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우리가 처음 식사를 함께했던 식당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 냅킨 두 장은 지금도 보관하고 있다. 책의 낱장들 사이에 끼워두었다. 한 장에는 대회의 러닝 코스, 다른 한 장에는 꿈의 지도가 그려져 있다. 러닝 코스는 만 장이 넘는 리플릿에 인쇄되지만, 꿈의 지도는 단 한 장뿐이다. 만듦새가 정교한 지도는 아니다. 볼펜으로 냅킨 위에 쓱쓱 그린, 찰나의 크로키에 가까운 것.
처음엔 분명 K3에 설치될 오밀조밀 팝업스토어의 구획을 그렸던 것인데 그게 어째서 어린 시절의 생활계획표로 흘러가버렸는지. 태오의 말대로 이런 게 전형적인 홍해파리 활동일까? 태오도 나처럼 어릴 때 방학을 앞두고 원형의 생활계획표를 그렸던 게 생각난다고 했다. 물건을 잔뜩 밀어넣고 대충 닫아두었던 문이 갑자기 열린 듯 추억들이 쏟아졌다. 이십사 시간을 피자 조각처럼 나눠가며 잠은 몇 시간 잘지 오전과 오후에 무엇을 할지 등을 써넣었던 기억. 조각을 아주 잘게 나누는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잠과 게임으로 이등분을 해버리는 아이들도 있었다. 선생님이 적어도 사등분 이상은 되어야 한다고 말하자 아이들이 억지로 구획을 나눠 세수에 한 시간, 아침식사에 두 시간을 배정했던 것도 생각났다. 나는 원을 최대한 크게 그렸다. 피자로 치자면 레귤러 사이즈가 아니라 라지 사이즈로, 패밀리 사이즈로.
“크게 그리면 시간도 더 많아진다고 생각했던 거죠.”
물론 그때도 그럴 리가 없다는 건 알았지만, 그럼에도 최대한 넓고 큰 피자 도우를 그렸다. 그리고 그 위에 하루치 계획들을 토핑처럼 얹었다. 똑같이 한 시간 동안 게임을 해도 원을 크게 그리면 한 시간 분량의 부채꼴이 더 커지니까 남들보다 많은 시간을 누리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접근하면, 태오씨의 일과는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일, 그리고 잠든 다음에도 또 일! 이거잖아요? 꿈에서도 역무원이니까.”
태오는 대답 대신 내가 그린 동그라미 옆에 살짝 겹쳐 동그라미를 하나 더 그렸다. 이제 원은 하나가 아니라 둘이었고, 서로에게 걸려 있었다. “벤다이어그램 기억나죠?” 하고서 그는 말했다.
“왼쪽 원은 우리가 아는 시간, 그리고 오른쪽 원은 우리가 모르는 시간이에요.”
“모르는 시간?”
“잠이요. 그건 전혀 다른 지대예요. 왼쪽 원이 현실, 오른쪽 원이 잠…… 어? 왜 웃으세요?”
“아까 접시 위에 있던 단무지 같아서요. 한 입씩 먹고 거기 모아뒀던 애들.”
“아? 그럼 제가 한 입씩 먹은 그 부분은 뭘까요?”
그는 두 원이 겹쳐진, 이른바 교집합 부분에 빗금을 그었다.
“여기요. 현실과 잠 사이라고 생각하면 뭐 떠오르는 것 없어요?”
“알람?”
태오가 살짝 웃고는 “꿈이요!” 했다.
“아아, 꿈!”

꿈은 아몬드 모양이구나. 나는 그 교집합을 오래 바라보았다. 태오는 비밀스러운 것을 꿈에 넣어둔다고 말했다. 꿈은 얇지만 찢어지지 않아서 책갈피처럼 어디든 끼워넣을 수 있고, 그래서 좋은 보관소라고. “어떤 의미에서는 생존배낭하고도 비슷해 보여요” 하길래 나는 조금 다른 것 같다고 말해주었다.
