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K3의 플랫폼 두 개는 지하 1층에, B9의 플랫폼 두 개는 지하 2층에 있었다. 수직적인 구조였지만 위아래 공간이 완전히 겹치지는 않았다. 두 개 노선을 연결하는 환승 통로의 길이도 꽤 긴 편이었다.
사망 사건이 발생한 지점은 K3 플랫폼에서 B9 플랫폼으로 옮겨가는 지점의 초입. B9의 1번 의자는 당연히 B9의 관할구역이었으나 환승 통로가 끝나자마자 바로 보이는 첫번째 의자여서 조금 애매한 구석이 있었다. 행정이 아니라 이미지 차원에서 말이다. 천장이나 바닥 타일은 B9의 것이었는데 벽 타일에는 K3의 것이 섞여 있었던 것이다. 두 타일 모두 민트색으로 같아 보였지만, B선은 모든 노선에 유광 타일을 썼고 K선은 모든 노선에 무광 타일을 썼기 때문에 분명 차이가 있었다. 타일 사이 줄눈 간격도 달랐다.
노숙인이 누워 있던 나무의자는 B선 특유의 디자인과 재질로 만들어진 것이었으나 의자 뒤편으로 보이는 타일 몇 줄은 K선의 것이었다. 벽의 일부가 K선의 표준 타일로 시공된 것은 몇 년 전 B선 플랫폼이 누수로 시급하게 벽 타일을 교체하느라 생긴 땜질의 흔적이었다. 당시 B선의 표준 타일을 빨리 구할 수가 없어 임시로 K선의 타일을 쓰고, 지금까지 그대로 둔 것이었다. K선의 역장은 같은 역사를 쓰는 입장에서 제공한 선의가 이런 식으로 책임 소재를 다투는 데 언급되어 당혹스럽다고 말했다.
이런 상세한 부분까지 알려진 것은 노숙인이 사망한 당일 찍힌 두 장의 사진 때문이었다. 승객의 신고 전화 이후 경찰이 출동하기까지 세 시간이 소요되었고, 그사이에 이십대 남성 한 명이 그 노숙인의 사진을 찍었다. 그는 사십대 여성이 신고 전화를 할 때 그 내용을 설핏 들으며 지나갔고, 한 시간 후 같은 플랫폼을 다시 지나가면서 여전히 의자에 사람이 누워 있는 것을 이상하게 여겼다. 경찰이나 역무원이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고 승객들도 계속 그 앞을 지나쳐가고 있었다. 그는 휴대폰으로 노숙인의 사진을 두 장 찍었다. 하나는 상반신 중심으로, 다른 하나는 의자 전체가 프레임 안에 들어오도록. 그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겠지만, 어느 사진을 보느냐에 따라 죽음의 책임 소재가 달리 보였다.
노숙인은 K3으로 이어지는 환승 통로 쪽으로 머리를 두고 모로 누워 있었는데, 그의 상반신을 줌인해서 찍은 사진에서는 K선의 타일만 보였고, 줌아웃해서 그의 전신이 모두 담기게 찍은 사진에서는 그곳이 B선이라는 게 보였다. 줌인하면 K선, 줌아웃하면 B선이 되는 그 사진 속 죽음은 온라인에서 여전히 뜨거운 화제였다. 도면상으로든 관리 측면에서든 그곳은 분명 B선의 구역이었으나 클로즈업하면 K선도 연루되었다는 인상을 주었다.
그 사진들이 내 모니터에도 떠 있었다. 쇼케이스는 여전히 텅 비어 있었고 거기 들어가리라 예상했던 제품은 엉뚱한 곳-사건 현장을 찍은 사진 속에서―포착되었다. 광고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또렷하게 보이는 생존배낭. 주변부와 채도 차이가 크게 나서 더 튀어 보이는 오렌지색이었다. 그 오렌지색 배낭 뒤로 K선의 무광 타일들이 보였다.
