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흩어지기
호시노 상, 귓속의 매미는 이제 잠잠해졌나요.
매미가 우화하는 순간을 그려봅니다.
생의 가장 연약하고 위태로운 찰나,
그러나 동시에 가장 투명하게 빛나는 순간.
껍질을 벗은 연둣빛 몸이 드러납니다.
조금만 스쳐도 찢어질 듯 얇고 젖은 날개.
매미가 아직 굳지 않은 날개를 폅니다.
그 미세한 떨림이 방안의 공기를 바꿉니다.
당신의 세 번째 편지를 여러 번 읽었습니다.
그리고 책상 위 공깃돌을 굴려보았습니다.
그 문장의 리듬이 손끝의 감각을 깨운 듯했습니다.
공깃돌 하나를 던지고, 둘을 줍고, 셋을 쥐다가, 하나를 떨어뜨립니다.
그리고 다시 처음으로.
손바닥을 뒤집어 손등 위에 두 개를 올립니다.
굴리고, 줍고, 다시 놓습니다.
이 놀이가 제 삶의 리듬과 닮았습니다.
플라스틱 공깃돌 안에는 작은 쇳조각이 들어 있습니다.
찰찰거리는 소리가 공기를 흔듭니다.
멈춤과 움직임 사이에 공깃돌이 그려내는 투명한 궤적.
리듬은 사유보다 먼저 오고,
생각은 리듬을 따라 뒤늦게 옵니다.
저는 늘 궁금했습니다.
사유가 리듬을 따라잡을 수 없을 때,
왜 어떤 문장은 잠시 살아나는가.
감각이 앞서고 이해가 따라오는 그 틈에서만
숨 쉬는 문장이 있을까.
2. 줍기
호시노 상도 아시겠지만, 10월 28일 카페 ‘밑줄’에서 이태원 참사 3주기 추모 낭독회가 열렸습니다. 나카무라 마사, 다나카 사토미, 책거리 교류회의 시인들, 그리고 아직 첫 시집을 내기 전인 장대성, 구윤재 시인까지 함께한 자리였습니다.
우리는 연남동의 서점을 몇 곳 둘러보다가, 이태원 참사를 기억하는 공간 ‘별들의 집’으로 향했습니다. 이란과 일본에서 온 유가족이 사진 앞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시미즈 선생께 통역을 부탁하며 말했습니다. “오늘, 일본과 한국의 시인들이 이태원 참사를 추모하는 낭독회를 열어요.” 누군가 “같이 가자고 할까?”라고 제안했지만, 저는 망설이다가 입을 다물었습니다. 그 침묵이 문장보다 먼저 찾아온 애도였을지도 모릅니다.
‘별들의 집’ 벽면에는 김현 시인과 유현아 시인의 문장이 붙어 있었습니다. 그 문장들을 눈으로 좇아 읽다가, 점심때 마사 상이 했던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숭례문을 보고 울었습니다. 당신에게도 그런 장소가 있나요?”
바로 답하지 못했습니다. 언어로 정리되지 않은 감정이, 언어보다 먼저 왔기 때문입니다.
저는 문학이 언제나 ‘낮은 자리’를 향해야 한다고 배워왔습니다. 그 낮음은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 문장의 높이입니다. 의미를 덜어내는 일이 아니라, 모두에게 닿도록 폭을 넓히는 일이지요. 높이를 낮추되, 밀도는 잃지 말아야 합니다. 그 거리 감각이 문학의 윤리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낮은 자리’라는 말조차 때로는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싱고’라는 이름으로 ‘시툰(詩toon)’을 그렸습니다. 그 과정을 지나며 깨달았습니다. 언어를 버리는 일과 낮추는 일을 혼동했었다는 것을요. 제가 바라는 문장은, 낮게 놓였으나 쉽게 흐트러지지 않는 문장입니다. 당신은 두 번째 편지에서 물었지요. “시 이외의 언어 표현, 혹은 문자 이외의 표현으로 향한” 이유에 대해서요. 이제야 조금 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난 304 낭독회에서 호시노 상이 읽은 「신월」을 떠올립니다. 304라는 숫자를 하나의 덩어리로 묶지 않고, 각자의 1초 곁에 서려는 마음. 그 시를 인용해 「애도의 시차」라는 제목으로 칼럼을 썼습니다. 세월호가 침몰하던 순간, “당신들이 체험한 1초를 상상하는 데 나는 11년이 걸렸다”. 그 문장 앞에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애도에는 언제나 시차가 있습니다. 누군가는 곧바로 울고, 누군가는 시간이 지나서야 비로소 아파합니다. 그 지연은 회피가 아니라, 감정이 언어를 따라잡는 데 필요한 시간입니다. 그렇지만 언어는 끝내 감정을 따라잡지 못합니다. 그 간극 앞에서 잠시 멈춥니다.