“생존배낭은 손이 잘 닿는 곳에 둬야 하거든요. 언제든 갖고 갈 수 있게. 그런데 꿈은 깨고나면 또 접근하기가 너무 어렵잖아요. 비밀을 그곳으로 옮겨두는 데 성공한다 치더라도 되찾을 때는 어떡해요? 꿈에서 빠져나온 다음에 다시 들어갈 방법이 없잖아요. 아아, 태오씨는 매일 같은 꿈을 꾸려나요?”
“그럼요. 출근해야 하는데.”
“거기까지 어떻게 가요?”
그는 내게 꿈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앱을 설치하고, 목적지를 입력하고, 택시를 부르세요.”
그는 지난밤에도 선로에 떨어진 양말을 찾아봤다고 했다. 여전히 없다고. 나는 조금 뜨끔했지만, 그가 꿈에서 그 양말을 본 것 같다는 얘기를 했을 때 뭔가 짜릿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오밀조밀 배낭 안에서 양말을 본 잔상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그가 묘사한 양말이 무엇이든 나는 그게 바로 내가 잃어버린 거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어쨌든 양말은 그의 꿈으로 무사히 건너간 것이다.
“꿈에 갇힌 적은 없어요?”
“악몽이 그렇죠, 가끔 수압 차라고 해야 할지 기압 차라고 해야 할지 문이 안 열릴 때가 있는데, 그때도 당황하면 안 돼요. 앱을 깔고―”
“택시를 부르라고? 야, 이!”
우리는 쿡쿡 웃었다. 태오는 부르기만 하면 택시는 반드시 오고, 그걸 타면 터널과 터널을 무수히 통과하다가 자동판매기 속 음료수처럼 또르르르 굴러나온다고 했다. 꿈의 출구로.
그즈음 한 달간 이어지던 회사 리모델링 공사가 마무리되었다. 각자 짐을 챙겨 다른 층으로 갔던 우리는 드디어 정비된 사무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새 책상, 새 의자, 새 바닥재…… 사무실 곳곳에서 새것의 냄새가 났다. 전에는 없던 것들이 많이 들어와 있었고 기다리던 것들은 오지 않았다. 그중 하나가 변기 뚜껑으로, 팀장이 몇 번이나 확인했지만 ‘오는 중’이라는 말만 들었다고 했다. 대체 어디서 출발해 어디로 오고 있다는 말인가. 팀장은 변기 뚜껑의 동선을 매일 체크하고 싶어했는데, 그 질문을 어디다 해야 할지 당최 알 수가 없다며 답답해했다.
우리 층은 다섯 개 팀이 함께 쓰게 되었는데 팀별 구획도 명확하지 않았다. 기존 사무실이 소품 제조 회사 같았다면 새 사무실은 어딘가 근사한 갤러리 같았다. 곳곳에 놓인 쇼케이스 때문이었다. 적은 인원으로 시작해서 어떻게 서울의 빌딩 여덟 개 층을 쓰는 기업이 되었는지 지난 삼십 년 역사가 다양한 방식으로 전시되었다. 내가 있는 사무실에는 비교적 최근 제품들이 놓였는데, 박물관에 있을 법한 진열장 안에 들어가 있으니 더 긴 역사를 가진 유물처럼 보였다. 쇼케이스 옆에는 깨알 같은 글씨로 제품 설명 라벨도 붙어 있었으나 직원들은 그것을 ‘제품’이 아니라 ‘작품’이라고 부르게 됐다. 사무실과 사무실을 자유롭게 드나들며 다른 장소에 놓인 ‘작품’을 관람하기도 했다.