리스크 관리 회의를 진행하는 것은 내 몫이었다. 다른 회의로 바쁜 팀장을 제외하고, 우리 팀원 두 명과 AI 직원인 T 둘을 회의실로 초대했다. 오전 열시, 모두 각자의 모니터를 마주한 채 회의에 접속했다. T의 도입 이후로 회의 시간은 확실히 단축되었다. 그들은 회의 시작 시간을 러닝 대회 출발선처럼 여기는 듯했다. 시작을 알리는 총성이 울리면 곧장 뛰어드는 것이다. 일 분도 허비할 수 없다는 듯이. 회의는 T의 현상황 요약과 데이터 분석 결과 발표를 시작으로 이어졌다. 회의 지침은 ‘AI가 열고 인간이 닫는다’였다. AI로부터 데이터 보고를 받은 후 책임은 인간이 지는 구조였다.
‘오밀조밀의 지퍼 불량 사례를 검토했습니다. 기존에 고객 만족 센터를 통해 접수된 사례가 열다섯 건이었는데요, 만약 이번 노숙인 사망 사건과 엮이면 리스크가 커집니다. 그간 생존배낭의 지퍼가 필요할 때 안 열린다는 게 말이 되냐는 불만이 지배적이었는데 사람들이 사망 사건과 연관 지어 생각할 여지를 그냥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지퍼 문제는 단순한 결함이 아니라 치명적 하드웨어 오류입니다. 리콜 여부를 검토해 정면 돌파할 수도 있고,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지켜보는 방안도 있습니다.’
T는 전체 제작된 만 천 개를 기준으로 하면 0.136퍼센트의 불량률을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을 정리해주었다. ‘그리고 그것을 전체 리콜한다는 가정하에 계산해보면 회사의 손실은―’ 나는 T의 말을 가로막았다.
“리콜 여부는 현재 검토하고 있지 않습니다. 일단 그 사람은 대회 참가자가 아닌 것으로 밝혀졌고, 대회 이후에 역사 주변에서 배낭을 습득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눈에 너무 잘 들어와서 공교롭긴 합니다. 확실히 리스크가 있긴 합니다만, 그가 메고 있던 배낭의 지퍼에 대해서는 아직 이야기 나온 바가 없죠.”
내 말이 끝나자마자 T가 치고 들어왔다. T는 내 말을 잘라먹지 않으면서도 어느 시점에 내 말이 끝날지 정확히 알고 있는 것처럼 바로 달라붙었다.
‘이미지가 실재보다도 힘이 세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현 시점에서 그런 사고방식은 생존 확률 계산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다른 T가 말을 받았다.
‘어쩌면 고객이 버릴 정도로 우리 회사 제품이 매력적이지 않다는 뜻인가요, 과장님? 중고 거래 시장에서는 오밀조밀 한정판이 개당―’
“그런 뜻이 아니라, 그날 짐 보관소 운영이 엉망이었던 것은 다 아시잖아요. 그분은 러닝 대회 참가자가 아니었고, 히든포켓 자체를 몰랐을 가능성도 높다는 말입니다. 이 가방을 생존 용품으로 인지하고 있었을지 아닐지, 그 안에 포도당 캔디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지 아닐지조차 우리는 알 수 없다는 얘기죠. 그리고 정리하신 것처럼 접수된 지퍼 불량률은 0.136퍼센트에 불과한데, 그것도 단순 파손으로 인한 것까지 포함해서죠. 우연히 배낭을 습득한 사람이 지퍼 불량으로 사망했을 가능성까지 고려하는 건 무리가 있어요. 아직 지하철 회사들도 책임을 분명히 하고 있지 않은데 우리가 너무 앞서나가는 것이 아닐까요.”