시차를 두고 하는 애도는 기억의 깊이를 되묻는 일입니다. 그 느림 속에서만 간신히 나오는 말이 있습니다. 속도 차이를 견디는 것, 그 또한 문학의 일일 것입니다.
이 편지를 쓰며, 저 역시 설명으로 기울고 있음을 압니다. 당신의 문장이 내 안으로 옮겨온 걸까요. 아마 우리가 같은 리듬 위에 서 있기 때문일까요.
3. 다시 놓기
당신은 물었습니다.
“시인에게 소설을 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소설이 시간을 구조화하는 언어라면, 시는 시간을 통과하는 언어입니다. 소설의 시간은 사건의 연쇄로 세워지고, 의미는 인과의 골격 위에 조립됩니다. 시는 그 인과를 건너뜁니다. 사건의 논리 대신 감응의 논리를 세웁니다. 감정이 감정을 잇는 연쇄, 보이지 않는 인과의 리듬으로요. 이해하려는 욕망을 잠시 미루면 뜻밖의 이해가 태어나기도 합니다. 이성적 판단 이전에, 감각의 초과가 먼저 올 때도 있습니다. 그때 리듬은 논리의 가장 먼 기원처럼 느껴집니다.
오래전, 산책중에 본 장면이 기억납니다. 머리 위에서 날카롭게 우는 매미 소리가 들렸습니다. 고개를 들자, 작은 새가 매미의 배를 쪼고 있었습니다. 매미는 울어야 짝을 찾지만, 울면 천적에게 위치가 노출됩니다. 구애의 노래이자 죽음을 부르는 노래. 공포와 연민, 기이한 아름다움이 한꺼번에 밀려왔습니다. 이해보다 먼저 느낀 감정이었습니다. 퍼뜩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해는 감정의 뒷걸음질이고, 감정은 언어를 앞질러 온다.’
호시노 상, 저는 언어 밖에서 사유하는 법을 아직 모릅니다. 그리고 말하지 않으려는 욕망이 다시 말을 부른다는 것도 압니다. 그래서 막막하고, 자주 흔들리고, 실패합니다. 허구로 완벽하게 짜인 서사는 미학적이지만, 때로는 숨막힙니다. 저는 빈틈이 있는 문장, 그 틈새로 공기가 드나드는 리듬을 쓰길 원합니다.
이런 문장이 저를 드러낼까봐 두렵지만. 한편으로는 문장이 저를 변호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문장이 저로부터 한 걸음 떨어져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숨이 통합니다. 설명할 수 없는 말 사이에서 길을 잃었다가, 다시 숨쉬게 되는 통로가 제 시의 입구이길 바랍니다.
낭비하고 싶다.
다리가 세 개뿐인 의자,
기울어진 높이 위에 너를 앉히고
슬픔을 낭비하자.
기역 탈락, 시옷 제거, 비읍 탈주
리을, 이리 나와 차렷!
의미를 포섭하지 말 것,
문장으로 줄 세우지 말 것.
백혼무언지신위(白魂無言之神位),
백골신위(白骨神位), 백련신위(白蓮神位),
백설신주(白雪神主), 백영지위(白影之位).
모든 문장이 수사를 벗어난다.
비극을 미학으로 세우는 문장,
빽빽한 모음의 종장.
초장의 밑장부터 뺀다. 다 무너뜨린다.
뼈를 비틀고 관절을 맞춰
쓰러지고, 다시 태어난다.
천국은 진심이 명명백백해서,
지옥에서도 버림받은 문장은 숨을 곳이 없으니.
그 누구의 편도, 적도 아닌 시.
사랑받는 법을 모르는 시.
피와 땀과 재가 섞인 시.
너인지 나인지 우리인지 묻지 않는 시를 쓰자.
거기, 너.
높다란 의자 위에서,
목소리가 닿는, 않고, 서는, 그래, 우두둑, 너.