사람들과 동선이 겹치는 교차로마다 쇼케이스가 놓여 있었다. 처음에는 인테리어를 위한 장식적인 요소라고 생각했지만 하루 만에 생각이 바뀌었다. 장식이라고 하기에는 몹시 절묘한 위치였던 것이다. 사람의 접점을 막으려는 것처럼. 이 책상에서 저 책상으로 걸어가는 길목에 놓여 있어 빙 둘러가야 했고, 자연스레 그 존재를 의식하게 됐다. 마치 기둥처럼 놓여 있어서 아무도 감히 그걸 옮길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가 움직였다. 팀장은 몸을 과장되게 기울여 마치 림보 게임 하듯 내게로 건너왔다.
“그 정도는 아니지 않아요?” 내가 묻자 그는 “앓는 소리를 해야 위에서 듣지”라고 했다. 그가 차기 실장 라인이라는 것은 뜬소문에 불과한 게 아닐까. ‘젊고 유연하게’가 이번 리모델링의 콘셉트였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팀장이 더 힘겨워 보였다. 그는 회사가 업체 사기를 당한 게 분명하다고 했다. 그런 게 아니고서야 이렇게 뜯어놓을 수가 있느냐고. 생존배낭 사무실의 동선이 이렇게나 불편한 게 말이 되느냐고 말이다. 그러면서 내 모니터를 가리켰다.
“제발, 왜 이래. 정물은 그만!”
대기화면에 돌돌 접힌 파라솔 사진이 떠 있었다. “무슨 의미야, 이게 대체.”
“비수기 파라솔이요. 몇 년째 이 화면이었는데요?”
“밑에 사람 그림자가 있잖아. 사람이 왜 정물이 된 거냐고, 원래 이랬어?”
“아, 이거 AI 지우개로 지우다가 물에 비친 그림자를 미처 못 지운 거예요.”
그러자 팀장은 “사라진 몸통은 어디로 갔을까, 데이터센터에 가면 무더기로 쌓여 있을까” 하면서 다시 몸을 기울여 힘겹게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런가? 너무 눈에 익어서 내게는 이상할 것 없는 사진이었는데, 팀장의 말을 듣고 보니 사무실의 새로운 인테리어와 들어맞는 것 같기도 했다. 물에는 사람의 그림자가 비치는데, 실물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사람 대신 파라솔만 있다. 사진에서 내 모습을 지우다가 중간에 멈췄더니, 그때 내 모습이 돌돌 말린 파라솔로 남아버린 것이다. 검은 머리에 흰옷을 입어서 파라솔도 꼭대기 부분은 까맣고 몸체는 하얀 형태가 되었다. 파라솔이 된 기분으로, 그것도 비수기에 접힌 파라솔이 된 기분으로 다시 업무를 이어갔다. 그런 마음가짐이 일할 때 도움이 되니까. 그런데, 그러고 보니 왜 하필 파라솔이지? 나의 본질이 정녕 우산인가? 이건 뭐, 악천후용 빼박이네.
아직 비어 있는 쇼케이스들도 있었다. 책상에 앉으면 눈높이 조금 위쪽으로도 빈 쇼케이스가 보였다. 참 절묘한 위치였고, 낯선 압박감이었다. 알 수 없는 미래가 저 위에 떠 있는 기분이었달까. 잘하면 거기에 오밀조밀 한정판이 들어갈 거라고 했다. 배낭과 그 안에 들어갈 다섯 개의 기본 아이템, 그리고 대회에 참여하는 다른 협찬사의 상품들도 함께. 티셔츠, 배번표, 자외선 차단제, 에너지젤 등등이 포함된 오밀조밀 레이스팩은 늦어도 대회 일주일 전까지 참가자들에게 발송될 예정이었다. 모두 만 개였다. 그리고 잘하면, 이 프로젝트가 성공하면 저 위칸에도 닿을 예정이었다.
