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회

다시 태어나기

눈앞에 오렌지가 하나 있습니다. 지난주, 큰어머니 장례식에 올려졌던 과일바구니에 들어 있던 걸 상주인 종형이 나누어준 것입니다. 빨간 사과, 파란 사과, 그레이프프루트와 함께. 

왕복편지에서는 이미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주고받았건만, 다시 ‘죽음’으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코로나가 시작될 무렵부터 본가 근처에 사시는 큰어머니와 이야기할 기회가 많아졌고, 어릴 때 돌봐주셨던 웃어른과의 관계가 아닌, 조금 달라진 입장으로 이야기 나누는 것이 즐거웠습니다. 큰어머니와의 대화는 별일 아닌 이야기로 가득했지만 풍요로운 기분을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마치 나 자신도 인근의 아줌마 무리에 섞인 듯한 기분이었달까요? 

인생관은 많이 다른 분이지만, 큰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면 아주 조금은 큰어머니의 삶을 살고 있는 듯이 느껴지면서 그 밀도 높은 인생에 압도되곤 했습니다. 그리고 큰어머니가 굉장히 담대한 사람인 걸 알고 현기증이 나기도 했습니다. 제 발밑으로 손오공의 구름이 떠오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지금까지와는 다른 각도에서 큰어머니를 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이 오렌지는 신미나씨가 던진 건지도 모르겠네요. 

저는 오렌지를 손에 쥐고, 천천히 돌려보고 문지르며 감촉을 확인합니다.  

내가 다 읽지 못했던, 내가 모르는 채로 남은 큰어머니를, 조금 더 읽어보려고 말이죠.  

구르며 통통거리며 가는 사이에 빨간 사과, 파란 사과, 그레이프프루트로 갈라졌을까요?  

 

어제 시인이며 소설가인 이장욱씨의 토크 이벤트가 있었습니다.  

이장욱씨는 K-BOOK진흥회와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운영하는 ‘라이터 인 레지던스’ 프로그램의 올해 체재자로 바로 며칠 전 일본에 오셨습니다. 신미나씨에 이어, 두번째 초빙작가가 되겠네요.  

이장욱씨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학생들의 시를 많이 읽다보니, 줄 바꾸기 방법과 조사의 사용법을 보면 그 사람의 시적 경험을 왠지 모르게 알 수 있다. 읽고 쓰는 일이 축적된 사람은 자신의 감각으로 리듬을 타고 조사를 쓰고, 행을 바꾼다. AI에게 시를 읽게 하면 비슷한 해석을 할 수도 있겠지만, 줄 바꾸기나 조사를 쓸 때의 리듬감은 이해하지 못한다.” 

제가 요약한 거라 오독한 부분도 있을지 몰라요. 이장욱씨는, ‘우리는 늘 서로를 오독하고 있지만 그것이 인생이며 인간이어서 이 차이로부터 에너지나 애정이 생겨난다’고도 말했습니다.  

그런 이유로 나는 지금, 줄 바꾸기가 겁이 납니다. 대담하지 못해서 조금 보수적으로 줄 바꾸기를 합니다.  

아쉽지만요. 정말로 이장욱씨가 말하는 것과 같은 의미를 느꼈기 때문에, 지금 소설이 아니라 시를 읽고 쓰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신미나씨와의 편지를 통해 반걸음의 공백, 거리 두기를 실천하고 있으니까요.  

 

지난번 편지 「굴러가는 오렌지」에서 신미나씨는 이렇게 썼습니다.  

 

“의미를 붙이기 전인데도 이미 와 있고, 

나중에야 그 둘레를 더듬게 되는 감각.” 

 

“한 번 스치고 지나간 뒤에야 

그 남은 감각을 더듬어, 

저는 한 사람의 윤곽을 언어로 그려내곤 합니다. 

 

저는 종종 사람을 잘못 읽습니다.” 

 

말로 그려내는 것이니 오독이 일어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읽으니까, 잘못 읽는 일도 생기는 거지, 하고요. 언어가 없는, 예를 들면 함께 살았던 이응과 배호와 신미나씨 사이에는 오독이 존재할까요?  

나는 아주 친한 사람끼리 말을 통하지 않고도 통하는 모습을 보고, 마치 동물들처럼 마음을 나누고 있다고 느낀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제 신변에서도 일어납니다. 아, 이 사람은 지금 만면의 웃음을 지어 긍정하고 있지만 사실은 슬픔을 느끼고 있구나, 또는 새가 하늘을 휙 하고 가로지르는 모습을 보고 작은 감명을 받았구나, 알 수 있을 때가 있죠.  