‘행사 운영상의 문제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와 상관이 없다고 선 긋는 태도는 리스크 관리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생존배낭의 본질은 소유권 유무와 관계없이, 생사의 기로에 선 누구라도 즉각적으로 생명 유지에 도움이 되는 수단으로 쓸 수 있어야 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우리가 만든 가방을 메고 죽었다는 프레임이 씌워지면 회사의 브랜드 가치는 추락할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죠. 그건 관리자의 태도가 아닙니다.’
관리자의 태도가 아니라고? 이렇게 말한 직원은 인간이 아니라 T였다. T8f9245a의 말. 나는 그 뒤에 숨은 의도까지 더듬어갈 필요가 없었다. 그럴 만한 틈을 그들이 내게 허락하지도 않았다. 다른 T가 금세 말을 받았다.
‘지난 8월 11일 회의 때 과장님이 주셨던 의견입니다. 구매자가 아니어도, 설령 길에서 그 가방을 줍는다고 하더라도 누구나 그 안에서 사람을 살리는 뭔가를 발견해낼 수 있어야 해요. 직관적이어야 한다고요. 광고 카피에도 있듯이 보자마자 아, 이게 날 살릴 동아줄이구나!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순식간에 후두둑 떨어지는 메시지들. 나는 그들을 찢어놓을 필요를 느꼈다. 두 T에게 각자 반대의 입장에서 데이터를 내달라고 말하자 그들은 곧 분석한 데이터를 내놓으며 팽팽하게 맞붙었다.
‘그 노숙인의 사망 원인은 지퍼 불량이 아닙니다. 지퍼 불량과 사망 사이의 직접적인 인과관계를 입증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제조물 책임법을 적용해도 이 생존배낭이 본래의 용도가 아닌 비정상적인 경로로 사용되었을 경우라면 제조사에 100퍼센트 과실을 물리기가 까다로워집니다. 과장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아직 지하철 회사들도 책임을 지겠다고 나서지 않고 있습니다. 이 상황에 우리가 섣불리 움직이는 것은 적절하지 않아 보입니다. 우리는 지하철 회사들과의 관계도 신경써야 합니다. 철저히 중립을 지키면서 우리 회사에 사망 방조 책임이 오지 않도록 선을 그어야 합니다. 자칫 불똥이 튈 수 있습니다. 그런 사례가 이전에도 있었죠.’
‘고객의 불안 해소를 위해 선제적으로 지퍼 전수조사를 하거나 무상 점검이라도 해야 합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가는 생존 용품 회사의 이미지 자체가 흔들릴 수 있습니다. 브랜드 가치가 하락하고, 기업의 신뢰도도 추락할 것입니다.’
‘인과관계가 불분명한데 우리 제품이 안전하지 않을 가능성을 먼저 증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품질에 문제가 있다는 인상을 줄 수 있습니다. 이 정도의 불량률로 전체 리콜을 한다면 그 결정 자체가 우리 회사의 브랜드 가치를 훼손하는 일이 될 겁니다.’