어쩐지 조금 멀어진 듯한 최의 책상을 바라보았다. 바로 옆자리 동료였던 그가 지금은 꽤 멀리 있었고, 작품들 때문에 잘 보이지도 않았다. 책상과 책상 사이가 멀어진 것, 그래서 책상들이 마치 섬처럼 느껴지는 게 인테리어 효과라고 믿을 뻔했는데 실제로 사무실의 인구밀도가 조금 낮아진 것이었다. 팀 세 개가 하나로 통합되고, 그 어수선한 인사이동 속에서 우리 팀 인원에도 변동이 생겼다. 줄어든 인원만큼 내 업무가 많아졌다. 오밀조밀 프로젝트만으로도 정신없는데, 무임승차한 업무들이 더 있었다. AI 기술을 업무에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게 구조조정의 핵심이었다지만 믿을 수 없었다. 대체 그들이 어디에 와 있단 말인가? 팀장의 답변은 “오는 중”. 그러고서 그는 “인테리어로 AI 들여왔잖아. 업무용이 아니고”라고 말했는데, 그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비수기 파라솔 사진을 바라보며 DNF! 그렇게 속삭였다. Did Not Finish. 그건 우리가 투지를 불태울 때, 혹은 자조적으로 포기 선언을 할 때 쓰는 말이었다. 완주를 포기하고 싶은, 도망치고 싶은 순간이 꼭 달릴 때만 있는 건 아니니까. DNF를 중얼거리면 옆자리의 최가 자신도 그렇다는 시늉을 하곤 했는데 이젠 내 목소리가 들릴 것 같지 않았다. 태오의 그 싱거운 농담을 떠올렸다. 택시 앱을 켜고 목적지에 꿈을 입력하고…… 그렇게 아몬드 모양 구멍을 뚫는 것.
나는 K선을 세 차례 더 방문했고 그때마다 내 담당자가 여전히 태오이길 바랐다. 태오와 나는 업무 외적으로도 점점 가까워졌는데 그게 홍해파리 활동인지 아니면 조금 다른 무언가인지는 또렷하지 않았다. 그 경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면 모든 것이 바스러질 것만 같았다. 다만 내가 그와의 만남을 은근히 혹은 몹시 기다렸다는 것은 분명하다. 태오와 함께 열차를 타고 이동할 때면 이 지하 선로가 어쩌면 우주의 한 골목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주가 팽창하고 별과 별 사이가 점점 멀어지듯이 역과 역 사이도 점점 아득해지는 것뿐이겠지. 이것 또한 홍해파리 활동일까. 열차 차창 밖으로 보이는, 그 틀에 박힌 어둠은 때로 놀랍도록 황홀했다.
대회 러닝 코스는 열차가 움직이는 방향과는 조금 달랐지만, K선의 역사 열 개와 그 일대의 도로들을 모두 포함하는 방식이었다. 전체 코스의 20퍼센트 정도는 역사 내부를 관통했다. 이 코스를 GPS 기록으로 보면 국자 모양의 북두칠성 별자리와 비슷해서 이미 온라인에서는 ‘국자런’으로 불리고 있었다. 인기를 끌 만한 구간들이 많았는데 그중 하나가 K5에서 K3으로 이어지는 지하 통로였다. 1.1킬로미터 구간으로 원래는 환승 통로로 만들어졌지만, 최종적으로는 선택되지 않아 그냥 빈 공간으로 남은 곳이었다. 평소에는 역무원들이 역과 역 사이를 이동할 때 이용할 뿐, 승객에게는 공개되지 않는 비밀 통로여서 더 관심을 모았다. 지하철 추가 개통이 무산되면서 이렇게 유휴지로 남은 공간들이 K선 안팎으로 더러 있었는데, 하프 마라톤의 21.0975킬로미터를 알차게 만들기 위해 그 공간들도 일부 활용되었다.