그것을 말로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말로 확인하는 순간, 아주 작은 어긋남이 생기는 느낌이 들 테니까요.  

4월에 서울에서 신미나씨와 마주하고 있을 때도 그런 순간이 여러 번 있었어요. 신미나씨도 “동물적인 감각에 기대었”다고 쓰셨던 것처럼.  

한참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신미나씨가 자기검열을 하고 있는 듯한 순간을 본 적이 있어요. 아, 이게 편지에서 말했던 ‘검열’이로구나, 생각했습니다. 검열이라는 말을 꺼낸 것은 네번째 편지 「빈칸 열기」에서 신미나씨가 이 왕복편지를 작성하는 가운데 자신의 말을 검열했던 경험을 썼기 때문입니다. 저의 내면에도 엄격한 자기검열관이 있어서, 언제나 스스로 하는 말에 눈을 빛내며 지켜보고 있으니까요. 이 순간 두 개의 오렌지가 한꺼번에 리듬을 타며 경쾌하게 튀어올랐습니다.  

 

적절히 줄을 바꾸면, 리듬이 태어난다. 

아주 작은 빈칸이, 리듬을 만든다. 

 

오독도 리듬의 일부이며, 이것이 ‘오해될 자유’인 것이겠지요. 

그것은 정확하게 상대를 느끼면서도, 말로 옮길 때 어긋나버리는 것을 허용하는 데서 생기는 새로운 리듬. 

 

물론, 언어의 태아인 저는 한국어의 어느 지점에 있는지 거의 모릅니다. 서울에서 신뢰하는 친구들에 둘러싸여 기분좋게 지냈지만, 모두가 끊임없이 나누는 이야기를 단편적으로밖에 이해하지 못하고, 제가 어떤 문맥 속에 놓여 있는지 짐작할 수 없었습니다. 눈을 가리고 바다에 들어가 어떤 파도나 물결에 휘말렸는지 피부로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결과, 오독을 후회하는 일도 몇 번인가 있었습니다. 특히 양양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날에는 한국어가 일상인 세계에 몸을 두고 언어의 물결과 파동을 의미로 느낄 수 없으면, 언제까지나 아기처럼 세계를 느낄 수밖에 없고, 누군가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통감했습니다.  

그럴 때는, 나만의 리듬을 타는 기분에 빠집니다.  

 

하지만 신미나씨가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설명’은 또다른 이야기겠죠. 

나는 설명을 하면 무장이 되어버리는 거 같아서, 설명 쪽으로 걸음이 향하는 것에 경계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소설 쪽이 좋은 건지도 모릅니다. 무엇을 ‘설명’하려고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쓴 시들은 마음가짐을 설명하는 쪽으로만 열어두었으니, 그런 만큼 사족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자, 그럼 인물을 설정하고, 시간이 흐르는 방향을 가리키며, 소설을 시작해볼까요…… 시에는 존재하지 않는 굴레를 쓰고 말이죠.  

 

자신이 무언가의 환생이라 믿는 친구 셋과 매달 초승달이 뜨는 밤에 모이고 있다. 비가 오든, 날이 맑든. 혀에 기쁨으로 남는 밥을 먹고, 거품이 부드러운 술로 목을 축이며.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지는 5월의 비처럼 중얼거리며. 

Y는 자신이 난의 환생이라고 믿는다.  

“믿고 있는 게 아니야, 그냥 사실이라니까.” 

끈질기게 반복한다. 나와 J는 그런 것쯤 이해하고 있으니 “힘주어 말할 필요 없잖아” 하고 타이르지만, 이미 입버릇이 되어버린 듯하다. “다시 태어나면 난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투덜거리기 시작하는 건 토해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스트레스가 쌓였다는 신호. 

J는 자신이 개라고 생각한다. 환생이라기보다, 알 수 없는 돌발적인 이유로 인간의 모습을 한 처지가 되어 버렸을 뿐, 개라는 사실에 변함은 없다고 한다. 하지만 개다운 행동은 하지 않고 짖지도 않고 충성스럽지도 않고 아첨도 하지 않고 용모도 개와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개로서 자신에게 적란운처럼 두터운 긍정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야말로 개라는 증거라나.  

 

그리고 나는, 무엇을 감추겠는가? 나의 환생이다. 이렇게 말하면 대부분의 사람은, 몇번째 인생? 하고 묻는다. 하지만, 타임 루프는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클론? 그러니까 나다움이라든가 자기표현이라든가, 그런 건 생각한 적도 없다. 나의 환생인 나는 여기저기 그때그때 무수하게 존재하며, 심지어 늘어나고 있다.  

