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회

반란반묘(半蘭半猫)

호시노 상에게 

 

눈앞에 산딸나무 한 그루가 있습니다. 주차장 옆, 비좁은 틈에 서 있는 작은 나무입니다. 이맘때면 십자 모양의 흰 꽃이 핍니다. 멀리서 보면 누가 하얀 리본을 달아둔 것처럼 보입니다.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예수가 못박혔던 십자가가 이 나무로 만들어졌다는 전설이 있다는 것을요. 한국에서는 장례 때 흰 리본 핀을 머리에 꽂거나 옷깃에 답니다. 그래서인지 그 꽃들을 보고 있으면, 작은 애도의 표시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호시노 상은 여덟번째 편지 이후 어떤 시간을 보냈나요. 저는 편지를 바로 열지 않았습니다. 때마침 양양에 갈 일이 있어,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서 읽었습니다. 짧은 소설까지 다 읽고 나니, 몸의 무게중심이 잠시 다른 곳으로 이동한 것 같았습니다. 

저는 그 소설을 시처럼 읽었어요. 귀엽고 이상하고 조금 쓸쓸한 이야기. 그 흐름 안에서 한동안 가만히 앉아 있었습니다.  

 

이장욱 시인이 말했던 리듬에 대해서도 오래 생각했습니다. 조사나 행갈이의 습관은 어쩌면 한 사람의 체형과 비슷한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한 사람을 깊이 만나는 일은, 그가 통과한 시간의 굴곡을 손끝으로 더듬어보는 일과 닮아 있는지도 모릅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빨리 서울로 돌아가 글을 쓰고 싶어졌습니다. 호시노 상의 이야기를 이어받아, 이상하게 웃기고, 조금 무섭고, 서글픈 이야기를 쓰고 싶었습니다. 

 

만약 환생이 있다면, 잠시 머물렀다가 다시 떠나는 휴게소 같은 곳이 있을까요. 이 이야기는 중음과도 비슷한 그곳에서 시작됩니다. 

 

 

반란반묘(半蘭半猫) 

 

Y의 머리카락이 한 움큼씩 빠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배수구에 엉킨 머리카락을 떼어내다보면 젖은 벌레를 만지는 기분이 들었다. 흰머리는 민들레 홀씨처럼 늘어났다. 그리고 어느 아침, 베개 위에 떨어진 가느다란 실뿌리 몇 개를 발견했다. 처음에는 고양이 털인 줄 알았다. 하지만 손끝으로 만졌을 때 그것은 축축했고 아주 희미하게 풀냄새가 났다. 

거울 앞에 선 그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머리카락 대신 난초 뿌리가 자라고 있다는 사실보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것 같았다는 생각이 더 이상했다. 

 

그는 전화 부스처럼 생긴 방 안에 들어가 하루종일 문장을 고쳐 쓰는 일을 했다. 

 

혐오 표현 필터링 

감정 과잉 삭제 

위험 단어 제거 

 

매뉴얼은 단순했다. 

 

“죽고 싶다”는 “쉬고 싶다”로, 

“외롭다”는 “조용하다”로, 

“사라지고 싶다”는 “혼자 있고 싶다”로 바뀌었다. 

고칠수록 문장은 미지근해져 갔다. 아무도 흔들리지 않도록. 

 

저녁이 되자 팔과 다리에 부드러운 털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며칠이 지나자 그는 음식을 거의 먹지 않아도 배가 고프지 않았다. 그저 두피가 마른다고 느껴질 때마다 분무기로 물을 뿌렸다. 물방울이 난초 뿌리를 타고 천천히 스며들었다. 

 

그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다른 생명체를 먹지 않고 살아가는 존재란 정말 매력적이지 않습니까?”* 

하지만 사람들은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너는 동물이야, 식물이야?”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그는 조금 지친 얼굴이 되었다. 어떤 날은 목이 마르지 않은데도 머리에 물을 뿌렸다. 

 

너무 빨리 자신을 설명해버린 걸까. 

그는 점점 대답하지 않게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는 종으로 분류되는 일을 거부했다. 