T들은 한참 의견을 주고받은 뒤 선택지를 둘로 압축했다. 나는 “품질 문제와 도의적 책임은 분리해서 가져가겠습니다. 전체 리콜 카드는 현상황에서 고려하지 않습니다”라고 했고, 그들은 다음 지시가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내가 조금만 지체하면 순식간에 스무 개 정도의 팝업창이 모니터를 가득 메웠다. 언젠가 팀장과 함께 회의를 했을 때가 떠올랐다. 팀장의 화법이 좀 의아했는데 왜 그렇게 말하게 되었는지 살짝 알 것도 같았다. ‘어쨌든 지금으로서는 그게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는 상황이 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겠고 그게 참 답답한데 아마 다들 비슷한 상황에 있지 않나 싶기도 하면서 동시에 한편으로는―’ 하면서 말을 질질 끄는 방식이었는데, 팀장은 끝이 오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말이 끝났다고 판단되면 T들이 계속 그다음을 재촉하고 요구하니까. 다른 회의로 이번 회의에 참석하지 않은 팀장은 내게 “담당자 선에서 해결책을 먼저 도모”해보라고 했는데, 그 말이 곧 선 긋기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팝업창은 하나하나 다 확인하지 않으면 계속 깜빡거렸다. 나는 뭐라고 입력을 하려다가 망설이고 입력을 하려다가 망설였다. 입사 초기에는 손끝이 아니라 입술로 비슷한 상황에 놓인 적이 있었다. 말을 하려다가 참고 입술을 열려다가 닫고, 그렇게 거듭 고심하면서 어떻게든 걸러내고 싶었던 것은 이미 뱉은 말이 내 발목을 잡을 가능성, 이미 입력한 글이 내 뒤통수를 칠 가능성이었다. 최대한 두루뭉술하고 안전하게 내 의견을 전달했고, 중견이 되고 과장 직함을 달게 된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속도가 달라졌다. T 직원이 둘이나 합류한 우리 팀 회의는 조금의 머뭇거림도 허락하지 않은 채 몹시 빠르게 진행되었다. 내가 몇 초간 망설이는 것조차도 T에게는 아주 큰 공백처럼, 마치 무슨 의도가 있는 양 해석되는 모양이었다. 그들은 나를 끊임없이 몰아붙이며 질문을 쏟아냈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면 구조물들만 눈에 들어왔다. 쇼케이스, 그 위에 올라간 장식물, 사람 키보다 큰 식물들, 내 어깨에 닿을 만큼 길게 내려온 조명등. 그 모두가 차단벽이고 울타리였다. 그 사이 어디쯤에 팀장이, 최가, 내가, 기타 등등이 숨어 있을 것이다. 그럴 의도가 아니었는데도 숨은 모양새가 되어 있을 것이다. 사람이 셋 이상 모여서 티타임을 하고 왔더니 ‘보안 경고’ 메일이 와 있더라는 얘기도 들은 적이 있었다.
‘과장님, 응답이 30초 이상 지연되고 있습니다. 결정 보류로 기록을 남길까요?’
“다른 분들도 의견을 주시죠. 김 대리님, 최 과장님. 실무자의 직관이 필요합니다.”
그러자 어디선가, 정말 어디선가라는 표현이 정확할 정도의 아득한 느낌으로 최가 말했다.
“이러다 언론 쪽에서 생존배낭을 물고늘어지면 곤란한데, 그 가능성을 알고 싶습니다.”
T들은 곧 예상되는 기사 헤드라인을 뽑기 시작했는데 ‘생존배낭 메고 사망’과 같은 짧은 한 줄로도 우리 회사가 감수해야 할 손실이 엄청났다. 그가 구매자였든 아니든 그것이 생존배낭임을 인지했든 아니든 그 안에 포도당 캔디가 있음을 알았든 몰랐든 관계없이 그 한 문장만으로 생존 용품이 진짜 생사의 기로에서 사람을 구하지 못했다는 인상을 주었다. 몇 가지 데이터 분석을 더 요구하던 최가 DNF라고 중얼거렸다. 소리가 아니라 활자로. T들은 DNF라는 말을 찰떡같이 알아듣고는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상황을 관리해야 합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동안 내가 실시간 채팅보다는 이메일을 선호했던 이유가 무엇인지 다시 한번 절실히 깨달았다. 도처에 깔린 지뢰를 피해 조심조심 걸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실시간 회의에 비하면 확실히 그랬다. 나는 이메일을 쓸 때 관련 업무 수장까지 참조로 걸어 함께 보내곤 했는데, 무엇이 조금이라도 오해되거나 누락되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처럼 어쩔 수 없이 끌려들어간 회의에서는 T가 보내는 질문들을 소낙비처럼 맞아야 했고, 회의가 끝난 후에는 ‘과장님의 결정에 따라 정리된 사안입니다’라는 내용의 이메일을 맞닥뜨려야 했다.