모임을 하게 된 계기는, J가 개라는 사실에 눈떴기 때문이다.  

나와 Y는 풀 워킹 교실에서 만났다. 무릎이 약해진 우리는 둘 다 의사가 수중 걷기를 권해서 등록한 것이었다. 클래스를 마친 뒤에도 초등학교 실내 수영장이 외부인에게 개방되는 시간에 가끔 만났다. 수중 산책이라 부르며 수다를 떨면서 망상의 바다를 걸었다.  

“개헤엄이네, 이거.” 

그렇게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향해 나와 Y가 고개를 돌리자, 이웃 레인에서 아연한 표정으로 멈추어 선 J와 눈이 마주쳤다.  

“드디어 알았어. 그래서였네.” 

J는 우리에게 설명했다. 

Y는 애매하게 “개헤엄이라서?” 하고 앵무새처럼 되물었다.  

J는 환희에 찬 시선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이것으로 모든 게 설명됩니다” 

라고 말했다. J는 우리보다 꽤 젊다.  

“그러니까, 개인 거지.” 

그렇게 자신을 들여다보며 중얼거린다.  

수영장에서 나와 우리는 함께 저녁을 먹으러 갔다.  

“어제, 밤하늘이 완전히 눈을 감는 순간을 봤어요.”  

J가 말했다.  

“그렇다면, 달은 지금, 다시 태어날 준비를 하는 중인가?” 

Y가 대답했다. 

“달은 다시 태어나도 달이네. 친근감 솟는걸?”  

내가 말했다. 

J의 청을 받아, 나와 Y도 ‘시작’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우리 두 사람 모두 시작은 없는 것이었다. 

나는 철이 들 무렵부터, 아니 태어났을 때부터, 아니 태어나기 전부터, 나는 나의 환생일 수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Y는 원래 난이었기 때문에 철이 들지 않았던 사춘기, 친구들이 성에 눈떠 유치해질 무렵, 자신이 난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깨달은 순간 인간으로 타락해버렸다고 한탄했다.  

“그후로 반세기, 난이라는 자의식이 나를 난으로부터 소외시키는 거지, 나 말이야, 나.” 

“난은 수명이 얼마나 되지?” 

J가 묻자, Y는 화가 난 듯이, 

“수명이라는 사고방식 자체가 인간 

난은 난으로서 멸종되지 않는 

한, 영원” 

이라고 답했다. 그러니까 나와 J도 Y가 인간으로서 죽더라도, Y는 죽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 최근에는, 

“난으로 돌아갈 때가 가까웠다고 생각하면, 대부분의 일은 참아넘길 수 있어.” 

그렇게 말했다. 

이 경우 어느 난을 곁에 두면 Y와 함께 있는 게 되는 걸까? 어차피 Y는 ‘어느 난이라도 나’라고 기쁜 듯이 대답할 테지만, 묻지는 않는다. 그저 어느 난을 곁에 두더라도 나도 Y를 느낄 테지만, 쓸쓸한 기분은 내내 사라지지 않을 것도, 알고 있다. 어쨌거나 나는 나의 환생이니까. 

“P는 다시 P로 태어나는 거야?” 

이것도 몇 번이나 Y와 J가 물었고, 좀전에도 또 확인했다.  

“그렇긴 한데, 전부 리셋된 나니까. 환생인 내가 Y와 J를 만나도 기억하지 못할 거야. 하지만 새롭게 친구가 될 수는 있겠지.” 

“뭔가 슬프지 않아? 기억은 없는데 그립게 느낀다든가, 그 정도는 있었으면 좋겠다.” 

“아마, 지금 이렇게 사이가 좋은 것도, 벌써 몇 번이나 반복해온 결과일 거야.” 

“나는 달라. 나는 개니까, 난이나 P와는 달라서, 이번 생뿐이야.” 

“그러니까 개였던 J와 만난 거잖아.” 

Y의 말에 J가 갑자기 온몸으로 시무룩해졌다.  

“나는 지금, 개야. 전생이든 후생이든 없어.” 

슬픈 안개가 우리를 감쌌다. 우리는 자신이 혼자라는 것을 알았다.  

침묵하고 있자니, 안개는 지표면 부근까지 가라앉아 시계가 다시 맑아졌다.  

개와 난이 있었다.  

나는 인사를 했다.  

“하지메마시테.” 

 

2026년 5월 9일(土) 

도쿄에서 호시노 도모유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