와 김현 씨의 기획이었죠. 그날, 그리고 다음 날 후지산에 함께 올라갔을 때, 미나씨가 시어머니를 여의고 상실의 슬픔 한가운데 있었다는 것을, 앞으로는 함께 기억하게 될 것 같습니다. 후지산에 가는 버스 안에서 나는 규열씨와 나란히 앉아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곳에 흐르던 시간과 우리 앞에 앉아 있던 미나씨의 시간이 겹쳐 있지만 다른 시간이었다는 것.
나에게도 꼬리가 생길 것 같습니다.
다시 살려고 하는 신미나씨의 생명이 언어를 타고 쏟아져나와 ‘비인간(人でなし)’인 나에게 새로운 생명을 전해주는 것 같습니다.
이 편지를 쓰면서 미나씨의 말을 반복하여 읽었고, 여러 날에 걸쳐 몇 번이나 수정했고, 처음 쓰기 시작했을 때와는 크게 달라졌습니다. 왕복 편지를 시작했을 때 생각지도 못했던 영역에 들어온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시인에게 소설을 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그것은 시와 어떻게 다른가요? 어떤 욕구에서 소설을 쓰게 되는 걸까요?
또 학생 같은 질문을 늘어놓고 있습니다만 조만간 그 이야기도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외계인은, 사실은 추위에도 약합니다. 요괴는 더위뿐 아니라 추위에도 강할까요? 모쪼록 추위에 건강하시기를.
2025년 10월 22일(水)
도쿄에서 호시노 도모유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