빈 공간에서는 종종 문화 무대가 열리기도 했다. 우리가 함께 이동하던 어느 저녁에는 클래식기타 연주자가 있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남자였는데, 그 습한 날씨에도 정장을 차려입은 채로 연주를 했다. 청중은 단 한 명뿐이었다. 비슷한 또래의 남자가 무대와 그리 멀지 않은 자리에, 하필이면 연주자를 등지고 앉아 있었다.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라면 무신경의 극치라고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어쩐지 그 연주자에게 미안해진 우리는 거기 앉아 한 곡을 온전히 듣는 데 시간을 잠시 할애하기로 했다. 그런데 세 곡이나 더 들었고, 중간중간 열심히 박수도 쳤다. 우리가 거기 앉자 지나가던 사람들이 둘셋 더 모였다.
태오는 역무원 근무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열차를 타고 이동하면 먼저 말을 걸어오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 출퇴근 시간이 아니라면 워낙 이용객이 적은 노선이어서 사람들은 서로를 충분히 관찰할 수 있었다. 우리 맞은편에 앉아 있던 할머니 몇 분이 태오에게 함께 사진을 찍자고 한 적도 있었다. 미국에서 온 여행객들이었다. 그들은 엄지를 치켜세우며 태오를 열차 플랫폼의 광고판에서 봤다고 했다. ‘역무원의 얼굴’은 K선 여기저기에 사진으로, 동영상으로 붙어 있었다. 내가 폰을 넘겨받아 사진을 찍어주었다. 그들이 내리자 열차 안은 아주 고요해졌다. 선로 위에서 차체가 흔들리는 소음만 들려왔다. 열차가 지상으로 올라갔다. 다음 역까지의 거리가 가장 긴 구간이었다. 지하철의 속도로 흘러가며 본 밤하늘은 이국적인 단어들을 모두 끌어오고 싶을 만큼 매혹적이었다.
우리는 세 차례 답사를 같이 했을 뿐이지만, 마치 세 차례의 긴 여행을 함께한 것 같았다. 마지막 답사를 끝내고 차고지로 돌아가는 무인 열차에 나란히 앉았는데, 나는 일부러 내릴 곳을 지나쳤다. 그날의 마지막 일정은 계획에 없던 것이었다. 가파른 경사로를 따라 오 분 정도 올라가니 현실과 뚜렷한 단차가 생겼다. 저 아래 열차의 선로들이 마치 악보 위 오선지처럼 보였다. 불 밝힌 창문과 가로등이 마치 오선지 밖으로 이탈한 음표들 같았고, 악보 위로 오늘의 마지막 열차가 들어오고 있었다. 반대쪽에서도 마지막 열차가 지나가고 있었다. 두 열차가 잠시 스쳐지나가는 순간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아까 사진 찍었던 그 할머니들이요. 그 미국 할머니들이 이 위의 호텔에 묵으시나본데 어쩌면 지금도 우리를 보고 있을지 몰라요.”
그는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발코니에 불이 들어와 있어요. 할머니들 목소리가 들려요. 들어봐요.”
귀를 기울이니, 정말 소리가 들렸다.
“그가 왼쪽으로 몸을 돌렸어. 그들은 계속 얘기하고 있어.”
거의 중계 수준이었다. 슬쩍 위쪽을 쳐다보자 목이 꺾이는 소리가 오도독, 하고 들렸다. 주변이 너무 조용한 나머지 그 소리가 몹시 크게 들렸다.
“거의 뭐 무너지는 소린데요.”
나는 목을 왼쪽으로 한 번, 오른쪽으로 한 번, 더 기울였다. 양쪽 모두 오도독, 오도독 소리를 냈고, 그 바람에 또 웃음이 터졌다. 위에서 어느 할머니가 “그들이 웃고 있어”라고 말하는 게 내 귀에도 들렸다. 나지막한 음성이었다. 할머니들이 머무는 발코니로 난간 밖의 것들이 성큼성큼 들어가고 있었다. 산짐승이든 별이든 행인 둘이든. 그 행인 둘 사이엔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얼핏 이런 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다.
“그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어.”