그리고 인간을 꺼버렸다. 

 

도시에 긴 가뭄이 이어졌다.  

사이렌은 하루에도 몇 번씩 울렸고, 스피커에서는 같은 방송이 반복되었다. 

 

불안 조성 금지 조항 시행중. 

과도한 감정 표현을 금합니다. 

 

뉴스에서는 감정 과잉이 바이러스처럼 번지고 있다고 말했다.  

예기치 않은 리듬. 

돌발적인 말. 

지나치게 슬픈 문장들. 

AI는 그런 것들에 오렌지 라벨을 붙였다. 

그리고 화면 아래에 붉게 ‘불가’ 표시를 띄웠다. 

 

사람들은 입 위에 번역기를 마스크처럼 쓰고 다녔다.  

번역기는 위험한 감정을 자동으로 수정했다.  

 

슬픔은 피로. 

분노는 스트레스. 

애도는 개인적 어려움. 

문장은 점점 매끈해져 갔다.  

Y가 해야 할 일도 점점 줄어들었다.  

 

감정 누설 금지 조항에 따르면,  

검열관 원숭이에게 적발된 사람은 도시 밖으로 추방되었다.  

Y에게는 ‘반란반묘’라는 표식이 붙었다. 

그는 결국 도시 바깥으로 밀려났다. 

 

그가 댐 밖에서 처음 만난 이들은 세 살쯤 되어 보이는 아기와 개였다.  

아기는 겨우 몇 개의 단어만 말했다. 

개는 두 발로 걸으며 아기가 탄 유모차를 끌었다. 

둘은 오래전부터 함께 살아온 존재들처럼 보였다. 

 

안개가 천천히 걷히고 있었다. 

거대한 댐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나치게 밝았다. 

 

“아” 하고 입을 열면 

조금 늦게 “아아아” 하는 에코가 되돌아왔다. 

물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매미 울음 같은 기계음이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반란반묘와 아기와 개, 1세대 AI 번역기인 앵무새 로봇은 댐 한가운데를 걸어갔다. 

그림자는 생기지 않았다. 

그들이 걸을 때마다 젖은 발자국만 길게 남았다.  

 

반란반묘의 머리에서는 난초가 조금 시들어 있었다.  

유모차 안에서 아기가 잠들어 있었다.  

개는 두 발로 서서 유모차를 끌었다. 

 

반란반묘  

(시멘트 바닥을 손으로 짚으며)  

뜨겁다. 

정말 물이 있었나. 

침묵. 

 

앵무새 로봇  

(액정 위 커서가 깜빡인다)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식별.  

물. 

현재 보이지 않음.  

 

반란반묘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게 아냐…… 그래도 있었어. 

 

앵무새 로봇  

입력값 오류. 보이지 않음과 없음의 차이를 계산할 수 없음. 

 

멀리서 시끄러운 엔진음이 들려왔다.  

은색 마세라티 한 대가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운전석에 검열관 원숭이가 앉아 있었다. 

펑키한 음악이 댐 안쪽까지 쿵쿵 울렸다. 

 

검열관 원숭이 

(차창 밖으로 종이를 휙 내밀며)  

야. 

시간 없으니까 빨리 해. 

 

반란반묘가 종이를 받아들었다. 

 

체크리스트 

□ 고양이를 인간처럼 대하는 이유는? 

□ 왜 설명 직전에 멈춰? 

□ 사람을 잘못 읽는 걸 왜 예쁘장하게 포장해? 

□ 죽음을 자꾸 쓰는 이유가 뭐야? 

 

반란반묘 

(미간을 찌푸린다)  

아.  

글씨가 너무 검어. 

 

검열관 원숭이  

뭐? 

 

반란반묘  

햇빛 때문인가. 

 

검열관 원숭이  

시간 없어. 빨리 제출해. 

 

반란반묘  

어디에. 

 

검열관 원숭이  

다음 생에. 

침묵.  

 

부우우웅. 

마세라티가 멀어져갔다. 