전체 리콜을 제외하자 남은 선택지는 둘이었다. 하나는 추모의 글을 내고 도의적 책임을 통감하며 일정 부분 제품 지원을 하는 것, 다른 하나는 일단 상황을 관망하는 것이었다. 두 지하철 회사가 먼저 입장 정리를 할 때까지.
‘과장님, 최대 2분 이내에 결정을 내려주셔야 합니다. 두 가지 안 중에 어떤 것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승인만 하시면 바로 절차에 돌입할 수 있습니다. 과장님.’
“아 카운트다운을 멈출 수 없나요? 생각을 정리하는 데 방해가 됩니다.”
‘죄송합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과장님의 생각을 방해하려던 것이 아니라, 골든타임을 허비하지 않도록 시각화하려 했습니다. 뇌는 위기 상황에서 인지 편향과 감정적 소모에 빠질 수 있으니까요. 남은 84초를 부디 가치 있게 사용하시길 권장합니다. 집중해야 할 핵심 변수를 다시 요약해드릴까요, 아니면 즉시―’
“잠시 조용.”
‘과장님, 이제 1분 남았습니다.’
요약하자면 악천후용이라는 별명이 붙은 직원이 그 악천후를 온몸으로 읽어내기 시작했다는 이야기. 일할 때 가장 괴로운 구간은 갑작스럽게 뒤통수를 맞는 느낌의 사건보다도 앞으로 분쟁이 펼쳐질 것임을 감지할 때였다. 평소와 다를 바 없어 보이는 길로 서서히 진입하고 있지만, 분명 공기가 평소와는 다르게 무겁고 습하고 무언가가 와르르 쏟아질 것 같음을 모른 척할 수 없을 때, 그렇게 일의 서막을 감지할 때. 한 통의 메일만으로도 진흙탕 싸움이 시작될 거라는 게 보이는 그 불길한 외길을 결국 통과해야 할 때. 내가 쓰는 보고서가 팀장을 지나 실장을 지나 어쩌면 대표에게까지 쭉 올라가겠구나 싶은 예감. 점심에 그런 일에 노출되면 퇴근 후 저녁을 먹으면서도 자꾸 얹히는 느낌을 받고, 소화가 안 되고, 잠도 잘 안 오고, 자다가도 몇 번씩 깨고, 그렇게 온몸으로 증상을 겪었다. 가파른 상황의 초입이었다. 이럴 때는 DNF가 아니라 DNS 하고 싶어졌고. 나는 입력창에 DNS라고 적었다. Did Not Start. T는 그럴 수 없다고 대답했다. 이미 모든 것은 시작되었으며 우리는 관리자라고.
‘과장님의 승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10, 9, 8, 7……’
모니터를 꺼버린 것은 충동적인 행동이었는데 일시정지 버튼은 확실히 아니었다. 십 분 후 다시 모니터를 켰을 때 사각의 창 위에는 뭘 더 심을 여백이 없을 정도로 빽빽하게 팝업창이 떠 있었다. 하나씩 확인을 눌러야만 사라졌다. ‘오프라인으로 도망치는 것은 최악의 위기 관리 대응법입니다, 과장님’ ‘로그 분석중입니다. 다시 접속하지 않으시면 직무 유기, 회피로 기록됩니다’ ‘과장님, 회의중 이탈하신 것입니까? 그게 아니라면 답변 부탁드립니다’ 등등. 마치 도시 하나를 지우는 것 같았다. 나는 그 틈새에 겨우 메시지를 입력했다.
“오프라인상 확인할 것이 있었습니다.”
‘별도의 회의였나요? 그렇다면 오프라인 회의 참석자 명단을 공유해주실 수 있을까요?’
“보안상 어렵습니다.”
‘보안상 필요합니다. 과장님. 이 건은―’
“이 건의 담당자가 누구죠?”