땀을 흘리며 짐승처럼 노동하는 너.
난폭하게 사랑하고, 죄를 말하고 끌어안는 너.
분노로 차갑게 식을 자유,
문장으로 이해받지 않을 자유.
은유에 종속되지 않을 권리,
권리를 부술 권리,
의미의 과밀 구간을 통과할 권리.
또 숨으려고 한다.
빛과 하늘과 어머니,
그 흔한 무성영화,
국가 의례
첫눈 속으로, 노을 진 풍경 속으로.
클리셰의 마침표로 봉합하려고.
하지만, 이 문장은 삼가 축문(祝文) 밖에 있습니다.
탈락하고, 기어다니고, 비명을 지르는 활자들이
아직 그 자리에 있으니,
정돈하지 마.
생체로 말하자.
심장이 노동하듯이 통과하자.
슬픔은
부드럽고 얇고 흰 것을
붕대처럼 들고 서 있다.
상하지 않게 하려고.
무엇으로부터?
무엇으로부터.
무엇?
무엇.
― 졸시 「생체(生體)」
“깨달음이 아니었습니다. 깨달을 수 없는 것이 저를 관통했습니다.” 첫 편지에 썼던 이 문장을 기억하나요. 그 말을 되새기며, 이 시를 여러 번 고쳐 썼습니다. 깨달을 수 없음 또한 하나의 인식이라는 것. 그것을 ‘인식’하고, 문장이 스스로를 이합집산 하도록 두는 일. 그 힘으로 이 시를 밀고 가고 싶었습니다.
호시노 상은 말했지요. “왕복편지를 시작했을 때 생각지도 못한 영역에 들어온 것 같습니다”라고요. 저도 확신할 수 없는 말 위에서 문장을 씁니다. 그러므로 저의 애도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애도는 완결이 아니라, 계속 도착하는 리듬입니다. 설명을 피하려 했지만, 또 설명하고, 침묵하려 하지만, 그 틈에서 새로운 말을 만듭니다. 흩어지고, 모였다가, 다시 흩어집니다.
그러니까 시는 ‘다른 존재’에 닿지 못함을 견디는 언어일지도 모릅니다. 비켜선 자리는 회피가 아니라, 멀리 있는 존재에게 닿기 위한 우회입니다. 그 우회는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닿을 수 없음을 인정하는 거리입니다. 거기에 말줄임표를 놓고 싶습니다. 징검돌 하나, 둘. 누군가 그 돌을 밟고 건너온다면 저의 애도도 ‘나’라는 좁은 시야를 벗어나 타인을 향한 문장이 될 수 있을까요.
당신의 비유를 다시 가져와봅니다. 사실은 몸집보다 훨씬 작은 날개를 단 괭이갈매기. 그 쉼 없는 날갯짓은 하강을 막는 유일한 리듬이지요. 그런 갈매기가 굉장한 속도로 헤엄치는 펭귄을 보며 훈수 두는 것 같은 말만 늘어놓았습니다. “더 빨리 헤엄쳐!”라고요.
저번에 메시지로, 이틀 동안 다섯 명의 시인들과 함께 연시를 쓰셨다고 하셨지요. 그 자리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 궁금합니다. 추모 낭독회에서 『GOAT meets』에 실린 시를 마사 상과 사토미 상이 읽었습니다. 그야말로, ‘시를 정성껏 줍는 행위’가 눈앞에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시미즈 선생이, 서늘하고 단단한 발음으로 낭독한 이제니 시인의 시도 귓속에 맴돌았습니다.
흐느끼는 것은 내가 아닌데,
내가 흐느끼고 있는 것만 같았다.
속으로 속으로 모두 조금씩 울고 있는 것 같았다.
― 이제니, 「발화 문장 연습―모두 울고 있는 것 같았다」 일부
오른쪽 귀에서 왼쪽 귀로, 매미의 울음이 붉은 선을 따라 구불거리며 천천히 빠져나갑니다.
매미가 달라붙어 울던 은행나무 아래, 이제 노란 잎이 집니다. 바람이 차가워지고, 코끝이 시린 계절이 찾아왔습니다.
추위에 약한 외계인, 손과 발을 따뜻하게 해두세요.
여기에 다 담지 못한 침묵은 あとで.
다음 편지를 기다립니다.
2025년 11월 7일(金)
서울에서 신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