반란반묘는 잠자코 체크리스트를 내려다보았다. 

종이를 구겼다가 다시 펴서 읽었다. 

 

개는 유모차 곁을 빙빙 돌고 있었다. 

 

멀리서 다시  

매미 소리 같은 기계음이 들려왔다. 

아기가 잠에서 깼다. 

 

아기 

……사요. 

 

개가 아기를 보고 꼬리를 흔들었다. 

 

반란반묘 

뭐라고? 

 

아기 

사요…… 

 

앵무새 로봇 

사료. 먹이를 요청하는 상태. 

 

반란반묘 

(고개를 갸웃한다)
아닌 것 같은데. 

 

앵무새 로봇 

재번역중. 

사이. 

사막. 

사요나라. 

 

반란반묘 

그만. 

 

앵무새 로봇 

오독.  

관계 종료 실패. 

잔여값 발생. 

 

반란반묘 

그만해. 

 

앵무새 로봇 

초기 언어 데이터 오류 다수 발견. 

사랑, 돌봄, 먹이 구분 실패. 

혼동 발생률 높음. 

 

앵무새 로봇의 액정 위로 이상한 문자들이 깜빡였다. 

 

아이 

アイ 

哀 

間 

あい…… 

 

반란반묘 

그만하라고. 

이제 설명은 지긋지긋해. 

침묵.  

 

개가 모로 누웠다.  

아기도 그 옆에 따라 누웠다. 

잠시 뒤, 

개가 아기에게 젖을 물렸다. 

아기의 울음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반란반묘는 체크리스트 옆에 글씨를 적기 시작했다. 

□ 모르겠습니다 

□ 체온 때문입니다 

□ 설명하면 죽을 것 같아서 

□ 네 

□ 아니오 

 

멀리서 아주 작게 물소리가 들려왔다. 

 

반란반묘 

……들었어? 

 

앵무새 로봇 

인식 실패. 

 

번역기 화면이 칙, 하는 소리와 함께 검게 타버렸다. 

개가 컹, 하고 짖었다. 

멀리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반란반묘가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정령처럼 흰 망토를 뒤집어쓴 마사가 안개 속에서 걸어나오고 있었다.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 뒤로 사토미가 따라왔다. 

사토미는 잠에 취한 사람처럼 몇 번이나 무릎이 꺾였다.  

둘 다 아주 먼 시간을 걸어온 사람들처럼 보였다. 

 

멀리서 다시 엔진음이 들려왔다. 

검열관 원숭이가 거칠게 차를 돌려 마사와 사토미 앞에 멈추었다. 

 

검열관 원숭이 

(창문을 내리며) 

그러니까 너희들이 말하는 게 이거지? 

 

원숭이가 바나나를 던졌다.  

마사가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들었다. 

 

반란반묘 

오렌지가 아니잖아. 

 

검열관 원숭이 

오렌지든 바나나든. 

그게 중요해? 

 

원숭이는 개의 젖을 문 채 잠든 아기를 잠시 내려다보았다. 

짧게 한숨을 쉬었다. 

 

검열관 원숭이 

버틸 수 있을까. 

 

개가 아기의 눈물을 핥았다. 

 

부우우웅. 

마세라티가 멀어져갔다. 

펑키한 음악이 뒤늦게 뒤를 따라오듯 울렸다. 

 

반란반묘의 고개가 천천히 아래로 꺾였다.  

머리 위에서 흰 꽃 하나가 툭 떨어졌다. 

 

마사 

(꽃을 주우며) 

처음 맡는 향이야. 

 

사토미가 가까이 다가와 꽃에 코를 댔다. 

 

댐 안쪽 어딘가에서 목소리가 에코처럼 되돌아왔다. 

 

죽지 마. 

 

잠시 뒤, 

 

죽지 마. 

 

아기가 다시 울기 시작했다. 

개가 시멘트 바닥을 긁었다. 

 

암전. 

 

 

2026년 5월 29일(金) 

서울에서 신미나  

* 호시노 도모유키, 『식물기』, 김석희 옮김, 그물코,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