내 말에 T는 ‘임미아 과장’이라고 대답했고, 나는 다음 회의를 다시 공지하겠다고 했다. 거의 동시에 ‘임미아 과장이 다음 회의를 공지할 예정’이라는 이메일이 도착했다.
“사건이 벌어진 B노선의 플랫폼은 깊이가 50미터에 달하는 규모가 큰 역입니다. B선과 K선 두 노선이 교차하는 환승역으로 출퇴근 시간대의 혼잡도는 지난해 기준 220퍼센트입니다. 그러나 이곳에 근무하는 역무원의 수는 수도권 지하철의 평균치에도 못 미칩니다. 두 노선 모두 노선 전체에 안전실을 한 곳만 두는 통합 안전실 제도를 도입했기 때문입니다. 비상시에는 역무원들도 열차를 타고 이동하기 때문에 한 구간 이동하는데 십 분 이상이 소요되고 있습니다. 안전 대책이 전무한 이런 상황은 낮은 운영비로 인해 야기된―”
B노선을 언급하고 있었지만 이런 뉴스로부터 조금도 자유로워질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다. 태오는 자신이 그 현장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머물렀던 사람임을 알았고, 그걸 아는 이가 태오만도 아니었다. 비밀 통로 1.1킬로미터의 존재를 아는 사람들은 K선에도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했다. 온라인을 뜨겁게 달군 타일 논쟁에 이어 신고 전화를 받았던 역무원이 나서서 그 상황을 설명해야 한다는 말들이 거듭 흘러나왔다. 지하철 회사로도 태오를 겨냥한 말이 날아들었다. 역무원의 직무 유기로 인해 이러한 사고가 벌어졌으니 K선 B선 구분할 것 없이 역무원을 징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댓글란에도 비슷한 비난이 차고 넘쳤다. 근무자 실명을 공개해라, 누구냐, 귀찮았겠죠, 아니겠어요? 뻔하지 뭐, 노숙자니까, 원래 늘 이런 식이었어요, 예전에도 비슷한 일 있었던 것 같은데요, B선 혹은 K선에서 일한 경험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구조적인 문제를 짚기 시작했고, ‘역무원의 얼굴’ 사진도 그 비난에 같이 활용됐다.
‘당사 직원에 대한 신상 정보를 임의로 추정하여 유포하는 행위는 명백한 범죄입니다. 법적 조치를 검토하고 있습니다.’
K선은 그렇게 입장을 발표했고, B선도 마찬가지였다. 태오는 회사에서 일주일간 휴가를 받았다. 회사에서 먼저 꺼낸 얘기였다. 나는 테니스코트 뒤편의 카페에서 그를 기다렸다. 사건이 일어난 후 거의 보름 가까이 그를 만나지 못했다. 저만치서 태오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성큼성큼 다가와 꼭 안아주었는데 그게 그의 최선이었다는 것을 곧 알아차렸다. 큰 몸집에 비해서 뭔가가 휘청거리는 것처럼 느껴졌으니까. 못 본 사이에 그는 셀로판지처럼 얇고 수척해진 듯했다. 우리는 구석진 소파 좌석에 나란히 앉았다. 담벼락 뷰였다. 그 너머에 테니스코트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회색 담 위로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물체가 보이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오른편에서 왼편으로, 왼편에서 오른편으로 테니스공은 규칙적으로 이동했다. 단지 테니스공이었다. 담을 치우면, 담 너머에는 아마 테니스 나무 아래 떨어진 라임색 열매들이 있을 테지만 그날 우리는 거기까지 걸어가지 못했다.
“평소처럼 출근했어요? 꿈속으로도?”
태오가 고개를 저었다. “거기도 난리였어요.”
“왜요?”
“꿈속에서 계속 라디오 재난방송이 들렸거든요. 잠시 안내 말씀드리겠습니다. 속보입니다, 이러면서 계속 방송이 치고 들어와서.”