태오도 그 말을 들었을 것이다. 우리는 관객들을 의식하면서도 자리를 떠나진 않았다. 막차가 지나간 지 오래고, 자정이 넘었는데도. 마치 어떻게 퇴장해야 할지 모르는 배우들처럼 그곳에 서 있었다. 한동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할머니들이 방으로 들어간 걸까 생각했던 순간에 아주 나직하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왔다.
“그가 노래를 하네.”
잠시 뒤 다른 목소리가 대답했다. “그녀가 듣고 있어.”
“노래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내가 말하자 태오가 웃었다. “할머니들이 드라마를 쓰시네요.”
“드라마를 보고 있었던 거 아닐까요, 정말로? 방에서 드라마를 보고서 얘기하시는데, 그게 우리랑 우연히 겹친 거죠.”
그가 또 웃었다. “그들이 웃고 있어” 하는 말이 들린 듯도 아닌 듯도 했다. 우리는 올라갔을 때와는 다른 길을 통해 아래로 내려왔다. 염소 소독제 냄새가 나는 수영장과 작은 공원, 그리고 테니스코트 곁을 지나는 길이었다.
하루치의 움직임을 모두 소진한 테니스코트에서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사람은 아무도 없고, 텅 빈 테니스코트 바닥에 공이 몇 개 떨어져 있었다. 바닥에 놓인 라임색 테니스공들이 통통 튀는 율동감을 발산했다. 그것들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지만, 분명 그냥 정물은 아니었다. 나무에서 방금 떨어진 싱그러운 열매들처럼 느껴졌달까. 나는 오른쪽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한입 베어물면 여기까지 새콤한 맛이 쫙 뻗칠 것 같지 않아요? 저 열매요.”
그러자 태오가 하나를 집어들더니 테니스공인 걸 모르는 사람처럼 “어느 나무에서 떨어진 걸까?” 하고 말했다. 나는 “그야 테니스 나무겠죠” 하고 대답했고, 그렇게 우리는 테니스코트 옆 커다란 나무 한 그루를 테니스 나무로 지정했다. 공들은 나무줄기에 매달렸던 기억이 없겠지만, 그 밤의 나무는 분명히 테니스공의 출처처럼 보였다. 아침이 되면 공은 다시 코트 안을 오가다가 밤이 되면 가로등 불빛을 받으며 조금 더 라임빛으로 물들 테고.
이 호젓한 풍경 너머로 마라톤 대회를 알리는 열기구가 보였다. 그게 마치 문장부호처럼, 정확히는 느낌표처럼 보였다. “행사가 끝나면 못 보나요?” 그가 물었고, 내가 “밖에서 봐요” 하고 대답했다. 주변이 숨죽인 듯 고요했다. 테니스 나무만 듣고 있었다. 나무는 풍성한 머리카락을 가볍게 털어내고 있었다.
“테니스 나무를 위해 건배!” 태오가 말했다.
“짠!”
테니스 나무 아래서 그와 처음으로 입맞춤을 했다. 내 안의 이 무수한 술렁거림이 어디서 촉발된 것인지를 그 여름밤에 깨달았다.
이후 며칠 더 그 길로 지나갔다. 그때마다 테니스공은 라임빛 열매처럼 그곳에 있었다. 때로는 카트에 담긴 채로, 때로는 바닥에 뒹구는 채로 반짝였다. 물론 처음에 나를 홀렸던 그 순간의 농도는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그 반짝임을 계속 응시할 수 없을 때가 올까 두려웠다.
어느 밤에는 차가운 얼음을 넣은 술을 함께 마셨고, 잔 속의 얼음들처럼 사랑했다. 잔 안의 사각 얼음들처럼 그렇게 미끄럽게, 곧 녹아 없어질 것처럼. 분명 지금 이 순간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음식을 먹고 이불을 덮고 서로를 만지면서도 노스탤지어를 느꼈다. 이 순간이 영원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아는 것처럼, 그러니까 마치 젖은 음악 비누를 손에 쥐고 있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