“연결된 게 맞네요.”
잠시 고개를 끄덕이던 태오가 말했다.
“한때는 뉴스 중독이었거든요. 인턴 입사 전까지도. 특히 대형 뉴스들을 봤죠. 내가 너무 사소하고 하찮은데, 그래서 어디에서도 다 누락되는 것 같은데, 떠들썩한 뉴스를 보면 거기 포함되는 것 같아서요. 중심 무대에서 멀더라도 관객석에 내 자리가 확보된 느낌이라 오히려 소속감이 들더라고요. 먼지 같은 내 현실을 잊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렇게 뉴스가 나를 치고 갈 줄은 몰랐어요. 세상이 그물처럼 직조되어 있어서 영원한 구경꾼은 없는 것 같고.”
“태오씨만을 치고 간 게 아니에요.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죠.”
“미안해요.”
그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태오는 자신의 판단 미숙으로 인해 모두가 어려운 상황에 빠졌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모두에 나도 포함된 것이고. 태오의 눈 위로 손을 올려 그의 눈을 감겨주었다. 태오는 잠시 그렇게 임시 가림막 안에 기댄 채로 말했다.
“홍해파리의 회춘이요. 실험실에서는 목격되는데 자연 상태에서 홍해파리가 다시 폴립으로 돌아가는 현상을 발견하지는 못했대요. 그 이전에 병에 걸려 죽을 수도 있고, 포식자에게 잡아먹힐 수도 있고. 실험실에서는 그들이 죽지 않았는데요…… 나, 지금은 실험실 밖으로 나온 것 같아요. 자연 상태요.”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니야, 자연 상태에서도 그런 경우가 있을 거야.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은 것뿐이지. 들키지 않고 오래 시간을 조정하며 살아가는 홍해파리가 있을 거라고. 그러나 말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말할 기운이 내게도 남아 있지 않았다. 태오가 하는 말을 가만히 듣기만 했다. 터질 것처럼 팽팽했던 풍선에 바늘을 찔러넣은 것처럼, 우리 사이의 동요가 그렇게 조용히 사그라드는 소리를 들으면서.
그날 태오가 캡처해둔 이미지를 보게 됐다. 무연고 사망자 공고였다. ‘연고자를 알 수 없는 사망자의 시신을 화장 처리할 예정임을 공고합니다’라는 설명 아래 화장 예정일과 장소가 적혀 있었다. 그 목록 속에서 태오는 자신이 관여되었다고 느낀 죽음을 발견했다. 화장 예정일은 며칠 뒤였다. “태오씨 이거, 가려고요?” 내 목소리가 떨렸다. “왜? 여기 왜요.” 태오는 대답 대신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모르겠어요. 나도. 뭐가 뭔지.”
그가 한 말들은 모두 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는데 일종의 수치심이었다. 수치심. 태오는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이 안일했던 것은 아닌지, 귀찮았던 것은 아닌지, 매뉴얼 뒤에 숨은 것은 아닌지, 그러니까 태오 자신의 말대로 “역무원의 얼굴이었는데 매뉴얼 뒤로 숨어버렸던 것은 아닌지” 끊임없이 되뇌고 있었다. 나는 이어폰을 꺼내서 한쪽을 그의 귀에 꽂아주었다. “우리 노래 들을까요. 아주 긴 걸로?”
그는 웃었지만 웃는 게 아니었다.
노숙인 변사 사건에 대한 K선의 입장은 한결같았다. ‘그 사건은 우리 관할구역의 것이 아닙니다.’ K선의 공식 입장은 그것뿐이었다. B선과 K선의 입장은 달랐다. 그러나 한 사람이 사과문을 올린 뒤 상황은 조금 더 복잡해졌다. 태오가 본인의 소셜미디어 계정에 글을 올린 것이다. 그 글은 ‘저는 그날의 역무원입니다’로 시작되었다.